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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 강간치사 등의 죄목(혐의)을 가진 범죄(피의)자의 인권은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나.

‘희대의 살인마’로 불리는 연쇄살인 피의자 유영철씨에 대해 유씨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없이 보도한 언론을 두고, 네티즌들이 한 때 ‘피의자 인권’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 지난 6일에는 유씨가 “구치소내 독방에서 24시간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하고 운동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아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면서 ‘범죄(피의)자 인권문제’가 다시 등장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뉴질랜드 전역도 한 강간치사범의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뉴질랜드 인권심의심판소(Human Rights Review Tribunal)가 최근 ‘흉악범’의 인권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는 판결을 내놓은 것.

8월 23일자 <뉴질랜드 헤럴드>는 한 강간살인범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겨있는 편지의 사본을 건네주지 않은 교도소 측을 상대로 낸 진정 사건에 대하여, 그에게 정신적 고통과 명예 훼손 및 모욕에 대한 배상금으로 1200뉴질랜드달러(약 90만원)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한 인권심의심판소의 판결 내용을 보도했다.

뉴질랜드 인권심의심판소 “‘흉악범’의 인권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

이 보도가 나간 후 뉴질랜드 시민들과 야당 국회의원들은 물론이고 법률 집행의 최고책임자인 법무부장관까지도 인권심의심판소의 판결에 대해 반발하고 나서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범죄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한 결정은 이미 관 속에 들어간 처지가 된 이 시대의 상식과 정의가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도록 또 하나의 못을 박는 것이다.”

26일자 <뉴질랜드 헤럴드>의 독자투고란에 실린 한 시민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 판결에 대한 뉴질랜드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야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과 행동당(Act Party)도 일제히 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번 판결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인권심의심판소의 이번 결정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이번 결정은 노동당 정부의 정도를 넘어선 정치적 불편부당함(Political Correctness)이 우리의 사법 시스템을 망쳐놓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국민당의 법과 질서 담당 대변인 토니 리알 의원)

“만약 정의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인권심의심판소는 뉴질랜드 국민 개개인에게 1200달러씩을 지금 빚지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인권심의심판소는 (이번 판결을 내림으로써) 모든 뉴질랜드 국민이 이를 갈면서 분노하고 좌절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과 모욕감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행동당의 사법 담당 대변인 스티븐 프랭크 의원)


이처럼 국민들과 야당의 원색적인 비난 여론이 현 노동당 정부로 향하는 조짐을 보이자, 필 고프 법무부장관은 앞으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 범죄자가 받게 되는 배상금을 범죄자에게 주는 대신에 그 범죄자의 피해자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밝히는 등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아울러 인권심의심판소의 이번 판결에 대하여 교정부(Corrections Department) 차원에서의 항소도 검토 중이라고 그는 밝혔다.

“범죄자에게 배상금을? 인권심의심판소는 제정신이 아니다”

이처럼 정부에서조차 이번 판결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문제의 그 강간살인범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너무나 잔혹했기 때문이다.

언론보도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1988년,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제인 멕렐란(17)이 개천에 처박힌 상태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멕렐란의 두개골은 부서진 상태였으며 얼굴은 칼로 여기저기 베어지고 유두 한쪽은 물어뜯겨 있었다. 또 멕렐란의 입에는 돌멩이가 가득했으며, 두개골을 가격하는데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콘크리트가 그녀의 뒷머리에 얹혀 있었다.

앤드류 로널드 맥밀란(현재 38)은 멕렐란을 강간 살해한 후 근처 숲에 은신해 있다가 붙잡혔고, 강간치사로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맥밀란은 복역기간의 3분의 2가 지나면 가석방의 기회가 주어지는 뉴질랜드 사법제도에 따라 지난 99년 말 가석방됐고,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사회복귀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러나 맥밀란은 이듬해인 2000년 5월 다시 교도소에 재수감됐다. 당시 그는 16살의 한 소녀와 매주 금요일마다 성관계를 맺었는데, 이것이 가석방 조건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수감 결정으로 맥밀란은 잔여 형기를 마칠 때까지 복역하게 됐다.

그리고 한 달 후인 2000년 6월, 그 소녀의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맥밀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 소녀의 아버지는 “맥밀란이 딸을 꾀어서 칼로 피부와 목에 상처를 내는 극단적인 사디즘 및 마조히즘, 동물적인 성교 등 변태적이고 도착적인 성행위를 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편지에 담긴 충격적인 내용은 간수들과 수감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로 인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된 맥밀란은 교도소장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도소장은 편지내용의 핵심인 윗 부분은 생략한 채 나머지만 읽어주는 것으로 대신한 채 맥밀란의 사본요청은 거절했다. 편지의 내용을 맥밀란이 알게 될 경우, 맥밀란이 출소 후 그 소녀와 소녀 아버지의 신변을 위협할 것이 염려됐다는 게 교도소장의 이유다.

뉴질랜드 ‘사생활 보호법’에 따르면, 교정부는 수감자들이 자신들에 관한 정보에 대해서 알고자 할 경우 이에 대한 접근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단, 그 정보가 수감자와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경우라면 예외가 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생활보호법 “수감자들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알고자 할 경우 접근권 보장해야”

맥밀란은 위법 조항에 근거하여, 그 편지의 완전한 사본을 얻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진정서를 냈고 마침내 작년 4월에 상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편지의 사본을 갖게 됐다.

그는 편지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을 간수들과 자신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정신과 부서, 심지어는 교도소내의 다른 수감자들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본인은 그 내용을 모른 채 지난 3년 동안 복역한 것에 대해서 분개하며,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명예훼손 및 모욕을 당했다면서 인권심의심판소에 진정서를 냈다.

이에 대해 인권심의심판소가 “수감자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편지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편지에 대한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그 수감자의 감정에 어느 정도 상처를 주었을 것으로 인정된다”고 판시하면서 “교정부는 맥밀란에게 1200달러를 지불하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인권심의심판소의 이러한 판결은 현재 뉴질랜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뉴질랜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맥밀란의 엽기적 범죄행각에 대한 증오만 얘기될 뿐이다. 범죄행위와 범죄인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기보다는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 위해 설립된 압력단체인 ‘분별 있는 선고 재단(Sensible Sentencing Trust)’은 사법적인 검토 작업을 통해 이번 판결에 맞서 싸우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을 정도다.

인권심의심판소는 국민들의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서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거부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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