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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 한성의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1840년대 한성의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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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백제, 조선,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면 1300년이 넘는 '수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1000년 안팎의 거대 도시인 '메트로폴리탄'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몇 없다. 아테네, 로마, 마드리드, 이스탄불, 런던, 파리, 상하이 정도다. 이들 도시는 제각기 나름의 특색 있는 모습과 도시경관을 유지하고 있고, 지역마다 문화정체성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하려고 여행을 하고 친구를 사귄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역사도시 중 하나인 서울은 현재 자신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곳이 거의 없다. 공항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동안 보이는 것은 현대식 건물과 도로뿐이다. 천년 이상 된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겨우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과 인사동의 뒷골목, 북촌의 한옥 밀집지구 정도, 그리고 경복궁 서쪽의 한옥마을 '서촌'이다.

사대부와 민중이 어울려 살던 곳, 서촌

한양 도성 내 각 지역은 권력 있는 집안의 대저택과 토지, 동일직종을 가진 관직자 계층의 집단 거주지가 되면서 서로 구별되는 지역적인 특색이나 생활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반 사대부 계층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고 상공업의 발달, 신분제의 동요 등으로 사회분화가 진행되는 18세기 무렵에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어디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의 신분과 가문, 직업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에 따라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 이치와 비슷할 것이다.

예를 들면 북악산 밑 북촌에는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도가들이 거주하였다. 자하문 부근 장동 일대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안동 김씨 집안의 김창흡이 대표적이다. 그는 서촌 일대에 넓은 토지와 대저택을 소유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겸재 정선은 그 집안의 화가였다. 남산 아래 남촌에는 남인(南人)을 비롯하여 소론(少論) 등 몰락한 양반가문이나 무반(武班) 등이 거주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몰락한 양반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후기 서촌의 모습
 조선 시대 후기 서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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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히 알아보면, 조선 시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서촌'은 역관 등 조선의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북촌과 남촌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청계천은 일반 주거지가 아닌 도성에서 대표적인 상업 지역이자 유흥가였다.

북촌과 남촌이 양반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면, 청계천 지역은 시정상인이나 중인, 하급군인 등 중하층 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인 소위 여항(閭巷)이었다. 여항이란, 비권력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서울의 인구증가와 도시 상업의 발달로 인하여 생겨난 중하층민들의 생활영역이다. 양반들이 거주하는 북촌이나 남촌과 같은 양반층의 거주지역과는 구분되는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계천 주변 지역에도 상류의 우대, 장통교와 수표교 어름의 중촌, 효경교 이하 왕십리 일대의 아랫대로 세분되었으며, 각각은 서로 직역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서로 구별되는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오랜 역사의 진정한 정주민의 생활 모습을 간직한 곳은 오히려 '서촌'이다. 사대문 안의 한옥 1400여 채 가운데 300여 채가 서촌에 남아 있는 데다 이 지역 한옥은 북촌과는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서촌에는 북촌처럼 거주형 한옥만 존재하지 않다. 사대부와 일반 민중의 다양한 공간구조의 한옥과 집들과 어울려 있으며 다양한 민속, 즉 사람살이가 존재한다. 그 예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유무형적 형태가 존재하는데 무당집, 이름을 지어주는 철학원, 전통시장(통인시장), 도심 속 사찰, 그리고 오랜 명분을 이어오고 있는 작은 한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 골목, 고샅길

조선 시대 서울은 유교적인 이상도시의 기준에 따라 설계된 계획도시였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는 종묘(宗廟)가,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이 배치되었으며, 궁궐 앞 대로(大路)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 등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고, 동서의 종로와 남북대로 좌우측(창덕궁에서 종로, 종각에서 남대문)에는 시전 행랑(육의전)들이 자리 잡았다. 육의전이란 여섯 가지 주요 판매품인데 비단, 포목, 면주, 종이, 삼배, 어물이었으나 반드시 여섯 가지는 아니고 더 다양하게 변하였다. 이들은 소위 허가를 받고 일정금액을 국가로 세금을 내고 사업을 했던 상인들이다. 종로에 1980년대까지 비단과 포목상점이 남아있었다.

한양도성 주변을 둘러싼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 타락산 네 산 아래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거전용지역으로서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북악산 밑 북촌(北村), 목멱산 밑은 남촌(南村), 동쪽 타락산 밑은 동촌(東村), 서소문 부근은 서촌(西村), 청계천 주변 장통교와 수표교 일대는 중촌(中村)이라고 불렀다. 특히 서촌은 중인들이 모여 살아 대체로 북촌보다 한옥 한 채가 차지하는 필지가 작은 편이고, 겉으로는 한옥의 결구 구조가 소박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내부는 한옥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고샅길로 불리는 좁고 긴 골목은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풍수사상의 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너비 2~3m밖에 안 되는 거미줄 같은 골목은 옛 도시 조직의 모세혈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정겹다. 즉 마을의 골목인 '고샅길'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통의 모습과 대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통을 그대로 전승하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지만 현재의 모습대로 생활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샅길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다. 오늘날 문명과 도로는 우리에게 직선만을 강요한다. 새마을사업 이래로 정겨운 곡선 골목 고샅길은 폭력적인 직선으로 변해 버렸다. 한번쯤 쉬어가고 뒤를 돌아보는 곡선의 미학이 사람을 여유롭게 한다는 것을 서촌의 골목이 알려준다.


서촌 한옥의 특색

서촌 일대의 한옥은 규모가 매우 작은 한옥이며, 'ㅁ'자 구조와 'ㄷ'자 구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서까래나 대들보의 형태와 규모는 왜소하며 기타 부재(部材)의 사용과 부재의 결구방식도 격조 있는 한옥의 모습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조선 초기나 중기의 큰 한옥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되었다. 중기 이후는 북촌과 아울러 서울 도성 안에 많은 관리들이 집을 지어야 하지만 북촌과 서촌 일대의 대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평수의 집을 약식으로 짓고 본가는 자신의 출생지인 향리에 번듯하게 지어놓고 필요할 때 귀향하였기 때문에 서촌 일대의 한옥은 왜소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현재 서촌 일대의 한옥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단 한옥, 소위 집장사 한옥이 대부분이다. 당시는 부재인 소나무의 고갈로 인해 전통 결구방식으로 집을 건축할 때 건축비가 상당히 소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으로 인해 비슷한 규모의 한옥이 집단적, 획일적으로 대량으로 지어진다. 또한 한옥으로 집단주거지가 계획되기도 했다. 즉 서촌 일대의 한옥은 격조와 규모는 떨어지지만 우리나라 주택사의 한 과정, 즉 서민적, 경량화, 상업적 획일화된 한옥의 한 시대를 상징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후 전통 한옥은 점점 퇴락의 길로 갔으나 서촌 일대는 이러한 말기적 한옥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행랑채는 방을 들이면서 벽돌담으로 변했고, 낮은 담장은 벽돌로 높아졌고 기와지붕은 슬레이트(slate)로 변했지만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한옥이 다수 존재한다.

서촌의 한옥은 비워지고 있었다. 비워져가는 한옥을 사람들이 살게 하고 그 속에서 생활의 주제가 되고 풍습이 전승되길 간절히 바랐고 노력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돌아왔지만 천박한 자본과 함께 돌아와 기존 정주민을 내보내고 있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대신 서촌에 남아 있는 골목을 느리게 걸어보는 '길 박물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옥과 골목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어울려 사는 사람이 있는 곳이 서촌이다.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김홍도作
사람들이 모여 술과 시로 인생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곳이다. 실력이 있어도 세상으로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저항(위항, 여항)의 시를 썼을 것이다. 어찌보면 서촌에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이 들어선 것도 이런 전통이 아닐까.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김홍도作 사람들이 모여 술과 시로 인생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곳이다. 실력이 있어도 세상으로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저항(위항, 여항)의 시를 썼을 것이다. 어찌보면 서촌에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이 들어선 것도 이런 전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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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위항문학의 현장 '송석원'

서촌은 문화와 역사를 품고 있는 보물 창고다. '중인은 의학·천문학·지리학 등을 전공한 전문성 강한 전방위 지식인'이라며 '풍류를 즐기는 시문학 동인 등 문화공동체를 형성해 활약했으며, 바로 그들의 터전이 인왕산 일대'이다. 옥인동 47번지는 이런 문화공동체 가운데 하나인 '송석원 시사'(시 동인) 즉, 문인들이 주로 모이던 곳이다.

송석원(松石園)은 서인·중인 출신의 위항인(委巷人)들이 모여 살던 서촌(西村:지금의 인왕산 밑 옥인동 일대)의 소나무 숲 사이로 계류가 흐르는 곳에 도인 천수경이 정원을 짓고 살면서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을 걸고 불우한 시인들과 어울려 술과 시로 소요자적(逍遙自適) 하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 출입하던 시인들을 송석원 시사 시인이라 일컬었으며, 후일에 흥선대원군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 한다.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란 바위 글씨가 남아있었는데 현재는 빌라 건설공사로 콘크리트 밑으로 사라졌으나 발굴해보면 출토될 것으로 믿는다. 필자도 찾아보려 많은 노력을 했으나 아직 찾지 못했다.

조선 시대 진경산수와 겸재 정선

2017년은 겸재가 운명한 지 258주년이 되는 해이다. 미술계와 국립박물관은 2009년 겸재 타계 25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했으나 겸재의 주생활 무대였던 서촌 일대는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겸재는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겸재가 서촌의 인곡정사에서 기거하며 인왕제색도, 청풍계 같은 서촌의 경관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겸재는 우리의 산천을 직접 다니며 우리 시각으로 그린 진경산수의 명작을 여러 점 남겼는데, 특히 72세에 완성한 '금강내산(金剛內山)'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암봉을 마치 한 떨기 흰 연꽃송이처럼 화폭에 담아내 진경산수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정선은 기이한 산천의 모습이나 안개 낀 풍경 등 머릿속으로만 상상한 경치를 그린 관념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眞景) 산수화를 완성했다. "정선에 와서야 우리 산수화가 개벽되었다"라는 같은 시대 화가 조영석의 표현처럼, 그는 조선 300년 산수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천재 화가다.

현재 서촌의 신교동은 겸재의 집인 인곡정사터가 존재하며 인왕제색도를 그린 자리는 서촌의 경복 고등학교 자리이다. 또한 청풍계는 지금의 청운동이다. 이 일대 역시도 서촌에 포함된다. 현재 이곳은 고층 건물이 비교적 없어 겸재가 그렸던 인왕제색도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문명교류의 현장

조선 시대 중인은 의학·천문학·지리학 등을 전공한 전문성 강한 전 방위 지식인이었다. 그중 서촌에는 역관이 상당수 기거했다. 역관은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7살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출신성분은 서자였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성적과 업적을 내어도 고위직으로는 승진할 수 없었다.

자연히 송석원의 위항문학자들과 어울렸고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였다. 역관들이 중국에서 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새로운 서적을 기다리는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이 서촌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계급들이다. 이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이 읽고 논하고 쓰고 그리는 일상의 활동은 조선의 문명담론을 이끌어나갔다. 연암 형제들도 서촌에서 구입한 서학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현재 21세기는 문명담론의 시대이다. 혹자는 문명 간 충돌을 말하기도 하지만 문명은 끊임없이 교류하며 발전한다. 서촌은 근세조선의 문명교류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여 술과 시로 인생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곳이다. 실력이 있어도 세상으로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저항(위항, 여항)의 시를 썼을 것이다. 어찌보면 서촌에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이 들어선 것도 이런 전통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황평우님은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서촌, #역사기행, #골목길,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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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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