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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강도 짓을 했다. 이 자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가. 형사적 책임이다. 누군가 이 광경을 목격하였으나 겁을 먹고는 그냥 지나갔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가? 도덕적 책임이다. 그날 밤 우리는 강도 뉴스를 접한다. 그때 어떤 책임이 발생하는가? 형이상학적 책임이다.

반민특위 옛 터 제헌국회가 구성한 반민특위가 들어있던 현 국민은행 명동본점 자리에 이곳이 반민특위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원래 이곳은 상공부 특허국이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청사로 사용하다가 다시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국민은행이 이 건물을 인수해 사용해 왔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 세가지 책임이 뒤섞여서는 곤란하다. 목격자가 필요 이상의 죄의식을 갖는 것도 염려스럽고 범죄의 겉모습에 호들갑만 떨어서도 곤란하다. '달의 이면'을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범죄자에게 '형사적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그가 밤을 지새며 죄를 뉘우치고(도덕적 책임) 인간이 왜 남의 돈을 강탈하는가(형이상학적 책임) 하며 고민했다 하더라도 법적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곤란하다. '도덕적 자책'은 자기 방어의 면피용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공동체의 책임에 있어 가라타니 고진은 '형사적 책임'을 강조한다.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인 고진은 <윤리 21>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일본은 2차 대전과 식민 통치에 대하여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사과를 하지 않는가?" 최고 책임자 일왕이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 사상가는 말한다. 일왕 히로히토는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지 않았다.

고진에 따르면, 패전에 임박한 일본은 승전국에 의하여 일왕의 퇴위 및 처형까지 예고되는 상황을 염려하여 미국과 협상에 나섰고 '항복에 대한 조건으로 전쟁 책임자인 천황의 지위를 수호'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3차대전의 전운까지 예고되는 동아시아에서 확실한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일왕을 전범자에서 제외시켰다. 최고 책임자가 면책된 채 도쿄 전범 재판이 열린 것이다.

그리하여 '형사적 책임'이 삭제된 채 도덕적 상처만 남은 것이다. 이 도덕적 상처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다만 게임에서 진 패전국'의 상처라는 자위수단으로 오용된다. 고진은 퇴위하거나 처형받았을 지도 모를 일왕이 권좌에 그대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전쟁 책임이 유야무야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강조한다.

미국과 일본은 일왕 히로히토를 기록에서 삭제했다. 다만 기억의 회로에 집어넣어 세월의 먼지에 의탁했다. 잇따른 망언, 교과서 왜곡, 신사 참배 따위는 어떤 점에서 그들의 '똥 배짱'이 아니라 '죄의식 부재'를 증명한다. '천황이 천수를 누리셨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단 말인가. 아쉽게도 게임에서 졌을 뿐.'

여기서 기억의 문제가 발생한다. 형사적 책임이 상실된 상태, 곧 법적인 기록이 없는 책임은 기억의 보호막 속에서 잊혀진다. 학창시절 급우들을 괴롭혔던 친구가 동창회에 나와 '어렸을 때의 짖꿎은 장난'처럼 그때를 회고할 때 얼마나 난처한가. 공동체의 역사에서도 늘 반복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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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기억은 잊혀지고 왜곡된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기억은 각색의 덫에 걸린다. 말갛게 잊거나 아니면 새빨갛게 왜곡되고 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기록은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기록은 오해의 소지를 없애준다. 기록은 선의의 피해자를 가려낸다. 기록은 기억의 자기보호 작동을 차단한다. 기록은 각색과 수정을 통제한다.

친일파 인명 사전에 대한 국민적 열기는 바로 이 맥락의 소산이다. 금년 8.15까지 5억을 목표로 하였으나 불과 열흘만에 5억이 모금되었다. 자축할 만한 열정이나 동시에 만시지탄의 서글픔도 없지 않다. 응당 정부가 해야할 일을 시민들의 합창으로 일궈냈다는 점에서 경이로움과 배신감이 교차한다.

친일파. 그 기록은 산만히 흩어져 있고 다만 세월의 뿌연 먼지 속으로 정체 모를 기억만이 떠돈다. 그 기억은 변명과 합리화, 왜곡과 핑계로 유령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호의호식하고 권력을 누리고 떵떵거리며 이 한반도의 상층부에서 엄연히 살아있다.

그들은 기억을 왜곡하였다. 그들이 건국하였고, 그들이 나라 경제를 일으켰고, 그들이 민주주의까지 '허락'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독립운동까지 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미지 조작을 일상화하였다. 독립운동한 사람 중에는 '빨갱이'도 수두룩하다는 식이다. 반골이고 불평분자라는 식이다. 그리하여 친일파의 2세는 아버지를 '경제발전의 주역'이라고 '실제로' 생각하고, 독립운동가의 후예는 '빨갱이' 소리를 염려하여 그 사실조차 숨긴 채 반지하 셋방을 전전한 바도 없지 않다.

이 어이없는 역사의 뒤틀림은 '거대 역사'의 왜곡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도 뿌리깊은 악영향을 미쳤다.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서 주인공 이인국은 말한다. "사태를 판별하고 임기응변의 선수를 쓸 줄 알아야지." 바로 그렇게 살아남은 친일파들의 화려한 나날들은 한반도의 인류에게 아주 몹쓸 생존 전략을 가르쳐 준 것이다. 요령껏 머리 잘 굴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권력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는 저 수많은 '꺼삐딴 리'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궁하면 통하는 법 임기응변에 쿵짜자, 줄을 잘 타고 선을 잘 대고 샤바샤바에 쿵짜자'의 혐오스럽고 천박한 생존 전략을 지난 60년 동안 가르쳐왔던 것이다.

누군가는 걱정한다. 자칫 오해를 낳고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해야 한다. 준엄한 역사인식과 정확한 사실관계에 바탕을 둔 실사구시의 기록만이 오해의 피해자를 구제해준다.

누군가는 묻는다. 과거사를 들추어 논란이 생기고 민심이 갈라지는 것이 염려스럽지 않냐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해야 한다. 남미 문학의 거장 아리엘 도르프만 원작의 영화 <죽음과 소녀>는 이 점에서 교과서다. 바닷가 외딴집의 파올리나. 학생운동 지도자인 제라르도 대신 붙잡혀 숱한 고문을 당한 상처입은 여자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남편 제라르도는 과거 악행을 조사하는 인권위원회 대표가 되지만 파올리나는 15년 전 악몽 때문에 신경쇠약의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는 밤, 고장난 자동차 때문에 한 사나이가 집에 들어선다. 바로 끔찍했던 기억의 고문자. 파올리나의 피는 거꾸로 솟는다.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틀며 고문을 자행하던 사내를 파올리나는 총으로 위협하여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고문자는 변명하고 왜곡하고 심지어 미화한다.

그런데! 남편이 인권과 법을 이유로 말린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냐고, 지난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파올리나는 용서하지 못한다. 결국 고문자는 잘못을 인정한다. 속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기억 속에 묻어둔 끔찍한 범죄에 대하여 명백한 말로써 유죄를 인정한다. 그제서야 파올리나는 고문자를 풀어준다. 죄를 인정할 것, 진심으로 사과할 것. 미란다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 백보는 어렵더라도 오십보는 양보할 수 있다. 역사적 부관참시와 실질적 재산환수는 다른 문제다. 어떤 점에서는 불가피한 이유로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차원의 역사적, 법적, 윤리적 성찰이 섬세하게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기록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100년, 200년 후에도 '국사' 과목이 남아 있다면 그때의 후손들이 누구 누구가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게 아닌가. 기록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기억이 기록을 지배했다. 기억이 기록을 왜곡하고 '왜곡된 기록'이 엄밀한 사실의 '기록'조차 방해해왔다.

물론 유의할 점은 있다. 5억의 성금은 소중하다. 50억, 100억으로 번져나갈 역사의 불길이다. 그런데 이 살아 숨쉬는 '시민 성금'의 5억은 국회가 의결하고 정부가 집행했어야할 '5억'과는 성격이 다르다.

정말 냉정한 차원에서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집행하는 5억 또한 중요하다. 과거사를 올바로 기록하기 위하여 '국회가 의결하고 정부가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에서 매우 소중하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국내외적 지위와 자존으로 집행하는 것이며 일종의 '형사적 책임'의 효과까지 갖는다. 이제 그것을 쟁취해야 한다. 합법적 의회 투쟁이 '5억 모금' 이후의 새 과제다.

어쨌거나 이제 고딕체로 기록해야 한다. 5억의 성금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연필을 꽉 쥐고 또박또박 힘주어 획을 긋듯이, 온 몸으로 그 이름들을 하나 하나씩 밀고 나가듯이, 이제 그 뒤틀린 역사를 또박또박 기록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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