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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지난 2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 열린 '복지국가실천연대 간담회 - 청년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만나다'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지난 2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 열린 "복지국가실천연대 간담회 - 청년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만나다"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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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은 그 어느 대선보다 20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대의 정치 참여가 늘어나면서 이 세대가 새로운 부동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20대의 높아진 정치참여와 정치권의 이 세대에 대한 관심은 이전 선거와 다른 양상을 띤다. 한때는 나이가 투표율을 대변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만큼 젊은 층의 투표율은 저조했다. 이런 변화가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대개 지금 세대가 겪는 불평등을 지적하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여당 대선후보의 말대로 기성세대는 젊은 시절 더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의 세대는 그런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불평등을 주제로 20대의 정치 참여가 늘었다는 분석은 표면적으로 옳지만, 이 분석은 어디까지나 정치를 '자원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의 한계는 정치를 경제적인 이익의 문제로 한정시키고, 정치가 갖는 정서의 영역을 무시한 것이다. 정치는 '자원의 재분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20대의 높아진 정치 참여를 이 세대가 정치적으로 변했다고 본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정치적'으로 변한다는 것의 의미다.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적대'라고 말했다. 싸울 적이 있어야 우리는 정치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기성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정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명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공산주의라는 적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 독재라는 적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적은 모호하다. 신자유주의의 논리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있는 나태함, 무능력 등이 적이 되었고, 심지어는 함께 경쟁해야 하는 동료가 적이 되고, 다른 성별이 적이 되었다. 이 분석은 20대가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20대들에게는 적이 될 수 없는 상대가 적이 되어버리니 '공정'한 게임으로 경쟁으로 인한 죄책감과 성취감을 정당화하려는 기제가 작동한다. 우리 주변의 이웃이 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정을 없애기 위해 '공정'이라는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다. 과정이 공정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결과는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전선의 형성과정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의 전선 형성은 항상 경제적 논리에 갇혀 있었고, 투표는 자기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환상을 만들었다. 결국 20대의 높아진 정치참여는 자기 이익을 대표하려는 새로운 게임으로 나타났다. 20대의 새로운 적대는 능력주의의 환상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공정'을 가장 큰 가치로 내세우고 정치를 게임처럼 승부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신지예 전 서울시장 후보처럼 자신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뛰어넘어 자신의 전선을 지키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도 여전히 정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전선이자 게임이다. 

우리가 정체성 정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남성, 여성, 노동자, 기업가 등의 정체성은 분명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토론장을 만들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다만 그 정체성이 경제적 이익으로만 연결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의 의미를 너무나 쉽게 돈으로 생각한다. 정치를 '자원의 재분배'라는 낡은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자원에는 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인정과 명예의 문제가 뒤섞여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이 인정과 명예를 너무 등한시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을 적대로 설명하는 관점이 중요한 것은 이 정치참여가 적대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우리가 명예와 존중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의 정의를 말했을 때 그가 분배해야 한다는 것은 부가 아니라 명예였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명예를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예를 받아야 하는 기준은 공동체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느냐가 기준이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에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발전소 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발전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전력 사무직 노동자보다 우리 공동체에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인가?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낮은 기여를 한 것인가? 지금 우리가 이를 양으로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존중을 먼저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명예와 존중이라는 자원의 재분배를 통한 새로운 전선 형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의 존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들에게 돈을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바꾸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되지 못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농업과 어업은 지금 많은 부분을 이주노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어느 대선 후보도, 어느 언론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지금 시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먼저 우리의 적이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애초에 민주주의는 공적 가치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서 시작되었다. 부의 재분배는 이 인정과 존중이 완성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은 누구인가. 자기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투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적이다. 

태그:#대선, #20대, #투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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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이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졌으면 합니다. 익숙함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때 비로소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이방인이 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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