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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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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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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스타파>는 조세 피난처에 돈을 은닉한 한국인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함께 하는 것으로,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 9번째 명단까지 발표가 됐는데, 매 때마다 이슈가 됐다. 여러 유명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조세 피난처'라는 단어는 사실 조금 협소한 용어라 생각한다. 물론 그 주된 목적이 '조세를 피난'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외에도 자금 은닉과 돈세탁 등의 기능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 '비밀주의'다. 바로 이 '비밀주의'가 더욱 심각한 문제다. 비밀주의는 다른 주권 국가들의 법과 규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스위스 비밀계좌. 어느새 우리는 뭔가 구린 냄새가 진동하는 뉘앙스의 단어인 비밀계좌 앞에 '스위스'라는 나라를 붙이기 시작했다. 고유명사로 치부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단어사용이 됐다.

하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 스위스는 오랜 시간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인도적인 구호활동에 열성인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연방의원을 지낸 장 지글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금권이 집어삼킨 자국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의 저서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를 읽다보면 '부자는 지갑 속에 법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루소의 지적대로 스위스의 법이 은행들의 주머니 속으로 숨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식량(<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과 빈곤(<탐욕의 시대>) 고발서로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가 풀어놓는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주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

스위스의 비밀주의는 독일 유대인들의 자산을 나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착시킨 제도라는 다소 감성적인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스위스가 은행 비밀주의를 법으로 제정한 것은 1934년이고, 독일에서 해외 계좌 소지자에 대한 사형 선고는 1936년에야 등장했다. 따라서 전후관계에 모순이 있다.

사실 스위스가 비밀주의를 법으로 정한 이유는 이렇다. 1931년 스위스 정부는 은행에 대한 더 많은 통제를 요구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에 직면한다. 대공항의 영향이었다. 은행가들에게는 그전까지 견고한 내부통제를 바탕으로 마음껏 누리던 자유가 사라질 판이었다. 금융 영역에 대해 정부조사가 시작되면 비밀 유출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 은행들이 정치권에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 위반을 법을 통해 범죄로 다루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위스에서 헌법 위에 하나의 법이 더 있단다. 바로 은행의 비밀 보장이다. 온갖 더러운 돈들은 스위스를 통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신분을 세탁한다. 이렇게 깨끗하게 세탁된 돈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선량한 표정을 한 범죄자의 금고 속으로.

그러나 스위스도 국제사회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투명한 사회를 향한 가치가 공감대를 얻으면서 비밀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스위스는 1989년 마지못해 '사전 정보 제공의 법적 의무'라는 다소 모호한 조항을 신설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자금을 담당한 밀거래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계속해서 은행 창구에 소액권이건 고액권이건 얼마든지 입금할 수 있다. 또한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자 소득을 챙길 수 있다. 오로지 마약 거래에 따른 자금을 '고의적으로' 받은 직원만 처벌 받을 뿐이다.(122쪽)

예컨대 이런 거다. 어떤 이가 마약을 비롯해 각종 범죄로 벌어들인 소득을 가지고 스위스 은행을 찾는다. 은행가는 안락한 접견실에서 범죄자에게 정중하게 자금 출처를 물어보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물론 질문을 받은 이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아무렇게나 대답하면 그만이다. 은행가는 예의바르게 그가 하는 말을 들어준 다음 그가 내민 돈을 입금하면 된다. 오직 자금 출처에 관한 정보를 '고지'해야 한다는 의무만 있으니까.

자기 정화 기능이 사라진 이유

스위스의 양 옆으로는 독일과 프랑스가 자리한다. 양차 세계대전에 대립했던 강대국의 중간에 낀 매우 위태로운 위치다. 거기다가 4개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다. 이런 나라가 살아남는 길은 중립이었다. 내적으로 단합을 다지고 외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 프랑스계 국민과 독일계 국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어느 한 쪽만을 지지하기도 난감한 노릇이다.

합의를 저해할 수 있는 사회적 비판은 즉각적으로, 물론 논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 스위스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며, 비판을 일삼는 지식인은 공공의 적으로 손가락질 당한다.(211쪽)

이 중립주의는 스위스만의 개념인 '존더팔(Sonderfall)', 즉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아주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사고와 결합해 입을 굳게 다무는 것을 미덕으로 만들었다.

또한 스위스는 연방 국가다. 지방 분권화된 체제에서 중앙 정부는 전체 조세의 약 3분의1 정도만 징수하며, 그 나머지는 26개 주와 약 2천7백 곳에 이르는 지방정부에 거의 균등하게 분배된다. 각 주 정부들이 서로 자기 주가 세율이 더 낮다며 경쟁을 벌여 세율이 지속적으로 인하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비밀주의와 결합해 훌륭한 역외 피난처로 발돋음하는 또 다른 동력이 됐다.

물론 스위스인들 모두가 도덕 불감증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1985년 한 경찰관은 사명감과 정의감에 불타 20쪽에 달하는 수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돈 세탁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 범죄조직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쌩뚱맞게도 '근무 시에 동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이유로 좌천당했다. 이 사례는 우리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 내부고발자의 사례를 떠올리게 해 더욱 씁쓸하다.

국가사회와 민간사회 사이에는 변증법적 기재, 그러니까 절묘한 연금술이 활발하게 작동한다. 민간사회가 부도덕과 냉소주의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때, 국가사회는 무능과 독단의 늪으로 침잠한다.(207쪽)

해결책은 또다시 '연대'

장 지글러는 이 추악한 행태를 끊을 해결책으로 '연대'를 주문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같은 내용을 주문한 바 있다. 시민들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 다소 이상적일 수는 있으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정의를 향한 공동체적 염원이 모인다면 불가능한 일도 없으리라. 더군다나 정치권과 사법부는 이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니 말이다.

스위스 금융인과 정치인들이 검은돈을 통해 얻는 엄청난 이득은,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이들이 느낄 슬픔의 깊이다. 독재자, 마약거래, 금융범죄 모두 개인들의 참혹한 고통을 담보로 하고, 사회에 재앙을 불러온다. 그 반대급부로 얻어지는 검은 돈, 이 돈은 인간을 부패시키고 인간이 만든 제도를 파멸로 몰아간다.

유럽연합을 구성하는 모든 국가는 유서 깊고 역동적인 민주국가들이다. 민주국가에서 무기력이나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 유럽에서 시민의식의 봉기는 임박했다. 시민의식의 봉기는 스위스 은행 비밀이라는 치명적인 제도를 대번에 쓸어버릴 것이다.('한국어판 서문'에서)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재산이 최대 870조로 세계 세 번째 규모란다. 이 책이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도덕적인 힘, 분노하는 역량, 자유를 향한 열망을 모을 때다.

덧붙이는 글 |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13.07, 1만2천8백원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조세피난처의 원조, 스위스 은행의 비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홍기빈 해제, 갈라파고스(2013)


태그:#장 지글러,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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