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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나무 타는 소리만이 바람에 섞여 흩어진다. 흙이 구워진다. 나무가 타들어 가는 불 속에서 흙이 비릿한 내음을 뱉어낸다. 나무가 불을 만나고 그 불이 흙을 만나니 빚어내는 것이 어디 향뿐일까.

도자기가 구워진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섭리 아래 도자기가 구워진다. 어떤 ‘색’ 과 ‘멋’을 가지고 태어날지 도자기를 굽는 가마도 모른다. 그가 이천에 둥지를 튼 지 정확히 29년 8개월. 그토록 수많은 밤을 가마 앞에서 지샜건만, 그는 오늘도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것 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도예가이다.

1960년대 전국의 도예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현재는 2000여명의 도예가들이 사는 ‘도자기 밸리’ 이천 수광리 도예촌. 그 곳에 열네 번째로 자리 잡은 항산도예(恒山陶藝)의 임항택(林恒澤·58)씨는 ‘재래식 가마’ 를 고집하는 장인이다.

70년대 무렵 기계식 가마가 보급되면서 이천을 포함한 전국 도예촌에선 재래식 가마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현재는 전국을 통틀어 재래식 가마를 사용하는 곳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며 시대 속도와 맞물려 그 흔적 또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 김진석
“재래식 가마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의 깊이와 질감은 기계식 가마가 도무지 따라 올 수 없어요. 글쎄요, 앞으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재래식 가마를 대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돈과 명예와 상관없이 우리 세대가 짊어지고 당연히 해야 할 내일이라 생각해요.”

임씨는 국내를 비롯 국외에서도 ‘백자기’ 의 대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 배경엔 재래종 소나무 장작만을 쓰는 계단 연실식 등요(전래된 재래식 가마)에서 비롯된 장인의 고집과 자존심이 자리한다. 앞 칸과 뒤 칸 가마의 불꽃을 뚫어져라 살피며 그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도자기와 자신의 관계다.

가마에 불을 때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에 앞서 준비하는 20여일의 기간도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임씨에게 물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결실을 얻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라고.

자연이 만들어 주는 것을 믿고 기다릴 것, 결과가 눈앞에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보채지 말 것, 결과에 겸손할 것. 비록 결실의 형태는 달라도 ‘흙’에 울고 웃는 도예가의 마음은 농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김진석
도자기를 달구는 검붉은 불이 1300도에 이르면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7개의 칸으로 이어진 재래식 가마가 도자기를 굽는 시간은 대략 24시간. 그 가운데 제대로 된 예술품으로 빚어질 확률은 불과 20%다.

“나머지 80%는 깨서 다 버리죠. 잘 모르는 이들은 우리가 장난친다고도 하는데, 정말 작가가 되려면 깨는 것부터 제대로 배워야 해요. 그 물건이 요강이나 혹 다른 용도로 값어치 없이 천박하게 쓰일 바에야 차라리 깨부숴서 없애는 게 나아요.

처음엔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자신의 위안과 편리를 위에 완성도 없는 작품을 남겨둔다면 결국 스스로의 값어치를 떨어뜨리고 말죠. 계속 작가로 발전하기 위해선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는 ‘엄격함’ 을 갖춰야 해요.”

임씨의 백자기가 유난히 빛을 발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다운 자기를 만들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자평한다. 지난 세월도 부족한지 임씨는 연구하면 할수록 더 어렵고 모르는 게 많아진다며 ‘색’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만들어내고 싶다고 다짐한다.

20여 일간의 결실이 가마 속에서 어떻게 빚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제 그의 손을 떠난 작품은 재래식 가마와 관람자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임씨가 만든 작품 속에는 ‘자기다운 자기를 만들겠다는 노력’ 만이 들어있을뿐, 그 왜 다른 세계관은 전적으로 보는 이의 몫이라는 게 그의 작품관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다 작가이다. 단, ‘열심히’, ‘성실히’,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진짜 작가는 흔치않다. 임씨가 귀띔한 진짜 작가의 가장 쉽고도(?) 어려운 마음가짐이다.

ⓒ 김진석
“요즘 젊은이들은 돈, 시간, 노력 등에 따른 함수관계의 계산이 지독하리만큼 빨라요. 긴 시간과 인내를 통해 무언가 결실을 맺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아예 시도조차도 꺼리죠.

어린 시절 교육 과정부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그런 것을 요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내 밑에서 3~4년씩 밤새워 잔소리 들어가며 배울 학생이 어디 있나요? 아마 3-4일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걸요.”

재래식 가마가 사라져가는 뼈아픈 시대적 배경이 드러났다. 도예가가 잠자는 사이 자동으로 온도를 맞춰가며 도자기를 구워내는 기계식 가마의 편리성에는 그것을 요하는 시대가 있었다.

‘느림’ 과 ‘인내’ 를 허락하지 않는 현대. 임씨는 참을성 없는 현대에 유감이 많았다. 때문에 그는 동료를 뽑을 때에도 ‘어느 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나’를 가장 중요한 이력의 내용으로 꼽는다.

ⓒ 김진석
“과거에 비해 요즘은 정말 너무 ‘밀도’ 없이 공부를 해요. 피카소만 해도 과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임과 동시에 만능 예술가였죠. 작품은 작가가 지닌 두께 만큼만 나타나는데, 요즘 같은 시대엔 피카소 같은 사람이 만들어지긴 힘들죠.”

문득 임씨가 물었다. 현대의 속도는 과연 누구의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사람을 이끄는 기계의 엔진인지 아니면 기계를 만든 사람인지. 십 년 후 ‘현대’는 어떤 모습이냐고.

“세상 변하는 속도를 보면 ‘기하급수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 같아요. 대강당 만한 컴퓨터가 생긴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모두들 손바닥만한 컴퓨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죠. 현재 속도에 점점 가속도가 더해진다면 십 년 후가 어찌될 지 무서울 정도예요.”

누구를 위한 또 무엇을 위한 속도일까. 그는 빠른 시대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요즘 젊은이가 또 그런 젊은이가 이끄는 시대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생의 대 선배로서 임씨가 젊은이에게 고한다. 속도와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얇은 귀를 가지지 말라고.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길이 보일 것이라는 덕담과 함께.

ⓒ 김진석
재래식 가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임씨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가 재래식 가마로 도자기를 구워내는 속도가 결코 시대에 역행하지 않는 것임을. 국내는 물론 국외의 일본에서도 그의 재래식 가마를 보기 위해 끝없이 이어진 행렬을 보며 임씨는 확신했다.

점점 시대가 빨리 달릴수록 정작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따로 있다고. 타의와 자의에 의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속도가 더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그것을 애타게 찾고 싶어 할 것이라고.

은근한 불의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자만의 혜안일까. 임씨는 재래식 가마를 이 시대의 ‘사라져 가는 것’에서 꼭 ‘살아있어야 할’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결코 ‘미래’ 가 아닐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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