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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문자조형박물관 관장 늘빛 심응섭 작가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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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나라말과 글을 먼저 없이 하고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전파하여 자기 나라를 흥성케 하고자 하거나 나라를 보전하는 자는 백성의 지혜로움을 발달케 하고 단합을 공고케 한다."

윗글은 일찍이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한글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대목이다.

독일연방공화국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이취란트 무궁'은 한글 문자조항박물관 관장 늘빛 심응섭 작가가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해 제작한 휘호 자작시 서예작품이다. 그는 중국 북경에서, 한글을 말살하려던 일본에서 한글 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심응섭 작가는 "지금 다시 그 당시를 돌이켜봐도 눈물이 날 것처럼 감동이었다"며 "작품을 본 일본 서도가들이 '일본 문자로는 한글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8월 28일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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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응섭 작가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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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향이 이북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의 어린 시절은 힘듦 그 자체였어요.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시간이었죠. 저는 원래 황해도 해주 수양산 자락 청풍동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친께서는 공직에 계신 덕분에 지주층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지냈지요.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지주계급이라고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했거든요.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만행을 견디지 못해 먼저 월남하셨어요. 우리는 후에 어머니를 따라 연백 외가 근처 3.8선을 넘었고요. 참 파란만장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는 6.25전쟁이 나서 가족들과 숨어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다 1·4후퇴 당시 목선을 타고 연평도를 거쳐 서산에 정착했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참 고단했어요. 한국동란 격동기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나무꾼으로 지내면서 서산초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서령중학교에 겨우 진학했지만, 생활고로 그마저도 순탄치 않았답니다."

- 어린 나무꾼들이 많았다고 듣긴 했지만 관장님께서도 그런 생활을 했군요. 가정사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붓을 처음 잡으신 것도 궁금하고요.

"어머니가 광주리에 물건을 담아서 이고 도보 행상을 다닐 때 저는 틈틈이 나무를 해서 주말마다 읍내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보고 읍사무소에 근무하게 된 것은 천운이었어요. 당신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하시다 신학문을 하기 위해 연안 농업학교에서 수학하신 분이셨죠.

아버지는 젊은 날 백일장에서 장원하신 경험이 있어요. 붓글씨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서 동네 초상이 나면 만장을 손수 지어 써드리곤 했죠. 저는 그때 옆에서 붓장난을 쳤고요. 그것이 맨 처음 붓을 잡게 된 계기가 됐는데 가만 보면 아버지를 닮아 제가 글씨를 쓰는 것도 같아요. 참 감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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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빛 심응섭 작(서각-용비어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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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문자조형박물관 관장 늘빛 심응섭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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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글씨를 쓰고 계십니다. 글씨에 대한 맛을 느낀 때는 언제였을까요?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경필 시간이 있어서 이철경 선생의 교본으로 펜글씨를 처음 배우게 되면서 부터였어요. 그때부터 글씨에 대한 욕심이 커지더라고요. 고등학교는 공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당시는 1학년 때 붓글씨 수업이 있었어요. 일중 김충현 선생의 교본을 놓고 배우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끝나고도 연습 삼아 썼었죠. 글씨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대학에 진학해선 경제 사정으로 한 학기만 마치고 그해 11월,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 187기로 입교하게 됐습니다. 중학교 때 경필을 배운 덕에 차출시험에 합격하게 됐죠. 글씨 덕을 톡톡히 본 거예요.

전역을 앞둔 어느 날이었어요.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송곡 안규동 선생을 뵙게 됐어요. 어렵게 문하에서 한문 서예를 배우게 됐죠. 그러면서 글씨에 대한 또렷한 매력을 다시 한번 느꼈죠."
 
.(주최: 독립기념관, 후훤: 국가보훈처, 광복회, 충청남도)
▲ 늘빛 심응섭 글 새김돌 .(주최: 독립기념관, 후훤: 국가보훈처, 광복회, 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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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군데에 출품하여 입상하셨는데 몇 가지만 소개해주세요.

"얘기하기 전에 입문하면서부터 얘기를 들려드려야겠어요. 1966년 5월 '제3회 전남도전'에 입선하면서 서예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됐답니다. 제대 후에는 복학하여 방학 때마다 광주에 내려가 선생님 댁에 유숙하면서 15년이 넘도록 한문 서예를 배웠어요. 그런 와중에 한글 서예에 관심을 돌려 한글 서예공부를 하기 시작했고요.

자주 청계천 헌책방에 드나들었어요. 몇 날을 뒤져가며 한글 글씨본 여러 권을 어렵게 구입하기도 했고요. 그날은 공부가 어찌나 즐겁던지 밤새는 줄 모르고 책을 펴놓고 글씨를 썼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제1회 전국 대학미전' 한글 궁체를 출품하여 입선했답니다.

상을 받으면서 더 열심히 한글서예연구에 매진하게 됐어요. 대학시절에는 서예동아리 건국서도회 창립회원으로 들어갔어요. 이 모임에는 제가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원로 회원이기도 해요(웃음).

또 순천향대학교 개교 때부터 서예동아리인 '천향연묵회'를 발족하여 20년간 지도하며 한글서예의 소중함을 일깨웠어요. 참고로 천향연묵회는 대한민국 유일한 한글서예 동아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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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문자조형박물관에서 체험학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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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서령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어요.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것인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입시 학원에 근무하다 중학교 모교 은사님이신 임중호 교장 선생님의 요청으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새내기 교사로 서령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서예동아리를 만들어 지도하게 됐었죠.

제자로서는 현재 미술대전 초대작가인 이명환(순천향대학교 대우교수) 교수가 활동하고 있고, 김금란·송국범·정석훈 등 많은 인연을 맺게 됐어요. 서예 불모지였던 서산에 씨를 뿌린 것이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서산 서도회도 만들고, 문화 예술인연합회도 참여하여 미술협조직과 초대 한국예총회장을 역임하면서 안견미술제를 태동시켜 운영하게 된 것도 보람 있고요."

- 한글 사랑이 유별나신데 '한글이 나라의 힘이다'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어떤 연유이신가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소중한 세계적 문화 가치인 '한글 창제'지요.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류라는 말조차 없을 것이고, 세계인들에게 주목받는 존재감이나 자긍심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우선 역사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첫째는 중국문화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고유민족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과거 일본 강점에서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압제를 이겨내고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거지요.

셋째는 현대에 와서 한글 문자 활용이 가장 빠르고 편리한 의사소통의 도구 아니겠어요. 오늘날 개인휴대통신 등 IT 산업의 주역이 되고 있는 것이 한글이고, 넷째로는 그 실용적 가치뿐만 아니라 디자인적 예술성을 지닌 문자 예술의 무궁무진한 자원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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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문자조형박물관(예산 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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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글 문자조형박물관을 예산에 세워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산에서 활동하시다 예산에 설립한 이유가 있는자요?

"예산은 서예의 본고장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그렇고, 자암 선생이 그렇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전각예술의 거장인 고석봉 선생이 예산 출신이고요. 특히 추사고택이 예산에 자리 잡고 있어서 현대서예작가로 스승의 인물들이 태어난 곳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보여 주고 싶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운영하는 박물관은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후학들에게 한글 문자의 진면모를 보여 주고, 나라 사랑의 힘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였어요. 여건이 주어진다면 소장된 작품들을 서산시에 기증해야겠다는 생각도 늘 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작품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회가 있었다면?

"한글 홍보 대사로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제 첫 번째 꿈은 서법의 종주국인 중국 심장부에서 한글서예의 예술성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 꿈이 이뤄진 게 1999년도였어요. 제가 초대되어 북경에서 한글 서예전을 열게 됐지요. 저의 첫 시집 <무엇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가> 출판 기념회도 함께 했고요. 대단한 호평을 받았지요.

그게 계기가 되어 다음 해에는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 초대로 한글 서예전을 진행됐죠. 우리 한글을 말살하려던 일본의 역사적 흉계가 있었기 때문에 본때를 보여 준 통쾌한 기분이었죠(웃음).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서도가들이 '일본 문자로는 한글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했거든요. 정말 가슴 찡하지 않으세요.

그 정보를 보고 독일 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에서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 휘호 부탁과 함께 전시 부탁이 온 거죠. 제가 제작하여 보낸 '도이취란트 무궁'이란 자작시 서예작품은 독일연방공화국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그 작품은 태통령궁에 소장되는 영광을 안게 됐답니다.

다음 해에는 베를린 주독한국대사관 한국문화홍보원 예악당에서 다시 전시하게 됐는 데 특히 교민들의 환호성은 대단했었죠.

2003년 시월 한글날을 기해 러시아 모스크바 한국 문화홍보원 초청으로 전시를 마치고 한 달 후, 주한 한국대사관 신축 개청식에 초대되어 외교사절 수백 명이 초청된 자리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선을 보이게 됐던 거죠."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일찍이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은 '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나라말과 글을 먼저 없이 하고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전파하여 자기 나라를 흥성케 하고자 하거나 나라를 보전하는 자는 백성의 지혜로움을 발달케 하고 단합을 공고케 한다'라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거울삼아 외래어나 신조어가 판을 치는 이때,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한글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하며,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한글 문자예술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한글문자조형박물관, #늘빛심응섭관장, #아름다운한글, #독일대통령궁소장, #한글이나라의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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