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즈음 성당에 나가 내가 가입한 단체 회합에 참석하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회합 때에 단장님이 중간에 훈화를 늘 담당했었는데 수녀님들이 몇 달 전에 오시고 나서부터 그들이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들어오셔서 성서 구절을 비롯하여 삶의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데 얼마나 좋은지 단원들 모두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단장님의 기도로 회합을 시작했는데 한 수녀님이 성서와 다른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대부분 40대인 우리들은 마치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초등학생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녀님은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오늘은 가을 사랑에 대해 말하겠어요.”하고 입을 떼었습니다. 난 ‘가을 사랑’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녀님의 연애(?) 이야기인 줄 알고 조금 호기심어린 눈으로 수녀님의 입을 쳐다봤습니다.

“‘가을 사랑’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네요. 제 얘기가 아니고 15년 전에 서울의 한 성당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어느 할머니에게 들은 실제 이야기입니다.”

난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수녀님이 설마 옛 사랑 이야기를 해주실까?’라고 생각하며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가을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표현을 수녀님이 썼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들었습니다.

“나이가 70이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부애가 좋기로 소문났는데 그만 안타깝게도 아내가 중풍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거동을 하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살림을 도맡아 하며 지극정성으로 잘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때입니다. 남편이 차려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내가 남편을 보고 낙엽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 단풍이 곱게 물든 산 경치와 덕수궁 돌담길 옆에 낙엽이 뒹구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문득 낙엽이 그리워졌던 것입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낙엽이 보고 싶다고? 그래 당신 집에만 있은 지 벌써 5년 째 되었는데 그동안 통 밖에 나가지를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군.”하고 말했습니다. 휠체어를 탈 수가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밖에 바람 쐬러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풍이 워낙 심해서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점심을 들고 남편은 대소변을 비롯한 아내의 뒷바라지를 대충 끝냈습니다. 물을 아내에게 조금 먹이며 밖에 나갔다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나가는 남편이 가방을 메고 있어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남편이 즐거운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습니다. 안방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밖의 공기를 쐬고 왔다며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고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뭐냐고 물어봤지만 남편은 나중에 보여줄 거라고 하며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거실로 나갔습니다. 곧 저녁이 되어 정성껏 준비한 밥을 차려 아내와 함께 먹었습니다. 한 수저씩 먹여야 하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었지만 남편은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아내의 입에 밥과 반찬을 넣어주었습니다.

설거지가 다 끝난 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아내의 요를 끌어 거실로 가져갔습니다. 왜 그러냐는 아내의 물음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환한 미소만 머금은 남편은 이제 곧 알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아까보다 더 궁금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요를 창가로 끌고 갔습니다. 거실 큰 창문은 하얀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자, 여보 이거야. 바로 이거야. 이것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가린 흰 커튼을 양 옆으로 걷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내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습니다. 베란다 바닥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낙엽들이 널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아내의 깊게 주름진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오늘 가까운 공원에 가서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주은 거야. 너무 지저분한 것은 줍지 않고 싱싱한 것으로 주워 가방에 담아왔어. 당신이 지난번에 낙엽을 보고 싶다고 나에게 말했잖아. 어때, 당신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지?”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안아주는 남편을 쳐다보며 한없는 행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베란다에 널려있는 낙엽을 오랫동안 바라봤습니다. 수백 개의 낙엽들도 그런 노부부를 따뜻한 눈으로 오래오래 지켜보았습니다.”

수녀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난 마치 내가 그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가 된 것처럼 억누를 수 없는 감동에 휩싸여 정신이 멍해 옴을 느꼈습니다. 수녀님은 우리들의 반응을 살펴보며 한 마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전 그 할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생각했어요. 특히 공원에 가서 낙엽을 하나하나 주울 때의 심정을 헤아려 봤어요. 거의 50년 동안 아내와 함께 살면서 일어났던 즐겁고 기뻤던 일, 그리고 슬프고 가슴 아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거예요. 그리고 젊었을 때 가을에 아내와 연애하면서 낙엽이 많이 떨어진 오솔길을 걸으며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던 옛날을 생각하며 정성껏 낙엽을 주워 가방에 담았을 거예요.”

15년이 지난 지금 그 노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살아 계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이 낙엽과 ‘가을 사랑’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을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