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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뜬 김씨는 <헤럴드 트리뷴>으로 뉴스를 점검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미국의 프로그램과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진 수십 개의 TV 채널을 돌리다 잠이 든다. 공영방송에 대한 국가 지원이 금지돼 국내에서 제작되는 프로그램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한 편을 보려면 이미 미국영화가 점령해 버린 극장을 뒤로 한 채 애써 시민회관을 찾아나서야 한다. 시민회관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김씨는 라디오를 틀어본다. 지금 흘러나오는 컨트리 뮤직은 미국 앨라배마에 본사를 둔 라디오로부터 수신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지분 제한이 폐지된 결과다. 모국어보다는 영어에 익숙해져 버린 관객들을 배려한 우리의 '고전영화'는 아랫면에 친절하게 영어 자막을 깔아 이해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왜 고전영화냐고? 전국의 모든 극장이 미국영화만을 상영하는 통에 더 이상 한국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문화다양성 협약'이 체결되지 않았을 때 어쩌면 우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가상현실을 그려본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 '경제와 사회의 발달 속에서 문화의 역할'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 지아니 프로피타 '이탈리아작가와출판인협회' 회장의 '악몽'을 번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문화 전문가들, "문화다양성 법으로 보장받아야"

▲ 지난 9일 열린 국제문화전문가회의 개막식에서 양기환 KCCD 집행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사진 왼쪽). 그 옆으로 카르멘 칼보 스페인 문화장관, 에두아르도 바티스타 스페인 연대회의 위원장, 알폰소 마르티넬 스페인 문화과학부 국장의 모습이 보인다.
ⓒ 박영신
"문화를 지배하는 국가야 말로 통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에두아르도 바티스타 스페인 문화연대 대표의 힘찬 선언과 함께 지난 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막된 제 4차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 총회가 사흘간의 숨 가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11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98년 캐나다 퀘벡에서 첫걸음을 뗀 CCD는 세계 90여 개국 600여 문화단체가 소속된 민간연대기구로, 문화예술을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거래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갖지 못한 소수 문화를 보존해 세계 문화다양성을 증진시키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기구이다. 제1차 총회는 2001년 캐나다 몬트리올, 제2차는 20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으며, 제3차는 2004년 6월 세계 57개국 400여 명의 문화전문가와 문화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 바 있다.

마드리드 선언 주요 골자

서울선언문의 내용에 '법적구속력'이 첨가됐다.

- 6조 : 문화 정책의 틀 내에서 각 당사국의 특정한 상황과 필요성을 고려해 각 당사국은 자국내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수단을 채택할 수 있다.
- 16조 :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우대.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의 문화적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적절한 제도적 기반을 통해 예술가들과 다른 문화 전문가들, 이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우대 조치를 취함으로써 개발도상국들과 함께 문화적 교류를 용이하게 해야 할 것이다.
- 20조 : 다른 국제 협약에서 생겨난 당사국들의 권리와 의무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
지난 사흘간의 총회는 한 마디로 전 세계 문화를 독점하다시피 한 미국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때문에 미국 대 그 외 국가의 투쟁을 선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1, 2차 유네스코 정부간 회의를 통해 작성된 '문화 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 협약) 3차 초안'을 재확인하고 여기에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첨가할 것을 촉구하는 '마드리드 선언문'을 발표했다.

총 60개국 300여 세계문화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올해의 CCD는 이로써 오는 10월 '문화다양성 협약'을 채택하는 제33차 유네스코 총회를 앞두고 그 최종안을 확정하게 될 제3차 정부간 회의(5월 31일~6월 14일)에 전 세계 문화예술인의 결집된 의사를 알리는 자리였다.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담고 있는 문화조차 일반상품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상품가치로 평가하는 지금, 일반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소수의 문화는 세계지도에서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지난 2001년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화다양성'에 법적 구속력 요구까지 가미된 '마드리드 선언문'은 지난해 발표된 서울 선언문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의 필요성과 현재 상황, 세계 문화 전문가들의 역할, 당면과제 등을 주제로 진행된 사흘간의 총회는 각 국가 별 다양한 목소리를 한데 모으는 뜻 깊은 자리였다.

▲ 양기환 KCCD 집행위원장
ⓒ 박영신
9일 정오(현지 시각) 마드리드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총회 개막 연설자 자격으로 초청된 양기환 한국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KCCD) 집행위원장은 "자주적인 문화정책이 집행될 수 없다면 결국 균형 잡힌 교류의 증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지난 해 서울에서 함께 고민하고 논의했던 결집된 의견이 이번 마드리드 총회를 통해 실천적 결실을 맺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해 박수를 유도해 냈다.

카르멘 칼보 스페인 문화장관은 올해가 돈키호테 탄생 400주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돈키호테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며 "인간 평등과 누구나 표현할 권리는 다양성을 가진 문화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개막식을 제외한 모든 세션은 마드리드 중심가에 위치한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 총회 기간 중 자국의 문화 정책을 소개하며 그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각국 연대 대표들의 목소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오는 10월, 문화다양성 협약 채택되면 세계문화예술 판도 바뀐다

▲ 파스칼 로가르 프랑스 연대회의 대표
ⓒ 박영신
"문화장관이 없는 페루 정부는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입을 연 페루 연대회의 크리스티앙 비에네르 프레스코는 위협적인 미국의 오락산업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며 "정부가 문화다양성을 옹호하고 양자간 협상을 넘어설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파스칼 로가르 프랑스 연대회의 대표는 페루의 사례에 비춰볼 때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프랑스는 '편안한' 상황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자국 영화 시장 점유율은 다른 유럽 국가의 2배에 이른다며 이것은 창작자의 우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된 작업 환경의 결과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에서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구입하는 입장권에는 자국 영화 지원비가 포함돼 있어 비록 한국과 같은 스크린쿼터제는 없으나 그에 상응하는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로가르는 이어서 "유럽의회가 유럽연합 25개국의 만장일치를 얻어내지 못하면 WTO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며 WTO 등이 자행하는 문화 훼손을 부각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1년 전만 해도 유럽에서 문화연대회의는 프랑스가 유일했으나 올해 말에는 12개 국가가 연대회의를 구성할 것으로 예상돼 유럽연대회의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로가르는 전망하기도 했다.

▲ 제랄도 모라에스 브라질 영화협회 회장
ⓒ 박영신
한편 제랄도 모라에스 브라질 영화 협회 회장은 "독재에 억눌렸던 1970~1980년대 당시 브라질에서 영화 배급은 국립배급영화협회가 맡았으나 극장의 재정 문제 등으로 사실상 국가가 배급에 관여해 브라질 영화인들은 영화 제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고 소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모라에스에 따르면 "독재 정치가 마감되고 영화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맛보는 순간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시장 개방이 착착 진행됐고 3개월 만에 브라질 영화 제작율이 0%로 곤두박질쳤다"는 것.

모라에스는 "현재 브라질 영화제작율은 1.2%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를 접할 기회는 차단돼 있다"며 "할리우드 영화 점유율이 95%를 장악한 지금 영화 표 한 장 가격이 1달러에서 4달러로 오르고 중상류층의 문화소비가 증가하면서 결국 이득을 챙기는 것은 미국뿐"이라고 꼬집었다.

실례로 1993~1994년 사이 브라질 영화시장의 90% 이상을 미국이 독점했는데 이는 미국의 MGM사가 배급을 장악한데서 비롯된 배급의 문제라는 것. 브라질 정부는 뒤늦게 대책 법안 마련에 부심했지만 미국 거대 미디어 기업의 압력은 점점 더 거세져 법안처리가 자꾸 연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막 연설에 이어 패널로 나선 양기환 집행위원장은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는 1993년부터 작동되기 시작해 10% 대에 머물렀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을 40% 대로 끌어올리고 총 관객 수 5천만 명에서 1억2천만으로 증가시켜 한국영화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양 위원장은 "그러나 한미간 최대 통상현안으로 지목된 스크린 쿼터제는 미국의 폐지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며 "오는 10월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협약이 채택되지 못한다면 우린의 문화정책은 통상협정의 희생양이 돼 폐기처분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스크린쿼터제 없는 캐나다 영화시장 할리우드가 94% 장악"
[인터뷰]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만든 이반 바르니에

▲ 이반 바르니에 학장
크라운플라자 호텔에서 캐나다의 이반 바르니에 라발 대학 법대 학장을 만났다. 바르니에는 유네스코 전문가 위원회 12인 중 1인이며 특히 유네스코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을 만든 주요인사 중 한 명이다. 그는 세계 문화부 장관회의(INCP) 62개국 법률 자문인 동시에 퀘벡 주 법률 자문이기도 하다. 바르니에와 나눈 짧은 대화를 요약 정리한다.

- 이번 회의에서 가장 쟁점이 된 내용은 뭐였나?
"제 3차 정부간 회의를 앞두고 구체적으로 논의돼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문화다양성을 말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총회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정확한 우리의 위치를 인지하고 지금 여기서 진정 논의해야할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한 다음 대책을 마련하는 것,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 과연 올 10월에 있을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 보호가 국제법으로 보장될 수 있을까?
"최소한 30개국의 동의를 얻어야 협약으로 나타날 텐데 이 협약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강제성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위반했을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는 협약 말인가?
"법적 구속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복잡한 면이 있다. 단지 감시를 의미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물론 법적 제재를 동반한 협약을 요구할 수 있지만 제재를 가한다면 어떤 종류의 제재를 가지고 어떤 단계까지 가능할까 하는 것이 문제다. 문화적 제재를 말하려면 협약을 위반했을 경우 어떤 책이나 음악을 거부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부에서는 통상 제재를 말하고 있는데 통상 제재를 가할 생각이라면 우리가 갈 곳은 단 한 군데 WTO 뿐이다. WTO는 이것을 환영하겠지만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 캐나다는 미국의 통상압력에 문을 연 뒤 적잖은 피해를 입은 국가로 알고 있다.
"캐나다에도 방송 쿼터제는 있으나 스크린 쿼터제는 없다. 그리고 캐나다산 영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나다 영화소비의 94%는 할리우드가 장악했으며 1~2%는 나머지 국가의 영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캐나다만의 특수한 상황은 결코 아니다. 한국조차도 그렇지 않나. 한국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40% 수준이라 해도 나머지는 할리우드로 채워질 것이고 기타 다른 나라 영화를 볼 기회는 극히 제한돼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서 자국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것은 스크린쿼터제의 덕이고 한국이 이 제도를 시행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당신은 법률 자문위원으로서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참석해 본 일이 있나?
"전혀 없다. 미국인들은 나를 싫어한다(웃음). 10여 년 전부터 내가 써 오고 있는 글들은 문화다양성 존중을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이 좋아할 리가 있겠나."

- 현 캐나다의 상황을 우려하지 않나?
"걱정스럽다. 캐나다에는 방송 쿼터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TV를 켜면 온통 미국 프로그램으로 장식되고 있다. 방송 쿼터를 폐지하게 될 경우 TV는 온전히 미국산 문화로 채워질 게 자명하다. 각 나라는 그들만의 역사와 현재가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문화는 자국이 보호해야 하고 보호 방편도 자국이 결정해야 하는 거다. 때문에 현재의 문화정책에서 한 발도 물러서면 안 된다."

-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 연대회의의 초청으로 한번 방문한 일이 있다. 한국에서 몇몇 문화인들을 만났고 한국이 왜 미국의 문화 개방에 조심스러운지 이해하게 됐으며 자국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잘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들 편이다." /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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