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라크전 관련 보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 중의 하나는, 왜 지금 이 시간,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시간이 갈수록, 보도를 들으면 들을수록 현실감이 없어지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3차원 지도까지 곁들여져 미사일의 진로와 지상군의 경로, 상세한 사망자 수까지 나오는 보도를 듣고 있노라면, 심지어 이것은 실제 전쟁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보드 게임의 TV 버전이거나 컴퓨터 게임 중계일 것이라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이번 전쟁에서 처음 갖게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91년 걸프전이 벌어졌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너무 상세히 보고 듣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신문방송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이런 해석들을 모두 한 곁에 젖혀두고 릭 로울리(Rick Rowley) 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상업적 미디어는 사건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건을‘관찰’한다. 그러한 거리를 좁히는 것이 진보적인 매체의 역할이며, 정치적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최대한도로 거리감을 좁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 릭 로울리와 상영회 진행 및 통역을 맡았던 미디액트 소장 김명준 씨
ⓒ 강윤주
릭 로울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이름부터 대단히 시끄러운, 뉴욕의 급진적 미디어 그룹인 ‘빅 노이즈 택티컬 미디어 (Big Noise Tactical Media: 이하 줄여서 빅노이즈)’ 의 디렉터로서, 영상 미디어 센터에서 주최한 미디액트의 첫번째 정기상영회에 참석했다.

3월 22일 광화문 미디어 센터에서 열린 이 정기 상영회에서는 빅노이즈 필름의 다큐멘터리 <아르헨티나 보고서 (Argentina Report)> 를 비롯하여 다른 몇몇 작품들이 소개되었으며 <아르헨티나 보고서>의 상영 뒤에는 릭 로울리의 발제와 열띤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이날 발제와 질의 응답 시간에 오간 이야기들은 크게 보자면 빅노이즈 필름의 다큐멘타리 촬영과 배급 방식에 대한 것라고 할 수 있다. 릭 로울리는 각각의 작품을 찍을 때마다 있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촬영과 배급의 어려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빅노이즈 필름의 첫번째 작품인 <사파티스타>는 그들의 대표작으로 꼽힐 수 있을 만한 탁월한 다큐멘타리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운동을 기록한 이 다큐멘타리를 찍을 때 빅노이즈 필름 구성원들은 카메라 조작법조차 모르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작정 사파티스타 그룹을 찾아갔고 촬영 뒤에도 편집을 위해 일종의 사기까지 쳤다고 한다.

곧, 어느 회사에 자기가 아비드로 영화 편집을 할 줄 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입사한 뒤 밤이면 혼자서 아비드 쓰는 법을 익혀가면서 <사파티스타>를 편집했다는 것이다. (이것말고도 그는 다른 작품의 편집을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수단을 다 썼다. 거짓말같이 들리겠지만, 대학에 입학하면 편집기도 공짜로 쓰고 생활이 해결된다는 생각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고, 영화의 편집이 끝난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릭 로울리에 따르면 진보적인 정치 운동 집단을 촬영하려고 할 때 촬영 집단에의 접근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한다. 사파티스타 그룹도 상업 언론에 취재를 허용했다가 결국 그 상업 언론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는 보도해주지 않으면서 공격하는 형태의 방송물을 만들었던 경우를 여러 번 당한 탓에, 빅노이즈 필름에게도 처음에는 제한적 형태의 취재만을 허용했다고 한다.

곧, 일주일의 시간을 주어 그 시간 동안 촬영한 내용을 편집해서 일종의 데모 테이프를 만들게 했고, 그 테이프를 보여주자 그 뒤로 일년간의 촬영을 허가했다는 것이다.

▲ 상영회를 가득 채운 관객들
ⓒ 강윤주
빅노이즈 필름의 대단한 점은 집요하고 끈질긴 배급 방식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처음 <사파티스타>를 완성했을 당시만 해도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온갖 방송사와 여러 독립 영화 배급사를 통해 배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그들은 결국 기존의 배급 방식으로는 그들의 다큐멘타리 배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상영회를 열기 시작한 이들의 정열은 릭 로울리의 말 그대로 “빈 벽이 보이면 무조건 쏘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때마다 이들이 확인한 것은, 이런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목마름이었다.

“어느 노동자 집회날 많은 학생들이 사파티스타 복면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파티스타다’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저는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지요.”

사실 이러한 형태의 배급은 상당히 고전적인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육칠십년대 미국의 ‘뉴스릴’ 집단이나 세네갈의 우스만 상벤 감독도 이런 거리 상영회를 통해 자신들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릭 로울리는 이런 상영 형태의 효과가 결코 적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언젠가 한번 캐나다 국영 방송에 저희들의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반응은 작은 방에 모여 가졌던 상영회 때보다도 훨씬 덜하더군요” 하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얻은 큰 교훈은 “영화 작업은 결코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작업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명확한 관점과 제작에 대한 집중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촬영을 배우기 전에 촬영했고 편집을 배우기 전에 편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 작업을 시작했던 90년대 초반과 달리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훨씬 더 나은 배급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들은 관객을 수동화하는 TV 보다 게릴라식 거리 상영회가 여전히 더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인터넷 매체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1999년 WTO 반대 투쟁이 있었던 씨애틀에서 결성된 ‘독립 미디어 센터 (The Independent Media Center)’ 네트워크를 비롯한 온라인 주문만 해도 현재 수천건에 이른다고 한다.

▲ 빅노이즈 필름의 다큐멘타리 작품들
ⓒ 강윤주
릭 로울리는 ‘독립 미디어 센터’ 초기 멤버로서, 씨애틀의 운동을 생생히 기록한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는 이들뿐 아니라 수많은 당시 비디오 활동가들의 기록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400시간 분량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만 석달이 걸린 이 작품은 역시 ‘독립 미디어 센터’ 네트워크를 통해 배급되었고 한국어까지 포함해 여섯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독립 미디어 센터’는 원래 씨애틀에서의 활동이 끝나고 나서 계속 가동될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씨애틀 일정이 끝난 뒤로도 계속 올라오는 자료를 보고서 지속적인 운동 싸이트로 활용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은 70여개국에 백여개의 ‘독립 미디어 센터’가 만들어졌다.)

그는 자신들의 작품을 “체제에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도, 검찰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세금도 내기 싫고 뭔가 못마땅한데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지, 왜 이렇게 체제가 엉망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현 체제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며 다른 더 나은 체제 또한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 세계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사람들에 속하며 이런 이들에게 운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여기 그 실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 <아르헨티나 보고서>의 한 장면
ⓒ 미디어 액트
그는 한 가지 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신자유주의 움직임과 함께 수자원 공사가 민영화되면서 수도비를 내지 못한 빈민 계층은 더 이상 물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분노한 그들은 회사로 몰려갔고 회사는 으레 그렇듯이 대표를 뽑아 대화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표를 뽑지 않았다. 몇 명의 대표는 개인의 이익 때문에 변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다시, 본사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며 몇 명만 본사로 함께 올라가자고 제의했지만 그들은 회사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가두고 결국 회사가 다시 물을 공급하도록 만들었다.

국회의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예를 통해 그는 말하기를, “쿠바나 베트남에서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 시대와 각 나라의 개별적 상황에 맞는 다른 방식의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다음 작품은 <제4차 세계 대전> (가제)이다. 지난 6년간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세계화 투쟁을 총결산하는 이 작품에는 한국의 경우도 들어 있다. 그외 사파티스타,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팔레스타인, 미국과 유럽의 상황을 다루는 이 작품에서 그들은 각 나라의 운동이 고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문제의 뿌리는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연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파티스타>를 비롯하여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와, 뉴욕의 갱단 이야기를 다룬 <라틴 킹>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 뉴스 제작단’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2003-03-24 09:0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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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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