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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가 가까워 올수록 그 이후 삶에 관해서도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된다. 반 평생 일만 하며 살았는데 실컷 놀아야지 뭔 일을 하냐며 큰소리치던 기세는 점점 쭈그러 들었다. 

휴가에 며칠 놀아보니 예전과 다르게 덧정이 없다. 몇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앉아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글은 엉덩이에게 나온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다. 당장 엉덩이가 아픈데 이걸 매일 한다고?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비어있는 고향 시골집 수리해서 보금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꿈처럼 반복된다. 책도 읽다가 텃밭 일구며 두루두루 사는 2도 5촌의 삶을 자꾸 그려보게 된다.  
 
카페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신간서적도 살 수 있다.
▲ 게스트하우스 1층에 마련된 카페 카페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신간서적도 살 수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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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꿈꿔왔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소설 속 서점이 딱이라는 확신이 돌처럼 단단해진다. 쥐꼬리만큼 있는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돈 벌 생각보다는, 있는 돈 안 까먹고 지키면서 심심함 달래줄 얘기 손님 서너 명 있고, 하루하루가 행복한 곳이면 되니까.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휴가철의 달력을 보고 있으려니 텅 빈 내 일정의 초라함에 견주어 빡빡하게 짜인 공유 일정에 괜한 박탈감이 들었다. 하루라도 어디 다녀올까. 숙소를 검색해 보니 원하는 날짜는 예약이 꽉 찼다. 바다 빼고, 계곡 빼고 나니 남는 곳이 내륙의 첩첩한 산중인데 그것도 웬만큼 입소문 난 곳은 자리가 없었다.
 
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어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1층 카페 내부 모습 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어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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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눈에 들어온 곳이 안동 풍경 호스텔 앤 라이브러리. 블로그 후기 등 여기저기 살펴보니 좋은 얘기들이 많았다. 이런 곳에 내 자리가 남아 있다는 건 내가 갈 수밖에 없다는 필연 때문이겠지.

확신도 잠시 수면에 민감한 내가 겨우 몸이 들어가는 좁은 공간에 기숙사 같은 이층 침대에서 하룻밤 잘 생각을 하니 망설여진다. 한 시간이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는데. 그곳에서 묵어야 이유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져도 집에 돌아갈 걱정 안 하는 게 내 여행의 첫 번째 조건이다. 게다가 그곳은 'in library' 아닌가. 내가 딱 꿈꾸는 공간. 한 번 가보자. 젊은 사람들처럼 게스트하우스 체험도 하고 말이지.
  
한나절 봉정사에서 멍 때리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숙소가 목적지인 여행은 처음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물은 인터넷에서 봤던지라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코딱지만 한 숙소에 가방을 놓고 털썩 앉은 침대가 삐걱 하며 첫인사를 건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카페로 내려갔다. 커피 두 잔을 들고 빈 자리를 찾았다. 
 
다양한 모습의 고양이들이 책 읽는 옆에 스스럼 없이 와서 놀고, 잠을 잔다.
▲ 카페내 곳곳을 어슬렁 거리는 고양이들 다양한 모습의 고양이들이 책 읽는 옆에 스스럼 없이 와서 놀고, 잠을 잔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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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풍경에서는 분명 비어있는 듯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풍경 속에 녹아든 사람들이 하나 둘 다 각자의 모습으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이층에 올라 겨우 빈자리를 잡고 내려다보니 의자는 좀 불편해도 꽤 괜찮았다. 여기서 엊그제 산 김훈의 '하얼빈'을 다 읽을 생각을 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 자꾸 집중을 흐트러 뜨리는 귀여운 훼방꾼들이 나타났다.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능숙하게 내 옆자리에 날름 올라 앉았다. 그리고 졸린 듯 스스럼없이 잠이 든다. 내 손이 닿아도 모르는 척한다.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번에 뒷자리에 올라앉고, 다른 녀석은 창가 쪽 좁은 틈새에 보금자리로 들어가서 포즈를 취한다. 쓰담 쓰담하다가 사진도 찍고, 몇 글자 보다가 다시 쳐다보게 된다. 
서너 시간 책을 읽다 고양이를 보다 다시 카페 풍경을 내려다 보길 반복했다.

창밖 풍경은 별거 없고 안은 얘기 소리도 없이 음악만 들릴 뿐 잔잔하다. 가끔씩 사람이 오갈 뿐이다. 커페이면서 도서관처럼 오히려 조용조용하게 속삭이게 된다. 아래쪽에 편한 소파 자리가 나서 자릴 옮겼더니 거기로도 다른 고양이가 찾아와서 또 옆자리에 앉는다. 각자 맡은 영역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것처럼 능숙하다. 
 
빈 듯 보여도 곳곳에 책 읽는 사람들이 숨은 그림찾기처럼 풍경속에 녹아들어 있다.
▲ 카페 내부 빈 듯 보여도 곳곳에 책 읽는 사람들이 숨은 그림찾기처럼 풍경속에 녹아들어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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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먹으러 잠시 나갔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삶에서 TV를 지우고 독서를 즐기라'는 주인장의 배려가 무색하게 선반에 놓인 몇몇 책들은 제목만 눈으로 스캔하곤 아이패드로 드라마를 기어이 보고 말았다. 영상매체의 중독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층에서 뒤척이는 소리에 아래층에서 깨고, 다시 아래층 소리에 이층이 깨는 악순환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좀체 잘 들기 어려워 잠을 잔 듯, 한 잠도 못 잔 듯 힘들게 아침을 맞았다. 
 
깔금하게 정리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임을 계단에 붙은 방명록을 보면 알 수 있다.
▲ 숙소 올라가는 계단에 붙은 방명록들 깔금하게 정리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임을 계단에 붙은 방명록을 보면 알 수 있다.
ⓒ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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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하게 차려진 간편 조식이 불편한 잠자리로 쌓인 불만을 해소해 주며 내 여행의 두 번째 조건을 만족시켜주었다. 삐걱이는 침대와 옆 방의 문 닫는 소리가 큰 것만 빼면 북스테이라는 테마에 맞는 필요 충분한 조건들은 다 갖춘 곳이었다.

내가 꿈꾸는 꿈속에 잠시 들어갔다 온 듯한 숙소 여행이었다.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간 듯 욕망의 풍선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제주도 중문의 소리소문(小里小文), 강원도 속초의 숲&책, 충북 제천의 안녕, 책.  나도 진즉 이름은 지어 놨다. '인생비~책(冊)'. 자꾸 꿈속에 들어가다 보면 꿈이 현실이 될 때가 있겠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렸습니다.


태그:#북카페, #게스트하우스, #안동 풍경 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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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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