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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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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애가 들어왔어."

처음 바둑학원에 발을 들이던 날을 기억한다. 수십 개의 바둑판에서 나는 진한 나무 향기와 침묵을 깨는 '탁,탁' 거리는 경쾌한 바둑알 소리. 집에서 어느 정도 바둑을 배우고 8살에 학원에 들어간 나는 첫 날 학원에서 당시 '영재'라 불리던 8급의 7살 아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원장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빠른 속도로 급수를 높여갔다.

내가 4급이 되던 날, 원장 선생님은 학원의 옆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동안 컴퓨터로 바둑을 둘 때나 종종 들어갔던 그곳의 다른 방에는 중고등학생, 성인 형들이 늘어선 바둑판 앞에 앉아 고심하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이 방으로 이제 옮길 때가 되었다며 그렇게 본격적인 바둑을 제안했다. 그 본격적이라는 것은 프로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 단이라도 따는 것이었지만, 당시 내게 '고수'였던 사람들이 고심하는 그 방의 무거움이란.

결국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2급을 따고 학원을 그만 두었다. 패배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 쯤 되었을 때 나는 원래 있던 방에서는 그 누구도 가볍게 이길 수 있었지만 형들이 있는 방에서는 좀처럼 1승을 따기도 어려웠다. 무참한 패배를 당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하수'였던 형조차 나와의 승부는 가벼운 표정으로 임했다. 이제 이쪽 방의 최약체는 나였다.

바둑에서 패배를 당하는 일은, 나라는 인간의 단점과 마주하는 일이다. 너무 급해서, 욕심이 앞서서, 하나밖에 볼 줄 몰라서... 내가 열심히 준비한 묘수가 가볍게 간파당하고, 안심했던 나의 세력이 넘어가는 것을 보는 일은 당시 어린 내게는 너무 잔인했고,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렇게 나는 유창혁 9단의 책을 선물로 안은 채 학원을 그만두었다.

"인간의 패배가 아니라 이세돌의 패배입니다."

이세돌 9단(왼쪽)이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알파고와의 세번째 대국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세돌 9단(왼쪽)이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알파고와의 세번째 대국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구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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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알파고의 4:1 승리로 끝났다. 이세돌 9단은 승부가 결정된 제3국에서 패배한 뒤 '인간의 패배가 아니다'며 패배를 자신의 것으로 한정 지었다. 그 뒤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한 4국에서 승리를 거뒀고, 5국에서는 그간 패배했던 경기보다 더 팽팽했던 대국 끝에 1.5집 차이로 패했다. 마지막 경기에는 알파고가 처음으로 초읽기에 도입했고, 그간 수보다 훨씬 많은 280수까지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잘 모른다'며 4:1로 패배한 대결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왜 바둑이 인공지능의 성장을 판단할 수 있는 스포츠인지를 물었다.  바둑을 신격화할 생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바둑판에 인생이 담겨있다고 하며 나도 그 지점에 동의하지만, 인생이 담겨 있는 것은 바둑 뿐만은 아니다.

게임을 많이 해본 결과 게임 역시 인생의 축소판이며 다른 스포츠나 취미활동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다만 바둑이 인공지능과의 대결에서 유의미한 스포츠인 이유는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단순 수계산'을 벗어난 지점에서 인간을 이겼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성장

알파고는 천문학적인 수계산이 아니라 형세판단을 한다
 알파고는 천문학적인 수계산이 아니라 형세판단을 한다
ⓒ youtube 동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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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계산기가 사람보다 계산을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알파고의 승리를 가볍게 치부하지만, 알파고는 단순히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라 수 계산을 하는 기계는 아니다. CPU를 2000개 가져다놔도 무한에 이르는 바둑의 가능성은 계산할 수 없다.

알파고의 등장은 그 계산기가 자신에게 입력되지 않은 수식까지 스스로 계산법을 찾아내 계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가 스스로 대국의 기보를 학습하여 가장 효율적인 수를 찾아낸 다는 것은 밥솥이 인간이 조리법을 입력하지 않아도 밥 재료에 따라 가장 맛있는 밥을 짓는 것에 가깝다.

확실히 알파고는 인간이 다루지 못한 지점을 다뤘다. 알파고의 몇몇 수는 이세돌 9단도, 해설을 하는 각국의 9단들도 예측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알파고의 제작자인 데이비스 허사비스 딥 마인드 CEO역시 알파고의 능력 전부를 이해하거나 예측하지 못한다.

그간 바둑 프로그램의 인공지능들은 형세판단이라는, 판에서 가장 주요한 지점을 찾는 행위를 전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알파고는 밥솥에 무슨 밥을 지어야 할지 정해주고, 계산기에게 무엇을 계산할지 지정해주는 것과 같이 '인간만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바둑의 '형세판단'을 세계 1위 수준의 바둑기사를 꺾을 수준으로 해낸 것이다.

이는 충분히 인공지능 포비아를 시작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허사비스가 더욱 더 알파고를 통해 인공지능에 대한 전 세계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이 이기는 것은)10년 뒤 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했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매섭게 성장하고 있다.

"내가 승리한 것이지 인간이 승리한 게 아냐"

4국에서의 승리 후, 인터넷에서는 이세돌 9단이 '내가 승리한 것이지 인간이 승리한 게 아냐'라고 말하는 농담이 떠돌았다. 이세돌 9단이 실제로 이야기한 발언도 아니고 '내가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게 아냐'라는 말을 이용한 단순 농담에 불과하지만, 결국 새로운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의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세돌 9단에게서 우리가 이 대결로부터 얻을 교훈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세돌 9단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건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승리를 장담했던 대국에서 연이어 패배를 당했고, 여전히 '바둑 세계 정상'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그 상태에서 무참히 패배했다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감정이 없고, 상대의 기세를 파악하지 못하며 1200개의 두뇌가 동시에 돌아가는 상대에 대한 비판으로 패배의 이유를 돌릴 수도 있었다. 대국 도중 일각에서는 대결 자체가 사기라는 주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은 패배 후에 끊임없이 알파고와의 기보를 연구하며 알파고의 약점을 찾았고, 자신이 해야 할 방법을 연구했다. 패배에 무릎 꿇거나 패배로부터 도망가며 정신 승리하는 대신 깔끔하게 패배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허히 알파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4국과 5국에서는 프로 9단들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수를 두었고, 한 경기는 승리했다. 세계 최강에게 그 지점을 인정하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다. 인간이 2500년 간 연구해 내놓은 정석, 자신의 기술을 버리고 아예 새로운 지점에 도전하는 일은 패배를 내면화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세상의 입구에 있다. 그간의 지식들과 사고방식이 모두 뒤바뀌는, 수십억이 일자리를 잃고 감정이 없는 로봇들이 우리의 일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상과 곧 마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알파고의 등장이 당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긴것을 선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시작됬다는 것이 결국 우리가 이번 대국을 통해 얻어야 할 사실이다. 그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세돌 9단의 도전처럼 다시 새롭게 우리의 세상을 짜고 연구해 대처하는 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구를 지배하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인터스텔라 포스터 한 부분
 인터스텔라 포스터 한 부분
ⓒ 파라마운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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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둑 실력은 지금은 아마 7급 정도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패배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2급에 이르러 패배를 거듭하던 내게 원장 선생님은 "너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패배를 마주할, 내 단점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도망쳤다. 학원을 그만두고도 죄스런 마음에 1년간은 학원 앞을 제대로 지나지도 못했다.

4국에서 이세돌 9단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평해지는 78수를 두고 사람들이 그 비법을 묻자 이세돌은 "그냥 그 수가 보였을 뿐"이라고 답했다. 바둑에서 최적의 수는 끝까지 고민하면 단 하나만 남아 찾아온다. 오로지 그 수만 보인다. 실제로 이세돌 9단은 78수를 위해 20분을 고민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시작한 4국에서 기나긴 고민 끝에 명확한, 단 하나만의 정답을 찾은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남긴 최고의 문장은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였다. 이번의 새로운 인공지능과 인류의 대결 하나로 디스토피아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 인류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이는 패배를 통한 반성과 고민, 최적의 수를 위한 끝없는 고민 끝에 나온 해답만이 해결할 수 있다.

최근 대국에 자극을 받아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판에서 나는 짙은 나무 향,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계.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한 수 한 수의 과정. 그 안에는 상대의 성격과 내게 보내는 메시지와 기세, 인생이 담겨 있기에 돌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패배가 두려워 학원을 나왔지만 아직 나의 바둑은 끝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에게 졌지만 우리의 바둑은, 우리의 세계는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태그:#최효훈, #바둑, #이세돌, #알파고, #이세돌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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