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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의무경찰로 군 복무를 했다. 22년 전 중앙경찰학교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나이 기백으로 입대를 하지만 훈련을 받고 군대라는 맛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조금은 편한 보직을 받기를 원하고 조금은 '헐렁한' 부대로 가기를 바란다. 내가 자대 배치를 받을 때도 그랬다. 제발 데모 막는 기동대만큼은 안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실제로 불침번 시간에 달 보고 빌었다. 하지만 발령받은 부대는 내가 입대 전 다니던 대학교 옆에 있는 기동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식 미소를 지을 만큼 우습지만 그때는 빨간 모자를 쓴 조교가 그렇게 무서웠다. 온갖 쌍욕을 하고 협박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했다. 일주일간 하는 일이라곤 그 공포를 느끼고 선임들의 조롱과 무시를 견디는 것이었다. 그중에 제일 힘든 건 '면벽 수행'이었다. 아무 하는 일없이 각이 잡혀 있는 모포 앞에 관물대를 보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멍하니 있는 것이었다.

발이 저리고 허리도 아프지만 조교는 조금의 미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냥 그 조교가 시키는 대로 멍하니 땀 흘리며 그렇게 며칠을 면벽 수행을 했다.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비참했다. 하루 이틀 지날수록 내가 멍청한 개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명예라는 이름을 한 모욕, '명예퇴직'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모트롤이 명예퇴직을 거부했던 한 사무직 직원에 대해 지난해 말에 사물함만 바라보도록 하는 자리를 배치해 반인권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모트롤이 명예퇴직을 거부했던 한 사무직 직원에 대해 지난해 말에 사물함만 바라보도록 하는 자리를 배치해 반인권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금속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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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산모트롤이란 회사가 명예퇴직을 거부한 직원에게 수개월간 '면벽 책상 배치'를 한 사실과 사진이 기사화됐다(관련기사: 충격적인 이 사진 "명퇴 거부자를 원숭이처럼"). 40대 후반의 그 직원이 명퇴를 거절하자 회사는 곧바로 그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이후 회사는 해당 직원의 자리를 동료 선후배가 멀리서 보이는 사무실 구석에 사물함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배치를 했다. 그리고 1시간의 점심시간과 두 차례의 15분의 휴식을 제외하고 7시간 30분 동안 책상에서 대기하게 했다.

10분 이상 자리를 비우려면 팀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졸아선 안 되고 전화통화도 안 되고 컴퓨터 사용도 금지되었다. 책도 읽지 못하게 했다. 20대 초반의 군대 신병이 자대 배치 전 하는 훈련이 면벽 수행이었다. 하지만 그 회사는 40대 후반의 한 가정의 가장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모욕을 강요했다. 그런 모멸감을 견뎌가며 그를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부당한 회사의 지시에 대한 저항이었을까? 가족이었을까? 아마도 후자였으리라.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에서 방영된 알바 여고생편의 한 장명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에서 방영된 알바 여고생편의 한 장명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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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방송된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부녀의 사연이 화제다. 공기업인 코레일에서 명예퇴직한 50대의 아빠와 아르바이트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고생의 사연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딸이 보기에는 한심하고 술만 마시는 아빠였지만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아빠는 매일 새벽 인력사무소를 나가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집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인력사무소를 나갈 때 그는 코레일 마크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었다. 비록 자신을 버린 회사지만 코레일은 그에게 자부심이었다. 명예퇴직을 당한 가장의 현실과 50대의 나이는 일용직도 구하기 힘든 우리 사회 현실을 그 프로그램은 보여주었다. 어느 날 모처럼 일을 나가 받은 9만 원의 일당으로 구박만 하는 딸의 3만 원짜리 운동화를 사서 딸아이의 방 앞에 놓고 멍하니 서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 살아가기 참 힘이 든다고 말한다. 공무원이나 몇몇 기업의 노동자를 제외하고 정년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자리는 많지 않다. 수많은 기업이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그 가장들을 일터에서 몰아내고 있다. 명예퇴직이란 정년에 도달하지 않는 근로자들에게 자발적 의사에 따라 규정상의 퇴직금 이외에 추가 보상을 지급하고 근로계약을 종료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사회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존엄이나 품위라는 뜻의 '명예'는 40대 50대 가장들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가 되었다.

'노가다' 전전하는 가장 마음, 두산 회장님은 알까

법과 기준을 떠나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도 없이 면벽 수행으로 40대 후반의 직원에게 '자발적 퇴사'를 강요하던 그 회사는 얼마 전 국내 재벌 기업 중 최초로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3월 2일 열린 이사회에서 조카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그룹 총수 자리를 물려주었다. 박정원 회장은 올해 54세로 창업주의 직계 장손이다. 그는 23세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오비맥주 상무, 두산 관리 본부 전무, 두산산업개발 부회장, 두산건설 부회장, 두산건설 회장과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거쳐 2012년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 올라섰다. 그리고 54세의 나이에 마침내 두산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박정원 회장이 앞으로 해야 할 일로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계열사의 정상화, 신규 사업인 연료전지 사업 활성화 등 장기 성장 동력 확보 등을 꼽았다.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40대 50대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은 산처럼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살아가지만 일터에서는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퇴출 당하고 있다. 54세에 그룹 총수가 된 그는 과연 명예퇴직의 의미와 명예퇴직의 무서움을 알고 있을까? 그것이 진짜 알고 싶다.


태그:#명예퇴직, #두산모트롤, #박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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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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