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인터넷상에서 내려받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국내에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까지도 미리 내려받아 보고 개봉일 훨씬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한 평들을 올려놓는 발빠른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장점을 쏙쏙 잘 뽑아먹는다고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영화볼 줄을 모른다고 개탄한다. 후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 “이기 때문이다.

ⓒ 문화학교 서울
3월 1일에서 21일까지 열리는 “스페인 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김성욱씨 역시 극장에서의 “영화적 체험”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스페인 영화제”를 비롯, 일년에 네다섯 번의 고전 영화 회고전을 여는 “문화학교 서울”의 사람들 역시 “필름으로 영화 보기”의 맛에 일찌감치 눈을 뜬 이들로서, 그들은 비디오 아카이브로 고전 영화들을 소장하고 있고 종종 그 영화들을 비디오 상영회를 통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극장에서 집단적으로, 그리고 필름으로” 그 영화들을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곧 어쩌면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소망을 실현하고픈 욕심에 회고전을 연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날인 2월 28일 오후 사당동에 있는 “문화학교 서울”의 사무실에서 김성욱씨를 만났다. 개막 하루 전이니만큼 분주하거나 들뜬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사무실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와 함께 스페인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다.

“어느 나라 영화를 보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스페인 영화는, 특히 저희들이 이번에 마련한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영화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정권하의 스페인 사회라는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지요.”

이번 회고전에 소개되는 감독들은 모두 합쳐 열한명, 그중 우리에게 가장 귀에 익은 감독 이름은 아무래도 루이스 브뉘엘과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아닐까 한다. 김성욱씨가 소개하는 이 두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 문화학교 서울
“브뉘엘은 1900년대생으로 이번에 소개되는 감독들 중 가장 옛날 감독이라고 할 수 있죠. 브뉘엘은 스페인이 낳은 감독 중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코 독재 정권하에서 스페인에 머물지 못했던 그는 주로 외국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국제적 감독으로 클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브뉘엘 이후 스페인 국내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빅트로 에리세나 카를로스 사우라 같은 감독들은 국제적인 감독으로 떠오르지는 못했는데 그 뒤 80년대 들어서 다시금 스페인 영화를 국제 시장에 알린 인물이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국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대단히 스페인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스페인 국내파들과 비교하자면 스페인적인 요소는 다소 엷고 오히려 보편적인 것을 많이 다룬 것 같아요. 일례로 사우라가 만든 “플라멩고 3부작”이나 알모도바르의 “하이힐”이나 모두 플라멩고를 다루고 있지만 전작이 스페인 역사를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반면 “하이힐”은 그런 상식없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거든요.”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
ⓒ 문화학교 서울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물론 다른 영화외적 요소도 있다. 80년대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세계화 물결을 타면서 그 시대 감성을 잘 소화해냈던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스페인의 영화”로서 유럽 세계에 텔레비전 매체 등을 통해 많이 소개되었던 것. 스페인에서는 소수 하위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동성애나 마약 등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보다 광범위한 이해되었던 것이다. 현란한 색채와 광고적 화면 구성 등이 젊은이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것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이 두 감독의 영화말고도 눈여겨봐야 할 영화들로 김성욱씨는 베를랑가의 영화를 꼽는다. 베를랑가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스페인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해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정권하의 상흔은 많은 스페인 영화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는데 카를로스 사우라의 “사촌 앙헬리카”와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처럼, 거의 같은 때에 만들어진 두 영화에서 그런 상흔이 어떻게 다르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있을 것이라 한다.

카를로스 사우라가 만든 “사촌 앙헬리카”는 유아적 방식으로 고향을 그리면서 멜로드라마적으로 독재 정권하의 상흔을 그린다. 반면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은 요즘 말로 하자면 환타스틱한 장르에 속할 수 있는 영화로 이국적인 요소, 이를테면 고전 헐리웃 영화를 받아들여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회상하는 재료로 쓰고 있다.

유신 시대 우리나라 영화들을 이야기하면서 김소영 교수가 언급했듯이 그 당시 영화에서는 카메라에 찍힌 것들이 아니라 찍히지 않은 것(곧 산동네 판자촌이나 도시 뒷골목들)이 무엇인가를 유의해 보아야 그 시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모두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의 칼날을 피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탓에 나온 소산물인데 스페인에서도 검열의 칼날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베를랑가 감독 같은 경우는 검열 당국이 내용 수정에 지나치게 간섭했다는 데에 대한 항의 표시로, 시나리오를 검열관 이름으로 등록하려고까지 했다니 우리나라 못지 않은 폭압이었던 듯하다. 나치 정권하의 괴벨스식 검열법에 비교할 수 있다는 스페인 검열은 많은 영화 감독들로 하여금 은유와 상징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게 했고 이들을 찾아 해석해 내는 일이 관객의 몫이라 할 수 있겠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에서 영화 보기, 그 맛에 대하여...

▲ <스페인 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성욱씨
기사 첫부분에 언급했던 것처럼 김성욱씨는 극장에서의 집단 체험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사람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되는 기억과 체험은 자기가 살아온 생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몇십편 극장에서 개봉되어 한달 안에 승부를 보고 영원히 시장에서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화들에서 영화적 체험을 기대하기란 어렵죠. 이렇게 빠른 ‘소비’의 속도로는 영화라는 것이 여태까지 어떻게 흘러온 매체인지를 이해할 수 없고, 이건 욕망의 실현 이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에 따르면 고전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이것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든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든 ‘나 이전에 영화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식이자 다양한 영화 보기의 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화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무척 사랑하는 그는, 그래서인지 가끔 “필름의 물신성”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미 삼사십년대부터 필름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고전 영화들을 잘 보존해 온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의 필름 보관 상태는 엉망이었던지라 한번 수입 배급되었던 고전 영화들도 국내에서 다시 그 프린트를 찾으려면 이미 폐기 처분된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그런 탓에 회고전을 열기 위해서는 외국에 다시 수소문해서 프린트를 받아와야 하는데, 그 때 드는 시간과 돈은 보통이 아니다. 어렵게 받은 영화 프린트, 몇번 돌려 보면 소실되어 버리고 말 이 유약한 물건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때는 갑자기 ‘아, 이번에 이 프린트를 돌려주고 나면 또 언제 보게 될까’ 하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프린트가 없어져서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건 일종의 “상흔”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번 영화제를 지원해준 스페인 대사관쪽에서도 그걸 원하고, 또 “이벤트적 성격”이 있어야 기사를 실어주는 언론 매체들의 성향 때문에 공식 명칭을 “스페인 영화 페스티발”이라고 짓기는 했지만 김성욱씨는 이번 행사를, 이벤트성을 가진 다른 영화제들과 구별짓고 싶어한다.

“일단 대개의 페스티발은 예산 규모면에서도 저희와 큰 차이가 나고 성격적으로도 축제의 성격이 크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저희가 여는 것과 같은 고전 영화 회고전 등이 꾸준히 열려서 그런 영화들을 보는 방식이 일상적이 되는 겁니다. 일년에 서너번이 아니라 한달에 서너번 이런 기회들이 있어서 원하는 이들은 멀티 플렉스에서 상업 영화를 보는 것뿐 아니라 고전 영화들도 일주일에 두세번 와서 볼 수 있는 것, 그게 제가 원하는 거죠.”

이번 영화제의 입장료는 2천원이다. 대개 5천원쯤인 다른 영화제들의 입장료를 생각해 볼 때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가격인데 스페인 대사관의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나라의 영화를 소개해 온 김성욱씨는 잠깐 각 나라 대사관의 지원 태도를 비교하기도 했는데, 비교적 협조가 잘 되는 프랑스, 일본, 스페인 등과 달리 미국 대사관은 전혀 협조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미국 문화원에서 “헐리웃 고전 영화 회고전”등이 열렸던 기억이 없다. 아마도 이윤 추구에만 관심이 있는 헐리웃 시장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사고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이번 영화제는 3월 1일부터 14일까지는 서울 안국동 정독 도서관 맞은편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8일부터 21일까지는 광주의 예술영화 전용관인 광주극장에서 열린다. 관심있는 분들은 www.cinephile.co.kr 을 보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 강윤주
2003-03-02 15: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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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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