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점균 감독
ⓒ 강윤주
대안학교 학생들의 사는 모습을 그린 영화 <비가 내린다>를 보며 떠올린 감독의 모습은 현재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대안 학교에 다니기를 소원하거나 혹은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 자리에 나온 감독 오점균씨는 남자치고는 꽤 긴머리에 속 깊은 웃음을 짓는 “어른”이었다.

기계 공고를 졸업하고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미대에 진학했다는 그는, 학부 졸업 뒤 잠시 미술 교사 일을 하다가 다시 대학원에 들어갔다. 정치적 열기가 뜨거웠던 87, 88년 무렵 대학원을 다니며 진보 성향의 미술 운동 하는 이들과 어울렸던 그는 자신이 하고 있던 설치 미술, 전위 미술을 어떻게 하면 사회적 움직임에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는데 마침 이 무렵 보게 된 영화가 <붉은 수수밭>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내 인생의 영화”가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의 표현 매체를 바꾸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의 인생의 영화가 되었다.

오랫동안 미술을 했던 사람인 만큼 자꾸만 미술과 영화라는 두 영역을 비교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두 영역의 차이를 “깊이”와 “소통”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했다. “그림을 그릴 땐 깊이 들어갈수록 내 자신의 만족감이 커졌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현대 사회에서 ‘깊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그림 그릴 때, 내 한계까지 끝까지 밀어붙여 보는 데서 오는 기쁨도 컸지만 지금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얻는 기쁨 또한 무척 큽니다.”

오점균 감독의 <비가 내린다>

▲ <비가 내린다> 한 장면.
ⓒ Siff
그의 영화 <비가 내린다>는, 덕유산 자락 무주에 위치한 실제 대안학교 한 곳에서 찍은 것이다. 전국에 대안학교들이 몇 군데 있지만 대부분 몹시 폐쇄적이라서 촬영 협조 요청을 거절당했는데 이곳에서 다행히 허락을 해주었다고 한다. 등장인물들도 모두 그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로서 처음에 쌀쌀맞게 굴던 그들도, 감독인 그가 기숙사에서 머물며 학생들과 함께 술도 하고 밭일도 같이 하며 거리 좁히기에 애쓰자 조금씩 받아주더라는 것.

“영화 찍는 사람들이 흔히들, 동물하고 찍는 일이 힘들다고 하죠. 또 아이들과 찍는 일이 힘들다고도 하고요. 그렇지만 제일 힘든 건 식물하고 찍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의 이 말이 이해될 법하다. 자연 풍광이 큰 역할을 하는 그의 영화에서 수줍게 얼굴 내민 새싹들은 결정적인 장면에서 배우 이상으로 중요성을 띠는데, 이 새싹들이란 것이 너무 빨리 자라는 탓에 다 파내고 나서 새로 심기도 했고, 고생고생해서 심어놓은 뒤 그 다음날 아침 촬영하러 가보면 까마귀들이 다 파먹어 버리기도 했단다. “이제 노하우가 생겨서 다음부터 식물 영화는 잘 찍을 거예요”라는 게 그의 변이다.

현재 촬영을 마치고 편집 과정 중에 있는 그의 다음 작품은 돈없는 젊은 연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랑을 나누고 싶어지면서 생기는 해프닝을 그렸다. 어디서 둘만의 시간을 가져볼까 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그들은 마침내 장보러 나간 어느 아줌마의 빈 집에 숨어들어가 “작업”을 시작하는데, 아뿔싸, 집 주인은 생각보다 빨리 집에 돌아왔다. 처음에 호통을 치려던 그 아줌마, 슬슬 구미가 당겨 숨어서 그 두 남녀를 보기 시작하는데, “일”을 마친 남녀는 배짱이 생겼는지 둘이서 장난치며 웃고 난리다.

뒤늦게 나서기에도 머쓱해진 아줌마는 결국 그들이 집을 나가기까지 숨어서 보고 있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이 장에서 사온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소통”의 기쁨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감독 오점균씨의 작품 <비가 내린다>는 21일(토) 저녁 8시와 25일(수) 저녁 6시 서울 아트시네마 “단편 경쟁 섹션 2”에서 볼 수 있다.

박재모 감독의 <리싸이클링>

▲ 박재모 감독
ⓒ 강윤주
영화 <리싸이클링>의 감독 박재모씨는, 월드컵 열기의 후유증으로 남겨진 축구에 대한 광적인 분위기에 편승했다가 인대까지 다친 최근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꽤 운이 좋은 사람인 듯하다.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가 인정받았고, 평소의 급한 성격이 작업할 때는 “쫌생이”처럼 변신해 주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정말 여러 모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의 공식적인 첫 단편 영화 <리싸이클링>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쓰레기를 재활용하면 어떤 희망이 생산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그 주제에 걸맞게 쓰레기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온 동네의 비디오와 오디오 기계 쓰레기를 모아 인물들을 만들어냈는데, 어떤 건물 뒤에서 세탁기 통을 발견하고 영화 속 공장의 거대한 탱크로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런 “좋은 쓰레기”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주인공은 강아지와 로보트. 금속 쓰레기만이 산처럼 쌓인 폐허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로보트와 친구가 되고, 그 둘은 우연히 파란 새싹(아, 생명이여!)을 발견한다. 로보트는 그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 물 한방울을 만들어내지만 그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는 바람에 결국 로보트로서의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이다.

▲ 영화 <리싸이클링> 한 장면.
ⓒ Siff
줄거리를 다 들었으니 이제 어떡하냐고 걱정하실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안다고 해도 그 재미가 전혀 반감되지 않을 다른 재미들이 많은 작품이다. 로보트와 강아지, 그리고 로보트가 세우는 거대한 공장들은 모두 손으로 만든 것으로, 이 물체들을 조금 움직여 놓고 한 컷 찍고, 또 조금 움직여 놓고 한 컷 찍어 이어 붙여 놓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인 이 십분짜리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박재모씨와 그의 팀원들은 석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작업했다고 한다.

“저녁 여섯시부터 밤새고 그 다음날 새벽 여섯시까지 일하면 대개 7초 정도 찍을 수 있죠. 아주 운이 좋은 날은 10초쯤 찍을 수 있구요.”

그는 자기 작품에 70점 정도밖에 안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런 힘든 작업 과정 탓에 사실은 좀더 긴 호흡, 곧 며칠밤을 새워서라도 한컷의 호흡을 길게 이어가며 찍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박하게 점수를 매긴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각종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는 물론 기쁘긴 하지만 반면에 다소 안타깝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한 70점짜리 작품이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연거푸 받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많지 않다는 뜻 아니겠냐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특히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힘들더라도 시간을 쪼개어 작품 만들기를 병행하면서 강단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 역시 현재 호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정작 그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애니메이션 학과가 없었다고 한다. 과목 중 애니메이션 수업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가르치는 교수님은 애니메이션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 전공해 봤자 남의 나라 하청 작업이나 하고 자기 작품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테니 그만두라는 게 교수님 말씀이셨죠.”

그래서 광고를 공부하고 졸업 뒤에도 광고사에서 일한 그는 제일기획에서 일하면서 우연히도 아이들 과자 광고류를 많이 맡게 되었고 “치토스” 등의 애니메이션이 섞인 광고를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에 유학을 가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는 것이다.

“2D 애니메이션은 이미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고 3D 애니메이션 또한 미국의 막강한 자본력에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는 손재주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외국인들이 일주일 걸릴 걸 이삼일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한국인들의 손재주를 보고는 그래, 이거다 했죠.”

그에 따르자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바로 이 “손맛”에 있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언젠가는 이 “손맛” 또한 기계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이 “손맛”은 인간의 손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라고 한다.

그는 총 제작비 3천만원이 약간 넘게 든 이 영화를 영진위 제작 기금 천만원을 받아서 시작했고, 애니메이션 영화제들에서 받은 상금 천팔백만원을 합치자면 제작비를 거의 회수한 입장이다. 교단에 선 탓에, 또 개인 프로덕션을 가진 탓에 다른 독립 영화 감독들에 비하자면 상당히 풍족한 여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이 독립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질문자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 부분을 놓고 고민했노라고 고백했다. “제가 아무래도 상업 광고판에서 6년여간 일한 탓에 알게 모르게 영향받은 부분이 있더라구요. 독립 영화라고 하면 실험성을 꼭 가져야 할 것 같은데 제 영화는 너무 친절하거든요. 다 풀어서 이야기해주죠. 그렇지만 한번 보고 싶었어요, 남들이 제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독립 영화”의 울타리를 어디까지로 정해 놓을 수 있을지, 또 그의 작품이 그 자체로 어떠한지를 평가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단편 영화 섹션 4”에 속한 그의 작품은 22일(일) 오후 2시와 26일(화) 저녁 8시에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
2002-12-21 20:39 ⓒ 2007 OhmyNew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