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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교섭이나 단체협약이 아닌 '사회적 합의'가 투쟁의 결과로, 혹은 마무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고 협약식을 맺는다. 그러나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억압은 그 후에도 변함없다. 그리고 회사가 그 합의안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노동조합은 '사회적 합의를 이행하라'를 요구하며 다시 투쟁에 나서왔다.

꾸준했던 후퇴를 정당화해온 한국 사회 노사정 합의

한 사업장 혹은 직종에서의 '사회적 합의'와 전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적 합의'는 성격과 대상, 목표가 다르다. 후자의 경우, 노사관계에 정부가 개입하여 '합의' 혹은 '대타협'이란 이름으로 밀어붙여 온 노동조건 및 관계 후퇴 양상이 일관적이기도 했고(그 자체가 노사관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 사회적인 합의가 지니는 무게나 영향이 개별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 및 투쟁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는 1996년 설립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부터 볼 수 있다. 이 기구는 '사회적 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제, 파견제 등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1997년 1기 노사정위원회는 "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 및 구조조정 추진, 파견 근로 법률 제정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 재고"의 내용을 담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한다.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을 정당화한 이 합의는 대우차나 쌍용차, 한진중공업 등에서 발생한 대량 정리해고의 빌미가 되었다.

2006년에는 2년 동안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제법을 제정하는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확대한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2018년 "일하는 사람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내걸며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탄력근로 단위 기간을 6개월까지 확대한 '탄력근로제 개선을 위한 경사노위 노사정 합의문'에 가장 먼저 합의한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2022년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 바닥에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철판을 붙여 만든 공간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2022년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 바닥에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철판을 붙여 만든 공간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 금속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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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는 외침을 통해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실태를 사회적으로 알리며 투쟁한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은 51일간의 지난했던 파업 투쟁 후 고용승계 노력 및 임금 4.5% 인상에 합의했다. 금속노조는 "정부를 포함한 조선산업 원·하청 노사, 노동·시민·사회단체, 정당, 종교계가 범사회적 논의기구를 구성"하여 뿌리 깊은 원하청 구조를 해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측은 고용승계 노력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단식 농성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고용노동부는 2022년 10월 업계 노력을 전제로 정부가 지원하겠단 발표를 했고, 11월 '조선업 상생협의체'가 발족한다. 그러나 이 협의체에는 원청의 강한 반대를 이유로 노동조합은 참여조차 배제되었고, 그 상태로 2023년 2월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이 맺어진다.

이처럼 "노사정 당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근로자의 고용안정, 근로조건에 관한 노동정책 및 이와 관련된 산업, 경제, 사회정책을 협의한다"는,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정부 설명은, 그 자체로 각 주체의 힘과 역학관계가 동등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정부와 자본은 대우조선해양 사례를 통해 '사회적 대화 기구'에 노동자들을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욱 노골화했으며, '사회적 합의'로 실현되어온 내용이 누구를 대변해왔는지도 여실히 확인시켰다.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은 '사회적 합의'

노동자들은 누가 사용자인지도 모호한 상황 속 사측의 부당노동행위 및 건강권 침해에 대응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인 경우가 많다. 그 지난한 상황 속 노동조합은 수십 명의 집단 과로사,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보건휴가 및 불법파견 등을 사회적으로 의제화시켰고, 사측을 테이블로 끌어 앉혔다.

사측은 그럴 때 '사회적 합의'를 노사교섭이나 단체협약을 통한 권리 보장을 대체하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꿈쩍 않는 회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졌을 때, 법적 효력조차 없는 사회적 합의로 사회적 관심을 잠재운 것이다.

2017년 불법파견 및 임금 체불에 대해 고용노동부 시정명령을 받았으나 이행하지 않은 SPC는 2018년 더불어민주당·정의당·가맹점주협의회·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노동조합 등을 끌어들여 '사회적 합의 체결식'을 연다. SPC는 한편으로 이행했다는 선전을 대대적으로 했다. 하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쌍용차도 유사하다. 경영난을 빌미로 2009년부터 수천 명의 대량 구조조정과 폭력적 진압으로 일관해 온 쌍용차 자본에 맞서 금속노조는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와 수십 명의 노동자 사망 등을 받아 안으며 싸워왔다.

그러다 2018년 "대한민국 노사관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례"라는 찬사까지 받으며 사측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민주노총과 기업 노동조합은 해고된 노동자 119명 전원 복직을 담은 '노노사정 합의'를 맺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자본은 경영난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복직을 연기했다.

한편 다양한 주체들이 '사회적 합의'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장 노동자들이 주체로서 나서거나 활동하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택배 노동자 수십 명의 집단 과로사로 인해 인력 충원과 주 5일제, 표준계약서 도입 등을 요구하는 투쟁이 촉발되었다. 과로사대책위가 꾸려졌고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사회적 합의기구 합의문'이 2021년 체결되었다. 합의 주체는 택배 사업장, 영업점, 화주단체, 소비자단체, 정부, 민생연석회의, 과로사대책위였다. 택배노동조합 등 노동자들은 과로사대책위의 일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소수노조라는 이유로, 법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가 교섭에 응하지도 않는 조건 속 합의 문구가 공염불이 될 때, 노동조합의 투쟁은 사회적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사측에 맞선 '사회적 합의 이행'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행되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알려야 했다.

2022년 2월 택배노동조합 CJ대한통운지부는 CJ대한통운 본사 점거에 들어갔고, 지켜지지 않는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했다.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한 SPC에 맞선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의 단식 투쟁 등을 계기로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단식 농성과 불매운동, 산재사망 대응 등의 투쟁을 지속한 결과 2022년 11월 '사회적 합의 발전협의체'가 구성되었다. 현재는 이마저도 기능 정지 상태다.

구조 변혁, 노동자가 요구를 만들고 벼려 나가야
 
민주노총 경남본부, 전국화섬식품노조 부산경남지부는 지난 2021년 4월 13일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앞에서 “사회적 합의 불이행, 민주노조 탄압하는 파리바게뜨 규탄 기자회견”을 연 뒤 선전전을 벌였다.
 민주노총 경남본부, 전국화섬식품노조 부산경남지부는 지난 2021년 4월 13일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앞에서 “사회적 합의 불이행, 민주노조 탄압하는 파리바게뜨 규탄 기자회견”을 연 뒤 선전전을 벌였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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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는 이후 투쟁의 요구를 제한해오기도 했다. SPC는 직접 고용이 아닌 자회사 형태의 고용을 관철하고, 직접 고용 요구가 다시 못 나오게 하는 수단으로 사회적 합의를 활용했다. 합의 당시 택배노동조합의 요구는 주 5일제 실시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이었지만, 이는 '시범사업' 정도로 반영되었다. 여전히 택배 노동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여러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고, 주 60시간이란 긴 시간 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합의'는 원하청 관계 및 비정규직 철폐 등까지는 나아가지 못 하게 한 구실을 했다.

단체협약이 아니기에 안 지켜도 그만인 회사, 지속되는 부당노동행위와 노조 탄압, 어용노조와 회사의 담합으로 힘이 없는 민주노조…. 여러 복잡하고 슬픈 상황은, 사회적 합의의 선택과 이행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게 하기도, 사회적 합의에 가로막혀 변화의 동력을 더 만들어내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사회적 합의에 매달리지 말자. 죽지만 않아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원청 책임 강화,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노동자성 부여, 비정규직 철폐 등의 변화를 만드는 주체는 을지로위원회도, 회사도, 정부도 아니다.

주인공은 노동자다. 투쟁의 결과를 정리하기 위한 불가피한 교섭과 어떻게 잘 구분할지, 노동안전보건이나 교육, 일상 활동 등 조직화를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할지, 변혁의 전망을 벼르고 다듬기 위해 누구와 무엇을 할지 등의 질문을 함께 만들고 활동해나가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건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7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노동_사회적합의, #사회적합의_불이행, #노동자_변혁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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