메뉴 건너뛰기

close

▲ 영국 페어트레이드 마크. "제3세계 생산자에게 더 나은 거래를 보장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박성진
남들보다 '비싼' 바나나를 먹는 브라질 유학생 주앙 아우구스타. 그는 런던에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하고 있다. 팍팍한 삶이지만 간식으로 즐겨 먹는 바나나만큼은 일반 제품보다 개당 4펜스(80원) 정도 비싼 '특별한' 것을 고집한다. 그가 구입하는 바나나 포장지에는 ‘제3세계 생산자에게 더 나은 거래를 보장한다’는 문구가 적힌 페어트레이드(Fair Trade 공정무역) 마크가 붙어 있다.

'그들에게 정당한 값을' 윤리적으로 소비하기

일명 '윤리적 소비'로 불리는 페어트레이드 상품 소비 운동은 세계화의 미명아래 다국적 기업의 시장 장악, 선진국 이익 편중의 불공정 무역으로 발생하는 제3세계 생산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세계공정무역협회(이하 FLO)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남미 대륙, 카리브해 연안국 등 주요 바나나 생산국가의 농약 수입률은 10년 간 적게는 5배에서 10배까지 증가했다. 대표적 바나나 생산국 코스타리카 바나나 농가 남성 노동자의 불임률은 20% 에 이르며 기형아 출산율도 증가추세다.

▲ 영국 웨이트로즈 슈퍼마켓의 바나나 판매대. 위에는 페어트레이드, 아래는 일반 제품.
ⓒ 박성진
이 곳 농민들이 삶을 위협당하며 버는 돈은 일당 1달러 수준이다. 해마다 세계 시장의 바나나 거래량은 늘어나지만 재배 농가의 부채는 줄어들 줄 모른다. 유통 업체의 생산지 수매가는 1kg 당 9펜스 수준으로 생산원가도 감당하지 못한다.

반면에 페어트레이드 제품 가격은 일반 제품보다 10~20% 정도 비싸지만 생산자에게 더 많은 이익이 보장된다. 바나나의 경우 생산지 조건에 맞는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직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소매상 유통 마진 30%가 생산자에게 돌아간다.

아우구스타는 "난 비싼 걸 일부러 살 만큼 부잣집 아들이 아니지만 남미의 바나나 (재배) 농민들이 죽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다"며 "농약에다 말도 안 되는 생산단가 등등 나는 사회 운동가는 아니지만 현실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다"며 담담하게 자신의 '이유 있는' 소비를 설명한다.

이와 같은 소비자들 덕에 2002년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 세인스버리에서는 주당 1백만 개의 페어트레이드 바나나가 팔렸다. 바나나뿐만 아니라 커피도 인기 품목이며 최근 각종 생활 용품에 전반에 걸쳐 페어트레이드 제품이 차츰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웰빙을 위한 페어트레이드

▲ 페어트레이드 마크가 새겨진 바나나와 커피
ⓒ 박성진
페어트레이드 제품이 호소력을 갖는 데는 양심적 소비와는 별개로 건강을 생각하는 웰빙 소비자들의 덕도 크다. 중년의 주부 알리 하울리는 페어트레이드 제품을 사는 이유를 "단지 품질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울리는 "처음에는 (페어트레이드 상품을) 호기심에 구입했지만 신선도나 맛이 일반 제품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며 페어트레이드 제품을 치켜세운다.

페어트레이드 제품은 모두 유기농 제품으로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재배된다. 여기에 철저한 품질 관리도 뒤따른다. 페어트레이드 제품 인증기관은 426개 지역 생산자 그룹과 19개국 페어트레이드 단체와 연결돼 품질 관리와 상품 선별 작업을 거쳐 수준 이하 제품은 과감히 폐기 처분한다.

이처럼 적극적인 품질 관리가 가능한 이유는 최저 가격 보장과 장기 계약 정책 때문이다. 바나나의 경우 생산지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1kg당 6펜스의 기본 프리미엄이 붙어 생산자의 몫으로 더해진다. 또한 FLO 인증 업체와 생산 농민은 다년간 직거래 장기 계약을 맺고 경우에 따라 거래가격의 50% 선금 지불 계약을 맺어 농가의 고정된 수입을 보장하고 생산 투자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FLO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바나나의 소매상 유통가는 2002년 말부터 2003년 중반까지 80펜스가 떨어졌으나 페어트레이드 제품은 별다른 변동이 없던 것으로 조사됐다.

빈곤의 고통에 못 이겨 커피 재배를 포기하고 마약 재배로 돌아섰던 멕시코, 콜롬비아 등지의 농민들은 다시 밭을 일구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양심적 소비와 상관없는 품질만을 고려한 페어트레이드 소비행위도 결국 소비자뿐만 아닌 생산자에게 질적인 삶을 유도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지갑은 가볍다

▲ 슈퍼마켓 차(Tea) 판매대. 할인을 알리는 표시가 붙은 일반 상품과 페어트레이드 상품이 함께 있다.
ⓒ 박성진
그러나 페어트레이드의 앞길이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소비자의 손길은 슈퍼마켓에 수북이 쌓인 할인제품, 즉 값싼 물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퇴 후 국민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다니엘 휘태커는 "페어트레이드 마크가 붙은 걸 보기는 하는데 별 차이 없으면 보다 가격이 싼 일반 제품을 사는 게 나한테는 경제적인 소비다"라며 페어트레이드 제품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유학생 이차동씨는 "나도 여유만 있으면 얼마든 페어트레이드 제품을 살 수 있지만 돈문제를 무시 못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가벼운 지갑만이 아니라 페어트레이드의 실효성과 자유무역 순리에도 어긋난다는 목소리도 페어트레이드에 반하는 중요한 저항력으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자유무역 지지자들의 모임인 영국 애덤스미스 재단에서는 이 운동의 실효성에 의심을 나타내고 있다.

▲ 영국 페어트레이드 협회 홈페이지
재단 게시판에 글을 올린 알렉스 싱글턴은 "커피 가격이 싼 이유는 단지 커피가 과다 생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저 가격을 보장해 주는 공정무역 운동으로 오히려 더 많은 커피 생산을 야기하게 되고 결국 커피 가격은 더 떨어져 생산자는 더욱 비참해 질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밖에도 "조금 더 주고 커피를 산다고 해서 세계의 빈부 불균형이 사라질 리 없다, 페어트레이드는 단지 피상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 "소비자가 양심으로 소비하는가? 소비자는 단지 가격과 품질만 고려한다" "좋은 제품이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고 팔리는 게 순리 아닌가" "왜 시장 원리에 간섭해 억지로 공급을 창출하느냐"는 견해 등 페어트레이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도 적지 않다.

40여 년 전 영국에서 소규모 소비자 운동으로 시작된 페어트레이드 소비는 아직까지 시장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세계 무역량의 0.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아직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2003년 세계무역 규모는 7조2740억 달러였고 이 가운데 페어트레이드 상품 무역규모는 2억 6000만 달러로 0.0036%에 불과했다.

'소비자의 힘', 세상을 바꾸다

▲ 대표적인 페어트레이드 운동 단체 트레이드크라프트(Traidcraft) 홈페이지.1979년 부터 페어트레이드 운동에 참여했다. 1500가지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페어트레이드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며 페어트레이드 대상 품목도 식품에서 생활 용품 전반까지 늘어나고 있다. 거대 기업들도 최소한 자신의 기업을 소비자에게 건전한 윤리 경영을 하는 업체로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페어트레이드 운동에 하나 둘씩 동참하고 있다.

FLO 보고에 따르면, 페어트레이드 상품은 18개국에 걸쳐 매년 20%의 매출 신장을 보이고 있다. 스위스의 경우 페어트레이드 바나나가 미국 다국적 거대 기업인 돌(Dole)사의 바나나를 제쳤다. 현재 스위스 내 전체 바나나 소비량의 20%를 페어트레이드 바나나가 차지하고 있다.

영국은 페어트레이드 마크를 제정하고 해당 상품에 붙여 판매하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연간 수익 1억 파운드(약 2000억) 규모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공정거래 운동 단체인 트레이드크라프트사의 상점에서는 의류, 식품 등 페어트레이드 제품이 연간 240억 원어치가 거래되고 있다. 최근 영국 최대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도 진열 품목 중에 공정거래 제품을 추가했다.

세계화 반대 운동 시위의 단골 표적이 됐던 스타벅스도 페어트레이드 커피 구입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스타벅스는 자사 보고서를 통해 현재 공정무역으로 1년에 1350만 파운드의 커피를 사들이고 있지만 2007년까지는 2억2500만 파운드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스타벅스의 기업이미지를 위한 것이지 진정한 의도는 없을 것이라며 달갑지 않은 시각으로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참여로 평가되고 있다.

▲ 남미에서 생산된 페어트레이드 커피. 유기농 상품이며 가격은 10~20% 비싸다.
ⓒ 박성진
이러한 변화를 놓고 소비자의 요구가 조금씩 불공정 무역의 편중된 시장 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2004년 영국 페어트레이드 협회와 식품청이 공동 발간한 '페어트레이드 바나나 가격 보고서'는 공급에 개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페어트레이드 바나나 소비량이 늘어난 이유를 소비자의 수요증가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소비자의 힘'에 주목하며 '소비자들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