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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갑차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두 소녀 미선이와 효순이를 기리는 촛불이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독일 등지까지 들불처럼 타오르던 2002년 12월 7일. 프랑스 파리의 교민들도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전단을 만들어서 마들렌느 광장에 모여 들었다.

무전기를 든 경찰국 직원 세 명이 현장에 나타났지만 일찌감치 파리경찰국에 집회 허가를 받은 상태라 거리낄 것은 없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초 한자루씩 나눠 들고 본격적으로 집회를 시작할 무렵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파리 한국 교민 사회에서 꽤 알려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중견 인사 한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곧장 경찰국 직원들에게 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지금 불온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대다수 파리의 한국 교민은 이들에게 찬성하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저들 속에는 좌파 인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얼토당토 않은 주장에 경찰국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좌파가 나쁜가요? 나도 좌파를 찍는데요."

그 중견 인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정쩡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유학생이 태반인 서른명 남짓한 집회 참가자들 가운데에는 분명 좌파 인사가 있었다. 중견 인사가 '좌파 인사'라고 지칭한, 바로 이유진(65) 선생이다.

이유진 선생은 1979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한영길 사건'의 주인공이다. 1963년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 온 이후에도 시인 김지하와 김대중 구명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이유진 선생은 1979년 '한영길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파리무역관 부관장이던 후배 한영길이 프랑스로 정치 망명하려는 것을 도운 것이 '북괴 공작원'이자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씨가 한씨의 어린 딸을 인질로 삼아 포섭 공작을 벌였다며 '아동인질'이라는 파렴치범 혐의까지 씌웠다.

당시 언론은 이유진씨를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프랑스인 친구까지 간첩단으로 묶어 대대적인 간첩 사건으로 보도했다. 결국 이유진 선생은 조국에 오지 못하고 프랑스에 머물 수밖에 없는 정치 망명자가 되었다.

이유진 선생의 이러한 사연은 지난 2000년 MBC 스페셜 <파리, 평양, 서울- 떠도는 자의 꿈>을 통해 알려졌으며 선생은 이듬해인 2001년 6월 26년만에 한국 땅을 밟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온전히 '간첩'의 멍에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는, 비록 정치적 망명자이긴 하지만 당당한 '해외 민주 인사'인 이유진 선생을 만났다. 오는 10월 말 자신의 에세이집과 시집을 국내 출판하는 이유진 선생은 2001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을 예정이다.

조국은 어머니 젖가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외국은 역시 외국

ⓒ 이유진
- 멀리 떨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인 추석이 얼마 전이었습니다. 해외에 있는 교민들이 유독 적적함을 많이 느끼는 때가 바로 한가위 같은 명절인데요.
"추석에는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고, 또 동생들한테서 전화를 받기도 했어요. 온 집안 사람들과 산소에도 가고, 한가위 둥근 달을 보면서 한잔하고 싶지만 외국에 있으니 그런 건 꿈을 꿀 수도 없지. 3년 전 한국에 다녀 오고 못 가 봤으니까. 어머님이 금년에 여든여섯이신데….

내가 평양서 6년, 서울서 18년 살고 여기 파리서 약 41년째 살고 있는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외국은 역시 외국이야. 조국이라는 건 어머니 젖가슴이라구. 어머니 얼굴이 못생겼다고 탓하지 못하듯 아무리 제 나라가 못 살고 못 나도 탓할 수 없지. 탓하게 되지도 않고. 그게 제 나라 제 고향이지, 생각하면 항상 따뜻한 것. 그래서 내 마음이 편치 못해. 외국 생활은 오래 할 것이 못되는 것 같아."

- 지난 2000년 MBC 스페셜 <파리, 평양, 서울- 떠도는 자의 꿈>에서 선생님 사연이 방송되면서 처음으로 한국에 알려졌습니다. 2001년에는 자서전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를 출판하셨고 같은 해 6월에는 26년 만에 고국 땅을 밟으셨습니다. 그 동안 감회를 말씀하신다면.
"2001년 6월 한국 땅을 26년 만에 밟았지. 그 때도 소명절차 문제가 있어서 안심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14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는 해도 79년 한영길 사건 등 내가 평양에 다녀온 이후에 간첩 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소명절차가 필요하다고 하더구만.

한국에 들어갈 때 떨리지는 않았어. 승부를 가린다 해도 자신 있었으니까. 박정희 때처럼 무작정 고문해서 옭아매는 때는 지났으니까. 1979년에는 모든 신문이 나를 '반한인사', '친북인사', '북한공작원', '인질범'으로 매도했지. 하지만 1999년부터는 달라졌어, 시민단체도 많이 도와 줬고.

나는 북한을 위해서 일한 적이 없어. 돈 한푼 받은 적도 없고. 그랬기 때문에 승부를 가린다 해도 자신있었어. 옛날 같으면 자신있어도 안되는 게… 잠 안 재우고 고문하고 그랬고 판검사가 전부 한통속이었으니까. 당연히 승부를 가릴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었어….

26년 만의 귀국.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고 비로소 나는 '돌아왔구나!'했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서 공항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했어. 한 기자가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뭐냐고 물었어. 국가로부터 모함을 받고 하소연할 데가 없이 혼자 이십 몇 년을 견딘 것이라고 대답했지. 그리고는 아직도 고국에 돌아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해외 민주인사들의 귀국에 정부가 적극 나서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어. 이데올로기는 한때의 현상이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지.

공항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봤는데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야트막한, 아기 같이 작은 산들이 정답게 보였어. 그리고 곧 한강이 펼쳐졌는데, 세느강이 현대 도시의 강이라면 한강은 아직 원시적인 강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그 풍만한 수량과 넓고 부드러운 청색을 띤 장중한 모습 때문이었을 거야.

자유당 시절 나는 한강에서 곧잘 벌거숭이로 헤엄치고 뱃놀이를 했어. 옛날을 추억하면서 강을 바라보니 조국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반한인사로 몰렸던 아픈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더군."

동생까지 한국 들어가지 못하고 망명, 사돈의 팔촌까지 탄압

- 1979년 소위 '한영길 사건'으로 선생님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생 이화진(55) 선생도 연좌제의 족쇄에 묶여 조국의 약혼녀와 결별하고 파리에 머물러야 했지요. 지금껏 독신으로 계신 이화진 선생은 여전히 고국을 방문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생 약혼녀가 부모에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한국에 들어갔는데 결국 다시 나오지 못했어요. 들어가기 직전에 한영길 사건이 터졌거든. 중앙 정보부가 못 나오게 해서 결국 나올 수 없었지. 그냥 그렇게 끝난 거지. 동생은 파리 교외에 살고 있는데 나 때문에 여지껏 한국 여권을 받지 못한 걸로 알고 있어요. 여행의 자유는 있지만 대한민국만은 못 가.

2001년 서울에 들어가서 알게 된 일인데 사건이 터지고 나서 우리 집안 사돈이며 그 사돈의 팔촌까지 다 건드렸더군. 사돈의 팔촌까지 군복 벗고 우리 누이 보고는 이혼하라고 종용하고, 집안에 일이 많았더군. 사실 집에서 그런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통 몰랐지.

그래도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 조국은 늘 내 가슴 속에서 따스해."

▲ 1974년 9월의 이유진 선생.
ⓒ 이유진
- '한영길 사건'에 대해 한번 말해 볼까요. 최근 진실이 밝혀졌지만 선생님께서 위기에 처한 후배를 도우려다가 그 후배가 갑자기 선생님을 '간첩'이라고 하고 심지어 자신의 딸을 유괴했다고까지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간첩에 아동인질범이 됐는데요. 당시의 심경은 어떠셨나요?
"한마디로 생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대는 데 분노가 솟구쳤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 정치적 망명하겠다는 한영길씨를 프랑스 경찰에 데려간 거, 그것이 한국 정부에 불쾌감을 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간첩으로 몰아붙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 아동인질범은 더더구나 그랬고…. 유괴범이라니(웃음). 지금은 한영길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만 들었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한영길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국내용으로 써먹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 '북한공작원이 활동하고 있고 그래서 국가 보안을 해야 한다' '국가 안전이 위태롭다' 이러면서 한국 사람들을 핍박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그런 짓들을 한 거지."

"사람 잡는 국보법, 마땅히 폐지해야 하고 꼭 폐지될 것"

- 최근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냉전 시대에 국가 안보를 핑계로 인권과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선생님도 국가보안법의 직접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마디로 국가보안법은 백성의 머리와 가슴을 머저리로 만드는 악법이지. 백성들이 제대로 숨을 쉬려면 없애야 해. 나도 1981년에 고향인 평양에 다녀왔다고 해서 국가보안법 6조 2항(잠입·탈출)을 위배했다고 하는데… 자기 고향을 제 발로 다녀오는데도 그것이 '범법'이라면 참 한심한 노릇이지.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대 때 치안법을 그대로 베껴서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2월 초하루에 공포했어요. 사실 대한민국의 안보가 아니라 이승만 개인의 권력 안보를 위해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만든 거야. 공포하고 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젊은 국회의원 세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해 버렸지.

워낙 그 법이 독재자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런 무리들도 이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젊은 학생들까지도 간첩으로 몰고 빨갱이니 뭐니 하면서 옭아맸지. 말 그대로 그냥 옭아매는 거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이런 식으로. 법적인 용어들도 아주 애매모호하고 백성을 위하기 보다는 역으로 백성을 잡기 위한 법이니까 마땅히 폐지해야 하고 또 언젠가는 꼭 폐지될 거에요."

- 한영길 사건 때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억지 조작한 '한영길 사건'에 대해 <르 몽드>와 <리베라시옹>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나를 박정희 독재에 비판적인 해외 민주 인사라고 소개했지. 프랑스 언론은 그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정치 공작이라고 보았어.

당시 한국 정부는 나를 간첩으로 몰고 아동인질범이라고 했는데 난 프랑스 경찰에서 그와 관련해 조사를 받은 일이 없어요. 프랑스인 변호사가 직접 한영길씨의 아이를 프랑스인 가정에 맡기는 걸 주선했기 때문이지. 아버지인 한영길씨에게서 아이를 어디에다 맡기겠다는 걸 확인하는 서명도 받았고. 합법적인 절차를 모두 거쳤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문제될 거리가 하나도 없었어."

- 1963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서 1973년 소르본느에서 한국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주제로 박사 논문으로 쓰셨는데요. 당시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가 사람들의 일상을 옥죄고 있었는데요.
"스물넷 팔팔한 나이에 프랑스에 와 보니, 이곳은 정말 '자유천지'였지. 자꾸 한국과 대조되더군. 파리 시내 카페에 앉아 있다가 한 공산주의자가 떠드는 걸 보고는 곧장 피한 일이 있어.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불안했어. 그 다음 곰곰히 생각했어. '나도 세뇌를 많이 받았구나…' 나를 억압하는 레드 콤플렉스의 정체가 궁금해졌어. 사회심리학을 공부하고 싶기도 해서 그 공부를 하게 됐지."

"우리 나라 보수는 친일파 보수, 친일파의 족보일 뿐"

- 아직도 한국에서는 색깔론이 어느 정도 먹히고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해방되고 나서 친일파 숙청이 안되서 생겨난 문제야. 프랑스에서는 최소한 꼴라보(한국의 친일파에 해당하는 친독 협력자) 1만명에게 사형 혹은 20년형을 내렸데요. 십만명을 처벌했다는 설도 있고. 좌익, 우익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축출해 버린 거야.

'로베르 브라지야크'라는 재능있는 작가가 있었지. 그 친구가 노골적으로 꼴라보를 해서 결국은 사형을 선고 받았어. 문학 재능이 비범해 사르트르, 까뮈, 프랑수아 모리악 같은 작가들이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드 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래도 드 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민족 정기'를 위해 살려둘 수 없다면서 사형 시켰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못하는 거야.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네 명도 그렇게 됐지.

한국에서는 한국을 배신했던 사람들이 진정으로 애국한 사람들을 처단했어. 말이 안되는 얘기지. 우리 나라는 그걸 못해서 아직도 문제가 많은 거야. 그런데 아직도 친일파의 입김에 놀아 나는 우매한 일부 유권자들이 있어."

- 요즘 한국 정치는 '보수 대 진보'의 구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보수'와 '수구꼴통'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잘 아는 사람들, 옛 질서와 과거의 지혜(아름다운 전통과 풍속)에 집착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교조주의자들, 항상 조심하는 사람들….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의 능력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

'수구꼴통'들은 제 한몸만 아는 출세주의자들, 의리가 없는 자들, 제 핏줄을 슬프게 하고 외세를 기쁘게 하는 자들이지. 예컨대 친일파들이나 한일합방은 국제법상 합법적이었다고 하는 자들….

프랑스는 드 골 대통령이 공산당을 포함한 좌우합작을 성공시켜 꼴라보들을 가차없이 숙청했지. 그리고 프랑스의 우익 피네 전 수상, 좌익 망데스 프랑스 전 수상은 다 깨끗하고 성실한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있어요.

드 골 수상은 돈밖에 모르는 부르주아를 경멸한 고결한 정치가면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애국자였지. 개인적으로는 공산주의자를 싫어했지만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 초대 내각에 공산당 간부를 세사람 입각 시켰어.

한국에서는 반대로 친일파와 손을 잡고 공산주의자를 몰아냈지. 우익 김규식과 김구 등은 훌륭한 보수주의자, 여운형은 훌륭한 사회주의자였지만….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좌우가 나라를 가르지 않고 사상의 자유도 보장됐지만 한국에서는 남북이 갈라서고 북이나 남이나 사상의 자유가 없지.

진짜 '보수주의자'는 없어지고 가장 추악한 자들이 한국의 보수를 대표한다고 하고 있는 거지. 한국의 보수는 실제로는 '친일파' 보수야.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보수가 아니라 친일파의 족보지."

해외민주인사, 남의 나라 외진 무덤에 조만간 묻힐 '노인'들

-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귀국하기 한달 전쯤 그러니까 지난해 광복절 무렵, 선생님께서는 해외 민주 인사에 무심한 조국에 분통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조국을 찾은 송두율 교수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까뮈가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시비 건 적도 없고, 사르트르가 모스크바를 지지하고 혁명을 고취했다고 잡혀간 적도 없었어. 국가보안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지.

내 생각에는 송두율 교수가 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또 지원비를 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 그래야 평양에도 정색을 할 수 있고 서울에 들어가서도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룰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남북 대결이 빚어낸 양쪽의 치사한 현실을 그가 소홀히 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야. 아무튼 송두율 교수도 겨레 사랑 때문에 그간 많이 방황한 것 같아.

지난 해 7월 참여정부가 해외 민주 인사들에게 '입국 불허'조치를 취했는데 그 이유가 "우리 나라의 사회 질서를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더군. 정말일까? "법률은 거미줄과 같다. 약자는 걸려서 꼼짝 못하지만 강자는 빠져 나간다"고 하지.

해외 민주 인사들은 늙었어. 오랜 유랑 속에서 늙어 가는 노인들이지. 이대로 가다가는 이응노, 윤이상 선생처럼 남의 나라 외진 무덤에 조만간 묻힐 노인들이야. 그네들의 노쇠한 모습과 절절한 향수병에 나는 숨이 막혀요.

공자도 "나는 늙은이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제 나라 제 겨레 사랑에 고귀한 청춘을 몽땅 바친 해외 민주 인사들에게 '입국 불허'라니. 그들이, 그 선량한 노인들이 "우리 나라의 사회 질서를 해할 염려가 있다"면 벌써 몇 년 전부터 서울을 버젓이 다녀가는 북한의 노동당 간부들이며 인민군 장성들은 뭔가? 왜 아직도 정부는 시비곡직을 만두 속 같이 얼버무리려고 할까. 듣는 사람이 입을 벌리고 웃을 노릇이지. 노무현 대통령의 새로운 결단과 참여 정부의 긍정적인 해결책에 희망을 걸어볼 밖에…."

'북한공작원'으로 몰린 장본인 고백, 모두 피한 자리에 신경림 시인만 초연

- 오는 10월 선생님의 저서 두 권이 동시에 한국에 소개됩니다. 자전 에세이 <떠도는 자의 꿈>(가제·필맥출판사)과 시집 <소같이 웃으면서>(따뜻한손출판사)인데요. 책에 대한 소개를 잠깐 부탁드립니다.
"두 책 모두 30대 친구들이 적극 주선해 출판하게 됐지. 필맥출판사 사장이 읽어 보고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니지만 서가에 꽂아 놓고 싶은 책이라고 해서 출판하게 된 거지.

<떠도는 자의 꿈- 파리 망명객 이유진의 자전 에세이>라는 책은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를 조금 손질해 내는 거야.

1977년에 <인간행(人間行)>이라는 시집을 당시 서울대에 불문학 교수로 있던 친구가 주선해서 낸 적이 있어. 보잘 것 없는 시집이긴 했는데 시집 <소같이 웃으면서>는 거기서 한 1/5을 빼고 그 후에 쓴 시, 그러니까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쓴 시를 모아서 내는 거야. 두 책의 공통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부귀공명 같은 인생의 껍데기보다는 알맹이를 살자는 것이겠지."

- 시인 신경림 선생이 <나는 봄꽃과...>의 발문을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는 10월에 출판할 시집에도 해설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과 각별한 인연이 있으신지요.
"신경림 선생은 1995년 파리에서 있었던 한국문학포럼에서 만났지. 첫 인상이 대인(大人) 같아 보여 호감이 갔지. 그때 파리에서 살던 친구 하나가 포럼에 참석한 문인들에게 술을 한잔 사겠다고 해서 그 일을 성사시키러 내가 갔어.

그 때까지도 난 간첩이었으니까 나중에 시인이나 작가들한테 원망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사람들에게 1979년에 내가 북한공작원으로 몰렸다고 말했더니 다들 피하는데 유독 신경림 선생은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시더군. 신경림 선생은 키가 작고 몸집도 작으신데 그 때 '아, 대인이구나'했지.

그 전에 <농무> 같은 시는 참 좋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직접 선생의 행동거지를 보니 '큰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더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 3년 선배의 친구분이어서 더 친해졌지. 서울에 갔을 때 새벽 4시에 선생의 단골 돈암동 술집에서 단둘이 술 먹던 기억이 나는군."

시민권은 '최상의 체류증', 자신이 프랑스인이라 여겨본 일 없어

- 선생님은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패기와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흔히 한 사회의 '원로'라고 하면 '권위의식'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선생님은 그것과 무척 거리가 멉니다. 주위를 의식해서 점잖은 말을 쓰거나 폼 잡기를 전혀 안하시는 '프리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선생님 주변에는 30~40대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내가 철이 없어서(웃음)…. 사회가 발전하려면 기성 권위에 도전해야 하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격려해줘야 해요. 난 20대부터 나이, 학벌, 재산 따위로 윗사람이 되려는 사람을 보면 불쾌감을 느끼곤 했어. 권위의식은 모자라는 늙은이들이 써 먹는 좋지 않은 버릇이 아닐까?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도 "많이 배운 사람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했지. 옳은 말 같아.

주변을 의식한 점잖은 말, 폼 잡기가 오히려 사람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지 않을까? 나도 장남에 장손이어서 한때, 특히 서울에서 정중한 말만 썼지. 하지만 노인이 되어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보니 그 예의 바른 언행이 젊은이들에게 압박감을 주는 것 같더군."

- 금년 초 프랑스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제가 투표하실 거냐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비록 국적은 프랑스지만 지금껏 단 한번도 내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여겨본 일이 없다"면서 "프랑스 투표는 프랑스 놈들이나 하라 그래"하고 답변하셨어요(웃음).
"난 여기서 투표 안해요. 프랑스 시민권을 따는 게 내 본 뜻은 아니었어. 프랑스 시민이 되고 싶어 얻은 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행패에 대한 정당 방위로 얻은 국적이어서 지금도 시민권을 '가장 좋은 체류증'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프랑스 시민권은 1973년에 받았어. 1967년 동백림 사건 때 이응노 선생과 가까운 친구 한두 사람이 잡혀 갔어요. 그래서 대사관에 가서 항의를 했는데 그때 눈 밖에 났던 모양이야. 내가 박정희 정권을 자주 비판하니까 어떤 친구가 몸을 보호하는 '부적'으로 시민권을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해서 받았지."

"지금은 미국 생활 양식을 모방하는 외향성 자본주의 시대"

- 선생님의 '잔돈' 철학이 참 재미있습니다.
"돈의 부정적인 면이 싫어서야. 수백억이라도 그게 다 잔돈이라고 보는 거지. 잔돈을 뒤좇아다니면 인생에서 여유가 안 생겨. 돈이라는 게 사람을 부려 먹어도 혹독하게 부려 먹거든. 돈한테 한번 반했다하면 여자한테 반하는 것보다 몇 백배 고달픈 거야. 도연명이 '마음이 몸의 종노릇을 한다'고 했어. 이걸 요즘 말로 바꾸면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거지. 몸이 마음을 따라가야지 마음이 몸을 따라가면 성급해지지.

지금은 서양, 특히 미국의 생활 양식을 모방하는 외향성 자본주의 시대야. 삶은 각자의 지취(志趣)에 따라 다양하게 살아야 하는데, 요즘처럼 무턱대고 바쁜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삶이 자꾸 망가지고 자기 발견의 감동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지. 마음이 한가로워야 몸도 편안한 법인데….

중국의 고사(高士) 상장(尙長)은 <주역>을 읽다가 손익괘(損益卦)에 이르러서 "부귀가 빈천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 자본주의 사회의 배타성과 몰염치를 물경 2000년이나 앞서 간파한 것이지. 안과 의사인 딸애한테도 가난한 환자에게는 돈을 적게 받고 부자에게는 제대로 돈을 다 받으라고 했어. 그리고 남이 세끼 먹을 때 두끼만 먹고 그 대신 자유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했지. 아무튼 돈은 생활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야."

-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상황에 처해도 기죽지 말라. 아무리 험악한 강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기죽으면 손해지(웃음). 청춘답지 못한 거야. '전쟁은 용기다.' 중국의 옛 현인들이 한 말이야. 잔돈을 좇아 다니지 않는 것도 기죽지 않는 거야. 쓸 만큼만 벌면 되지. 외국어도 마찬가지라구. 외국어야 자기가 쓸 만큼만 배우면 되지, 그 나라 사람들만큼 할 필요가 뭐 있나?

그리고 자기 시간을 많이 갖고 여행을 많이 해. 사상, 감정의 여행도 많이 하고. 고전을 많이 읽고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그 동네 구경하는 것도 여행이니까…. 무한한지 유한한지 알 수 없는 이 우주에 우리의 존재를 견주어도 보고 늘 큰 마음으로 살되 겸손할 것. 마지막으로 인류 역사 특히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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