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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익을 소개한 북촌리 마을지가 발간됨으로써 향후 이방익기념사업회 발족과 이방익기념관 건립이 탄력을 받게 됐다.
▲ 북촌포구에서 열린 마을지 북포천년 출판기념회 이방익을 소개한 북촌리 마을지가 발간됨으로써 향후 이방익기념사업회 발족과 이방익기념관 건립이 탄력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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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의 고장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1948년 12월 50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마을이 불타버린 죽음의 역사가 서린 곳. 그래서 큰맘 먹고 찾기라도 하면 처절함에 사로잡히고, 분노가 치미는 땅. 4·3의 비극을 대표하는 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북촌에 지난 주말(6월17일) 모처럼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북촌리 마을지 <北浦千年>(북포천년) 출판기념회가 열린 것이다. 천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북촌리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는 점에서 이날 행사는 북촌리나 조천읍 주민뿐 아니라 제주도 각계인사들이 참여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날 출판기념회의 하이라이트는 조선시대 중국으로 표류(1796.9.20∼1797.6.20)했다가 돌아온 북촌 출신 이방익(李邦翼, 1757∼1801)이란 인물이었다. 최근 이방익 표류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번역, 정리하고 직접 이방익 루트를 답사해 책으로 펴낸 권무일 소설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는 했으나(외로워서 시작했는데 6권 출간...제주가 궁금한 '할아버지 학생' https://omn.kr/2342p) 자세한 전말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한 형편이다.

<북포천년> 편찬위원회 역시 이방익이란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가 자료수집 과정에서 알게 돼 편집 계획에 추가할 정도였다. 이날 이방익 관련 사실을 수록한 마을지를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이방익이 공식적으로 북촌리라는 역사무대에 데뷔한 셈이다.

중국 표류 중 황제 만나고 귀환... 정조가 경악한 이유
 
올레 19코스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포구로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에서 3킬로 가량 떨어져 있다.
▲ 북촌포구 올레 19코스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포구로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에서 3킬로 가량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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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익은 정조 때 충장위장(정3품) 벼슬을 지내던 인물로 조정의 각종 행사에 군사를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던 장군이었다. 그가 잠시 말미를 얻어 고향 제주를 찾은 것은 우도에 있는 어머니 묘를 북촌의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방익은 고향 사람 7명과 더불어 우도에 사전답사를 다녀오면서 뱃놀이를 즐겼다. 일엽편주를 빌려 타고 인근 바다로 나간 그들에게 느닷없는 광풍이 불어오고 배는 제주섬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갔다. 표류하던 배는 16일 만에 극적으로 대만해협 팽호도에 닿아 목숨을 건지게 된다. 표류 과정에서 비가 내려 식수로 이용하고, 커다란 물고기가 배로 뛰어들어 나눠 먹는 등 기적 같은 일이 생겨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후 이방익 일행은 중국 측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고, 중국 본토로 옮겨져 복건성 절강성 양자강 등지를 돌아보며 북경으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방익은 중국의 으리으리한 관청과 삼엄한 군사시설, 고적과 유물, 사찰 등을 목격하고 이색적인 문화와 풍속을 접했다.

북경에 이르러 황제를 만난 이방익 일행은 귀국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중국 관헌의 호위를 받으며 만주벌판을 거쳐 표류 9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넘으로써 구사일생 귀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이방익을 직접 불러 당시 중국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받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개혁 군주 정조는 이방익을 통해 그동안 중국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세계질서에 편입돼 가는 중국의 정책과 실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정조는 이방익이 구술한 내용을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가감없이 남기게 했고, 연암 박지원으로 하여금 이방익의 표류행적 전반을 글로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書李邦翼事>(서이방익사)가 나온 배경이다. 이방익 스스로도 순한글 기행문 <표해록>과 기행가사 <표해가>를 남겼다. 이방익은 정조에 의해 정2품 오위장으로 승진함으로써 조부, 부친과 함께 3대가 오위장에 오른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오위장이 된 이방익은 전주 중군(中軍)에 임명됐다. 오늘날로 치면 전라도 지역 군사령관이라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 주최 측은 권무일 소설가를 연사로 초청해 '표류인 이방익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하는 등 이방익이 북촌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했다.

이날 이방익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기념식이 끝난 후 기자와 권무일 소설가 그리고 '이방익 해설사 1호'를 자처하는 김희준씨가 이방익의 후손 가운데 한 분인 이근택씨를 만나 백비(白碑)의 존재에 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백비란 신도비(神道碑)의 별칭으로 하얀 대리석에 새긴 대형 비석을 말한다. 신도비에는 이방익의 행적뿐 아니라 그의 조부 이정무와 부친 이광빈도 함께 언급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근택씨에 따르면 이방익가에서 관리해오던 이 백비가 원래 서 있던 서우봉 기슭에서 뽑혀 인근 땅속에 묻혔다고 한다. 누가 무슨 연유로 묻어버렸는지 전후 사정은 확실치 않으나, 조상묘역 관리에 어려움을 느낀 직계 후손 중의 한 사람이 묻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근택씨는 백비가 묻힌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며, 자랑스러운 조상인 이방익이 이렇게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자신이 직접 백비를 다시 발굴해 일단 원래 있었던 자리로 옮긴 후 기념관이 세워지면 그리 이전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한 달 이내에 백비를 땅속에서 꺼내겠다고 했다.

기자 일행은 이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방익의 생가였다. 북촌포구에 가까운 이방익 생가는 과수정원이 딸린 깨끗한 양옥이 들어서 있었다. 이 집에서 만난 이명린씨는 이 집의 내력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이방익 후손인 성주 이씨들이 계속 소유해 왔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이방익은 '조선의 마르코폴로'
 
북촌포구 인근에 있으며 이방익가에서 대대로 거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단층 양옥집으로 정원에는 각종 식물과 유실수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 이방익 생가의 요즘 모습 북촌포구 인근에 있으며 이방익가에서 대대로 거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단층 양옥집으로 정원에는 각종 식물과 유실수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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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기자와 동행하며 안내 역할을 한 김희준씨는 자신의 부모가 살던 북촌포구의 집 한쪽에 '이방익스토리방'을 만들어 이방익 소개 글을 벽에 게시 중이다. 김씨는 이 공간을 잘 꾸며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방익이 표류했던 배와 똑같은 돛단배로 북촌과 우도를 오가는 프로젝트를 꼭 성사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돛단배에 의존하던 시절 작은 배를 타고 제주와 본토를 왕래하다가 거친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는 사건은 흔한 일이었다는 게 관련 연구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거나 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현존하는 표류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이다.

이방익을 제외하면 최부의 <표해록>과 장한철의 <표해록>이 그나마 알려진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 역시 제주 바다에서 표류했다. 최부(崔溥, 1454-1504)는 죄짓고 도망간 죄인을 체포해 오던 책임자로 추쇄경차관이란 벼슬을 하던 관리였다.

최부가 제주도에 출장을 가자마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게 된다. 이때가 1488년(성종 19년) 1월 3일로, 난파된 배에 탄 일행 43명과 함께 표류하다가 1월17일 절강성 해안에 도착한다. 처음엔 왜구로 오인받아 두들겨 맞는 등 고생을 많이 했으나 필담을 통해 왜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부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게 됐다.

최부는 135일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영파 항주 양주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북경까지 간 뒤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 한문으로 작성한 <표해록>이다. 여기에는 중국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 예를 들어 해안의 경비  상황, 지방의 군사제도, 운하와 수차(水車)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해 놓아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최부의 <표해록>은 1979년 후손에 의해 한글 번역본이 처음 나왔고 일어와 영어로도 번역됐다.

장한철(張漢喆)은 1770년(영조 46년) 향시에서 수석합격을 하고 다음 단계인 회시를 치르기 위해 한양을 향해 배를 타고 나갔다. 추자도를 지날 때 돌풍이 불어 바다를 표류하다가 나흘만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어느 무인도에 도착했고, 안남(베트남) 상선에 구조되지만 예전에 안남 왕자가 제주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일에 원한을 품은 선원들에 의해 다시 돛도 없는 배에 실려 버려진다. 그들은 고생 끝에 마침내 조선 땅 청산도에 이르게 돼 일행 29명 중 7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장한철이 남긴 <표해록>은 고생담과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는데 불과해서, 이방익이나 최부처럼 사료적 가치는 크지 않은 편이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애월 한담 해변가에 위치한 장한철 생가는 제주의 옛집 형태로 복원해 전시관으로 조성했는데, 당시 표류 상황을 영상으로 재현해 관람객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방익과 최부의 중국에서의 행적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최부가 처음에 고초를 받다가 '명나라는 조선의 부모나라'라고 치켜 세워가며 위기에서 벗어났던 데 비해, 이방익은 조선의 장군임을 당당히 밝힌 데다가 유교 지식도 갖추고 있어 중국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신뢰를 얻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 최부는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항주에서부터는 운하를 이용했던 데 비해 이방익은 줄곧 수레를 타고 가 황제까지 만났다는 점에서 격이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중국의 강남지역(양자강 이남)은 당시까지 직접 가본 조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을 답사한 이방익의 여정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방익이야말로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인물이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중국을 다녀온 후 옥중에서 동료 죄수였던 작가에게 보고 들은 신기한 내용을 구술해 <동방견문록>을 남겨서 유명해졌다.

실제로 이방익이 지나갔던 하문-천주-복주-건녕-선하령-항주-소주-산둥성-북경 코스는 마르코 폴로가 북경에서 천주까지 내려온 코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방익 루트를 답사한 권무일 소설가에 따르면 중국 복건사회과학역사연구소 유(劉) 소장은 "마르코 폴로가 상인의 관점에서 경제적인 측면을 봤다면 이방익은 장군의 시선으로 사회, 문화, 풍습을 보고 더 많은 자료를 남긴 것 같다. 마르코 폴로에 대해선 중국인들이 익히 알고 있지만 이방익에 대해선 자료가 없어서 너무 아쉽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권 소설가가 절강성에서 만난 중국학자도 이방익이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고 평가했고, 이방익 동상을 세우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한 전문가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방익 기념관, 북촌의 새 명소 될까 
 
현기영 작가가 북촌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비극적 실상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 순이 삼촌 문학비 현기영 작가가 북촌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비극적 실상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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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마을에 이방익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재조명되면서 이곳이 필수 관광코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북촌리 인사들은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4·3의 비극을 생생히 보여주는 너븐숭이 4·3기념관과 <순이 삼촌> 문학비만 보고 가지만, 이방익의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알려지고 기념관이 들어서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북촌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황요범 <북포천년> 편찬위원장은 "북촌마을지 출판을 계기로 이방익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기념관 건립 등 후속작업을 논의할 계획이다. 아울러 이방익이 남긴 작품을 연구하고, 혹 남아 있을지도 모를 유물과 유적 발굴, 표착지인 팽호도 방문, 이방익의 송환경로를 따라가는 관광루트 개발 등도 앞으로의 과제"라고 밝혔다.

이날 출판기념회가 열린 북촌포구는 올레 19코스가 지나고 있는 데다가 제주도내 어느 포구보다도 정겹고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포구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북촌등명대(1915년 설치, 초보적인 등대 역할)가 있고, 유명한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이 3㎞ 거리에 인접해 있다. 이 밖에도 원앙의 집단도래지인 비경의 다려도와 환해장성, 다양한 형태로 조각한 돌하르방을 감상할 수 있는 돌하르방미술관 등이 북촌리 명소로 꼽힌다.
 
1915년 북촌리 포구에 세워진 등명대는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불을 밝혔던 시설로 , 속칭 도댓불이라고 부르며 현재 제주도에 남아 있는 도댓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북촌등명대 1915년 북촌리 포구에 세워진 등명대는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불을 밝혔던 시설로 , 속칭 도댓불이라고 부르며 현재 제주도에 남아 있는 도댓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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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북촌리 마을지, #북포천년, #이방익, #순이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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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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