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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IA 문양(위 왼쪽)과 국정원의 과거(가운데) 및 현재(오른쪽)의 문양. 새 엠블럼에는 CIA 문양의 16방위 나침반을 본뜬 8방위 나침반을 없애고 태극문양을 넣었다.
 미국 CIA 문양(위 왼쪽)과 국정원의 과거(가운데) 및 현재(오른쪽)의 문양. 새 엠블럼에는 CIA 문양의 16방위 나침반을 본뜬 8방위 나침반을 없애고 태극문양을 넣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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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소리 없이' 원훈(院訓)과 문장(紋章.엠블럼)을 바꾸었다. 국정원은 2016년 6월 10일 창립 55주년을 계기로 원훈과 엠블럼을 교체했다고 13일 밝혔다.

4대(代)째인 새 원훈은 '소리 없는 獻身(헌신), 오직 대한민국 守護(수호)와 榮光(영광)을 위하여'다. 여기서 '소리 없는 헌신'은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국정원 직원의 다짐을,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국정원의 사명을 각각 나타내는 것이라고 국정원은 설명했다.

국정원은 또 1998년에 도입한 문장(엠블럼)도 18년 만에 교체했다. 새 엠블럼은 태극 문양 안에 횃불이 위치했으며 그 주변을 청룡과 백호가 감싸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태극과 횃불은 국정원의 숙명과 의지를, 청룡과 백호는 국정원의 소임을 각각 형상화한 것이라고 국정원은 밝혔다. 나침반을 없애고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하는 태극문양을 넣고 주변에 청룡과 백호를 넣은 것이다. 기존 엠블럼은 나침반 모양 안에 횃불을 넣어 '대국민 정보 서비스 기관'으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된 형태였다.

국정원은 누리집에서 역대 원훈(院訓)과 부훈(部訓)을 소개하고 있다. 역대 부훈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지만 낯익은 부훈은 '우리는 陰地(음지)에서 일하고 陽地(양지)를 指向(지향)한다'이다(당시만 해도 한자로 표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부훈은 1961년 9월(중앙정보부)부터 1998년 4월(국가안전기획부)까지 무려 36년 이상 '최장수'를 누렸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이 부훈에 대해 "언제나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국익을 위해 일하면서 그 활동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헌신해야 하는 정보요원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JP의 만시지탄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알다시피 이 부훈은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만든 것이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한국형 CIA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1958년 육본 정보국 행정과장 시절부터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1961년 8월 31일 서울 중앙정보부 남산청사를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화를 나누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1961년 8월 31일 서울 중앙정보부 남산청사를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화를 나누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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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정보부 부훈(部訓)을 지었다. 미국 CIA 표어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모토다. 나는 정보기관이 무엇을 하고 어떤 곳인지를 간결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든 부훈이 이것이다.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 중앙정보부는 근대화 혁명의 숨은 일꾼이어야 한다. 정보부원은 자꾸 나타나려고 하면 안 된다. 숨어서 정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성과여야 한다.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좋다. 우리가 만든 정보를 국정 책임자가 사용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 그런 원칙과 철학을 담았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 한국판 CIA의 출범, 중앙일보, 2015. 4. 3)

그러나 김종필이 부훈에 담은 원칙과 철학은 그의 바람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법을 만들어 최고회의에서 입법 취지를 설명할 때 "수사권은 혁명정부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갖는 겁니다. 민간정부가 정식 출범한 뒤엔 수사권은 법무부 수사국에 환원시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사권은 한시적'이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63년 12월 군사정부가 민정으로 이양했지만, 반혁명으로부터 혁명을 보위하기 위해 만든 정보부는 수사권을 유지했다. 정보와 정보기관을 사용하는 통치권자가 독재(장수)한 만큼 '악행'도 만연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은 50여 년이 지나서야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 부훈석은 현재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 보존돼 있다.

"그 후 후임 부장들 일부는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때로는 월권과 남용으로 국민의 지탄과 원성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수사권을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나는 정보부 창설자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같은글)

DJ가 부훈석 제막식에서 역정 낸 까닭과 MB의 부훈석 치우기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까지 36년 넘게 '음지'에서 미행-감시하고 도·감청했던 대표적 표적 정치인은 김대중이었다. 그 김대중이 국가정보기관의 최종 사용권자인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일본에서 백주대낮에 중정 요원들에 납치되어 수장될 뻔하고, 남산 지하조사실에서 내란음모죄로 조사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은 '음지'라는 말을 싫어했다. 김대중은 마지막 안기부장이자 초대 국정원장인 이종찬에게 "음지란 정보기관의 음산한 배후를 가리키는 것 같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이종찬 전 원장은 부원들의 여론을 조사하고, 정보이론의 대가인 셔먼 켄트(Sherman Kent)의 "정보란 지식이다"라는 정의를 원용해 "정보는 곧 국력이다"라고 부훈을 정했다. 김대중은 최종 결재 단계에서 '곧'을 빼고 "정보는 국력이다"고 고쳐 재가했다.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2대 원훈은 1998년 5월(국가안전기획부)부터 2008년 10월(국가정보원)까지 10년 동안 유지되었다. 국정원은 이 원훈에 대해 "무한경쟁 시대인 21세기를 대비하는 상황에서 국가발전의 원동력인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김대중은 '情報(정보)는 國力(국력)이다'라는 휘호를 써주면서 특별히 부훈석 글씨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김대중은 이후 1998년 5월 12일 국정원(당시는 안기부)을 처음 방문했다. 김대중은 직원들에게 "과거 불행했던 안기부 역사의 표본은 바로 나입니다"라면서 "내가 당했던 일을 안기부가 다시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김대중은 훈시에서 직원들에게 몇 가지 지침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는 '명실상부한 정보기관으로 자리매김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부 명칭과 부훈이 잘 바뀌었다"면서 "'정보는 국력이다!' 이말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여기에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훈시를 마치자 부훈석 제막식 행사가 진행됐다(1999년 1월 국정원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원훈석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부훈석 주변을 돌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라고 쓴 작은 글씨를 발견하곤 역정을 냈다. 이종찬 전 원장은 당황했다. 즉시 직원들을 시켜 그 부분을 갈아서 지워버렸다. 이종찬 전 원장은 자신의 회고록(<숲은고요하지 않다 2>, 442쪽)에서 "김 대통령은 이런 좋은 부훈이 나중에 자신이 썼다는 사실 때문에 치워질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에 가장 먼저 손댄 일이 이 부훈석을 치워버리는 것이었다"고 썼다.

CIA 문양은 1950년 이후 66년 동안 안 바뀌어

역대 부훈석과 원훈석.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의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指向한다’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한 뒤에는 ‘정보는 국력이다’(1999. 1~2008. 10)와 ‘自由와 眞理를 향한 無名의 헌신’(2008. 10~2016. 6)을 거쳐 현재의 새 원훈석을 제막했다.
 역대 부훈석과 원훈석.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의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指向한다’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한 뒤에는 ‘정보는 국력이다’(1999. 1~2008. 10)와 ‘自由와 眞理를 향한 無名의 헌신’(2008. 10~2016. 6)을 거쳐 현재의 새 원훈석을 제막했다.
ⓒ 국가정보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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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에 새로 제정한 국가정보원의 3대(代) 원훈(2008년 10월~2016. 6월)은 '自由(자유)와 眞理(진리)를 향한 無名(무명)의 헌신'이다(그런데 다른 세 단어는 한자로 표기하면서 '헌신'만 한글로 표기한 것도 이상하지만, 국정원 홈페이지에서 원훈을 소개한 메뉴를 보면 '院訓'을 '元勳'으로 잘못 표기해놓고 있다(2016년 3월 31일 검색결과).

국정원은 이 원훈에 담긴 키워드에 대해 상당히 거창한 의미를 부여했다. 각각의 단어들은 ▲ 간첩·이적사범 등 자유민주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은 물론 테러·산업스파이·국제범죄·사이버해킹 등 모든 안보 위해 요소로부터 대한민국을 굳건히 수호하겠다(자유) ▲ 정치적중립을 확고히 지켜나가면서 오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판단함으로써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고 진실된 정보만을 제공하겠다(진리) ▲ 공(功)을 드러내지 못하고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할 지라도 국가를 위해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명예롭게 생각하고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겠다(무명) ▲ 항상 자신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해 국가 번영과 국민 안전에 기여하겠다(헌신)는 다짐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해설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 국정원은 국익을 위해 '악역'을 수행하는 곳이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은 아니다. 인터넷 댓글이나 달면서 선거에 개입한 것이 과연 '정치적 중립을 확고히 지켜나가면서 오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판단'한 것이라는 말인가? 오죽하면 이종찬 전 원장이 "정보가 무엇인지 모르는 문외한들"이라고 한탄하면서 "국정원이 자유와 진리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려면 원의 명칭도 '자유진리탐구원'으로 바꿔야 마땅하지 않을까?" 라고 반문했을까 싶다.

초대 김종필 부장이 증언한 것처럼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CIA를 모델로 만들었다. 영문 약칭도 KCIA였다. CIA는 9.11테러 이후 국가정보총괄 책임자, 즉 중앙정보장(DCI) 자리를 신설된 국가정보국장(DNI)에 넘기는 수모를 겪었다. 그렇다고 해서 CIA가 환골탈태의 각오로 엠블럼을 바꾸었다는 얘기는 없다.

지금도 버지니아주 랭글리 CIA 본부의 구(舊)본관 로비 바닥에 있는 대머리 독수리와 방패, 그리고 16방위 나침반 별로 구성된, 지름 16피트짜리의 거대한 화강암 문양은 1950년 2월 17일 이래로 변함없이 CIA의 상징이 되어 왔다. CIA 누리집에는 "이 문양은 CIA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물의 하나로 그동안 수많은 상업영화와 다큐 제작물에 등장해왔다"고 자부심을 표하고 있다.

CIA 문양의 독수리는 미국의 국조(國鳥)로서 힘과 경계를, 방패는 국가 방어를 상징한다. 그리고 16방위 나침반 별은 전세계에서 수집된 정보를 중앙으로 집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정원의 8방위 나침반 문양은 CIA를 본뜬 것으로 '대국민 정보 서비스 기관'으로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국정원은 '걱정원'이라 불릴만큼 국민의 걱정이 큰데, 나침반을 없앴으니 방향을 잃고 더 헤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1월 중앙정부 부처 및 소속기관의 문양(로고)을 태극문양으로 단일하게 통합하는 사업으로 75억 원을 배정한 바 있다. 국정원은 상징문양을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수 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경제가 안 좋으니 명목상 국민총생산이라도 늘리려고 문양을 바꾼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가정보기관은 5년짜리 정권의 전유물도 아니고 수시로 CI(기업의 이미지를 통합하는 작업)를 바꾸는 사기업은 더더욱 아니다. 문양을 바꾼다고 간첩이 더 잡힐 리는 없고, 오히려 자수하려는 간첩이 국정원을 찾기가 헷갈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태그:#국정원, #걱정원, #이병호, #원훈,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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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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