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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붕어를 살 수 없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이들은 강아지를 사자고 조르고 또 졸랐지만 3명의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개 한 마리의 입양은 네 명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며칠간의 타협 끝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이들이 개를 포기했다.

그 대신 두 달 전에 샀던 금붕어 올리브가 외로울 거 같으니 금붕어 두 마리를 더 사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어항을 깨끗하게 닦고 어항 안에 장식될 조개와 돌들을 뽀득뽀득 씻어 예쁘게 장식했다. 그리고 새 물을 받았다. 드디어 올리브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두 명의 친구를 환영할 준비를 마쳤다.

과연 누구를 데려 올까. 올리브가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동네 수족관을 찾았다. 아이들은 수족관 안에 있는 물고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핑크빛이 도는 작은 물고기와 오렌지 빛에 검은 점이 잉크처럼 뿌려진 금붕어를 가리켰다.  

"아저씨, 이렇게 두 마리 살게요." 
"지금 집에 있는 탱크 물을 언제 갈아줬어요?"

"여기 오기 전이요."
"그럼, 오늘은 금붕어를 살 수 없어요. 3~4일 후에 다시 오세요."

"네?"


지금 물고기를 데려가면 새 물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게 아저씨의 답변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도 내뱉었다. 새 물보다는 오히려 올리브가 이미 똥 좀 싸 놓고 물을 삼켰다 내뱉어 누런 빛이 약간 보이는 물이 더 적응하기 쉽다는 말이었다.   
 
금붕어
 금붕어
ⓒ Hyeyoung J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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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촌구석 마을에서 나처럼 생긴 아시안 친구를 처음으로 만난 건 교회였다. 짧은 단발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그녀는 십 대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혹시나 한국 사람은 아닐까. 가슴 떨려가며 조심히 물어봤는데 홍콩에서 왔단다.

가까운 이웃을 만난 것처럼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바로 안아버렸다. 그녀의 이름은 제인이고 열네 살 된 아들은 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전화번호를 공유하고 짜장면이나 김치볶음밥, 버블티, 홍콩식 붕어빵을 먹으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말하지 않고도 신발을 벗어 집안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손으로 웨이브를 하며 인사하기보다 자동으로 고개가 먼저 숙여졌다. 나무젓가락으로 바닥에 달라붙은 사각 양파까지 싹싹 쓸어 먹고 빈 그릇을 내민다거나 웃을 때 입을 가리는 것까지. 

아시아라는 대륙에 살았던 우리에게는 대륙만큼 닮은 점도 상당히 컸다. '크크' 웃음을 토하며 같은 점을 찾아갈수록 이내 피할 수 없는 다른 점 또한 크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이상 밟고 싶지 않은 고향!'

제인의 목소리에 바윗 덩어리 하나가 훅 붙었다 쿵 떨어졌다. 2019년, 4월. 홍콩 정부가 범죄 용의자들을 중국 본토로 인도할 수 있는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을 도입하면서부터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영국의 홍콩 반환 이후 벌어진 최악의 폭력 사태는 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제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 가스를 마셨던 날. 하얀 연기로 눈물 콧물 터지고 있을 때 비처럼 쏟아졌던 고무 총알. 제인은 먹을 거리를 사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거리가 온통 붉은색으로 변했다고 했다. 

샘은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거리에서 두 명의 경찰이 샘의 가방을 뒤졌단다. 꼬투리 하나 털 게 없었던지. 그를 그냥 보내주었다. 다행이구나. 한숨을 내 쉬며 돌아서기가 무섭게 샘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였다. 

자기처럼 교복을 입은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경찰들은 나무 치우듯 시체를 도로 옆으로 걷어찼다. 침착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문을 외워가며 집의 현관문을 잠그고 나서야 '오늘은 살았구나.' 안도의 한 숨을 내 쉴 수 있었단다.

그날 이후 제인과 샘은 그 지옥 같은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고작 여행 가방 네 개 달랑 들고서. 마흔이 넘도록 열네 살이 되도록 사람과 자유가 같이 공유했던 고향이라는 추억도 같이 구겨 넣어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우리는 딱 삼일 후에 동네 수족관을 다시 찾았다. 핑크 빛 금붕어를 '핑키'라고 불렀고 검은 잉크 빛이 뿌려진 금붕어를 '빌리'라고 불렀다. 수족관 아저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물고기가 새 집을 갔는데... 바로 받은 수돗물에 적응을 못하고 죽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예 물고기를 팔 때면 탱크물이 며칠 되었는지 물어봐요." 

물고기에게도 삼일 또는 나흘이나 되는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제인과 샘은 태어나서 숨통을 틔우고 걸음마를 배우며 평화롭게 자랐던 고향을 갑작스레 떠나야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던 낯선 땅으로.

무작정 비행기 편도행을 끊고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여기 공기가 편안했을까.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해 줬을까. 적응하고 뭐고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변호사였던 제인은 닥치는 대로 돈 되는 일을 시작했고 샘은 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저는 학교에 다닐 수 있으니 행운아예요."

너무도 당연하게 눈을 뜨면 밥을 먹고 가방을 챙겨 학교를 가는 게 딸의 일상인 것을. 누군가에게는 푸른 잔디 위의 네 잎 클로버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보기 힘든. 아주 특별한 행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부산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면 양쪽 도로 중앙으로 우뚝 솟은 육교를 건너야 했다. 계단 위를 총총 올라가 서다 보면 차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육교 밑을 지나갔다. 

'독재타도'라는 어려운 글이 흘려진 푯말을 높이 들거나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다 떼창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빠가 내 손을 잡고 작은 상점으로 갔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쌍쌍바를 골라 두 동강이를 내고선 신나게 가게 문을 나서는데 아빠의 가슴과 머리 위로 아이스크림이 박스 채 올려져 있었다.

아빠 뒤를 쫓으며 육교를 향해 걸었다. 아빠는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시위하던 사람들에게 고맙다며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다음에 이 땅에 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려고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작업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작업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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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위한 사람다운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작업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히든 히어로로. 곳곳에서 빛도 없이 소리 없이. 그게 삼일이 걸릴 지 3년이나 30년, 평생에 걸릴지라도. 자유를 위한 투쟁은 사람이 살고 있는 한 현재 진행형일 테다. 내가 만난 홍콩친구, 제인과 샘에게서 배운다. 나 또한 행운아라는 걸. 

핑키와 빌리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싶다. 밥 주려고 다가가기만 해도 벌써부터 입을 물 밖으로 벌린 채 쩝쩝 거린다. 밥도 잘 먹고 똥도 기똥차게 길게도 싼다. 둘이서 줄다리기는 거뜬히 할 수 있겠다. 누런빛 어항은 점점 짙은 색으로 변해간다. 이제 물을 갈아 줄 때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중복게재


태그:#2019년 홍콩 이후, #자유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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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코트랜드에 살고있습니다. 평소 역사와 교육, 자연과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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