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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 중반, 학교의 과방이나 동아리방에는 으레 기타 한 대쯤 있기 마련이었다. 그 옆에는 꼭 '메아리'라는 제목의 노래책도 한두 권쯤 놓여 있었다. 서울대 중앙동아리 메아리는 90년대 중후반까지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노래패였다. 2학년이 되어 수원 캠퍼스로 내려오니 '매김소리'가 있었다. 그 시절 메아리와 매김소리의 노래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소울 뮤직이었다. 나처럼 평범한 학생에게도 음악이 주는 힘이 이러했으니, 재능과 소질을 갖고 음악을 했던 사람에게 끼친 영향은 어땠으랴.

농대를 졸업했지만 평생 문화운동의 길을 걸어온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무슨 과에 다니냐'고 누가 물으면 '서울대 메아리과'라고 답할 만큼 그는 노래패 활동에 열정을 바친 대학시절을 보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농대 노래패 매김소리가 결성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평생에 걸쳐 노래와 문화운동을 하는 데 삶을 바쳤다. 노래를찾는사람들(노찾사) 대표, 한국민족음악인협회(민음협) 사무총장, 부천시 문화정책 전문위원,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대학장,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장, 마포문화재단 대표, 성남문화재단 문화진흥국장 등 긴 이력사항은 자신이 선택한 외길 위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준다.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이른 봄의 훈풍이 불던 3월 초, 개강을 맞아 분주한 성공회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2월말 성남문화재단 문화진흥국장직을 사임한 그는 새학기부터 성공회대에서 '문화예술교육' 강의를 맡게 됐다고 했다. 마침 이날이 강의 첫날이었다. 봄을 맞은 캠퍼스는 젊은 학생들의 활기로 가득했고, 커피잔을 놓고 마주앉은 야외 벤치에는 따스한 햇살이 내렸다.

지난 3월 초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가진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와의 인터뷰
 지난 3월 초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가진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와의 인터뷰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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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대를 진학한 이유는 단순했어요. 집이 가난하니까 사립대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아버지가 병환으로 오래 누워계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일해서 학비를 벌면서 세상의 냉혹함을 경험하고는, 막연히 목장을 운영하는 평화로운 삶을 꿈꾸며 축산과에 진학했지요."

고등학교 때부터 성당 '문학의 밤'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를 따라,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메아리'에 가입을 했다. 군 제대 후 '성문밖교회'로 잘 알려진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 기타반과 합창반을 지도하며 노동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것도 노동운동을 하면서부터다. 주일 예배 시간에 노동자들이 부를 특송을 일주일에 하나씩 작곡했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다.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은 공장에 가기 전에 FT(Factory Training, 공활)의 일환으로 했다. 선배들의 전철을 밟아 공장 취업과 노동운동 투신을 마음먹은 것은 그 역시 당시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1984년에 노찾사 1집 음반이 나올 때 그는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2집은 한창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던 1988년에 녹음했는데, 이후 대중운동에 회의를 느낀 그는 노동현장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동료와 선후배들로부터 문화운동에 복귀 요청을 받아 1992년부터 노찾사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즈음 노찾사 사무국을 개편해 진보적인 대중가수 매니지먼트 회사인 (주)다음기획을 설립하고 초대 CEO로 취임했다. 널리 알려진 대중가수인 윤도현 밴드를 처음 데뷔 시킨 것도 그가 다음기획 대표를 맡고 있을 때였다.

문화운동 하겠다는 대학시절의 약속 평생 지켜

"복귀 제안을 받고 노찾사 대표를 맡아서 와보니까 예전에 같이 노동운동을 하던 선후배와 동기들이 어느 순간 다 '사'자가 되어 있더군요. CPA, 변호사, 노무사……. 이제 전문가 시대가 되었으니 노동운동도 지식인으로서 전문성을 살려서 해야 한다면서. 그때 든 생각이 '야, 나는 그동안 뭐했지? 나는 전문성 쌓은 것도 없고, 그동안 기름밥 먹은 것밖에 없는데…….' 그때 밀려오는 허무함이나 좌절감이 컸어요. 그 당시 나를 지탱해준 것이 '시다의 꿈'(박노해 시, 김보성 작곡) 같은 성문밖교회 시절 만들었던 몇몇 곡들이었죠."

김보성 교수는 문화예술 경영자 못지않게 작곡가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시다의 꿈', '대결', '끝나지 않은 노래' 등 노래패 노동 가요집에는 그가 만든 곡들이 많이 실려 있다. 박노해 시인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시에 곡을 붙인 '시다의 꿈'은 성문밖교회에 다니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곡이다. 교회의 노동자 기타반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로 근처 봉제공장의 미싱사들과 시다들이었다. '내가 이들의 주제곡을 만들어주리라'는 마음으로 작곡한 노래가 '시다의 꿈'이다.

번개 같은 영감을 받아 20분 만에 쓴 곡도 있다. 인천의 작은 공장에 박판 용접공으로 취직했을 때였다. 무려 48시간의 철야 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따라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자취방은 냉골이었다. 번개탄으로 연탄불을 피워놓고 손 비비면서 기타를 튕기고 앉아 있는데 순간 악상이 확 지나가더란다. 그렇게 20분 만에 '대결'(박노해 시, 김보성 작곡)이라는 곡이 나왔다.

"노찾사 4집에 수록된 '끝나지 않은 노래'(김보성 작사, 작곡)는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우리나라의 대중운동도 쇠퇴하던 1992년쯤에 쓴 곡이에요. 모든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의 문제다, 우리가 아직 황무지에 피어나는 새싹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라는 취지의 노랫말을 썼죠. 이 곡은 이후 노래패들의 상징적인 주제곡 같은 역할을 했어요. (유튜브를 검색하면 노찾사 출신의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등이 함께 부른 버전을 들어볼 수 있다.) 대학시절 이후로 나는 문화운동을 평생의 업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아직도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키고 있는 셈이죠."

다음기획이 출범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대표로서 자신의 역할이 '돈 구하러 다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문화운동을 하고 싶었던 자신이 사업을 잘하는 CEO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태춘·박은옥 매니저를 했던 김영준씨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고 나왔다. 현 다음기획 CEO는 가수 윤도현이다.

"그러고 나서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의 분과 단체인 민음협(한국민족음악인협회) 사무총장을 맡아 일했죠. 그곳에서 문화판의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만났어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강준일 선생님,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이건용 선생, 한국 음악의 새로운 계보를 만든 노동은 교수, 대금연주자 김철호 선생 등 우리나라 음악계의 중요한 분들이 다 민음협 이사로 계셨어요. 그분들을 만나면서 음악을 포함한 예술을 보는 눈을 틔우고, 예술과 운동이 어떻게 만나야 되는지를 배웠죠."

'시다의 꿈', '끝나지 않은 노래' 작곡자

1997년에는 문화기획자인 강준혁 문화다움 이사장과 함께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를 설립하고 한국적인 문화예술 경영자, 문화기획인을 양성하는 아카데미 코스를 만들었다. 1년짜리 코스였는데, 당대 최고라고 자부할 만한 커리큘럼이었다. 전통예술, 인문학, 예술사, 문화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2년 가까이 1주일마다 1박2일 스터디를 하면서 개발한 내용이었다. 다움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축제 조직과 문화예술 단체에 포진해 있다.

"다움 아카데미 과정의 성과가 알려지고 이름이 나기 시작하니까, 몇 년 사이에 수도권에 40여 개의 예술경영대학원들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다움 아카데미 운영이 어려워졌지요. 어렵게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2000년에 추계예술대에 예술경영대학원을 만들고 2004년에는 성공회대에도 문화대학원을 만들어서 제가 1기생으로 입학했어요. 대학 전공이 축산학과밖에 없는데, 계속 문화기획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필요하겠다 싶어서. 50대 초반이 되어서야 석사를 한 거죠."

기존의 문화운동이 야당 쪽 정치권과 연계되면서 제도권에 대한 비판을 못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온 이들이 만든 '문화연대'에 창립멤버로 참여하기도 했다. 민음협 일을 하고 있을 무렵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만났던 선배의 추천으로 부천시 문화정책 전문위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98년경. 그때만 해도 운동을 하다가 제도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한민국은 미국처럼 기부금 제도가 발달해서 민간 펀드를 만들기 쉬운 나라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유럽처럼 문화를 사회적 공공재로 인식해서 국가가 책임져주는 풍토도 아니고. 문화운동 하기가 너무 어려운 거죠. 재정이 빈약한 상태에서 맨 땅에 헤딩하듯 정말 열심히 했지만, 문화운동이 현실 사회를 바꾸는 동력으로서 기능을 전혀 못했다는 것이 저의 큰 고민이었어요. 마침 원혜영 시장이 문화에 대해 생각과 안목이 있는 사람이고, 제도권에 들어가 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어요. 그렇게 부천에서 '문화도시 부천' 프로젝트를 하게 됐지요."

부천에서의 경험은 이후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원혜영 당시 부천시장은 외부 전문가를 시정에 제대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자체 단체장이었다. '문화도시 부천' 프로젝트는 지금도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성공한 사업이다. 지역 축제인 복사골 예술제, 국제판타스틱 필름페스티벌,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대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만화 축제 등 행사의 틀을 만들고 사업화시키는 일이 그의 담당이었다. 2000년대 초에 출범한 부천문화재단은 지자체가 설립한 문화재단으로는 전국 최초였고, 그 부천문화재단 설립을 제안하고 만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 후에 경기도 산하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대학 학장으로 가서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했어요. 돌아보면 부천에서 5년, 경기문화재단에서 5년, 도합 10년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죠. 그때는 정말 재미있게 일했어요. 단체장들이 문화에 대한 확실한 안목과 여유가 있어서 조급해하지 않는 거예요. 당시 원혜영 부천시장이나 특히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서울대 연극반 출신이어서 '문화 딴따라'에 대한 이해가 있었죠. 단기간에 성과를 내라고 사람을 쪼지 않았고, 내가 일하면서 단 한 건의 인사 청탁도, 간섭도 없었어요."

지자체의 문화정책, 단체장의 안목과 호흡이 중요

지난 3월 3일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가진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와의 인터뷰
 지난 3월 3일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가진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와의 인터뷰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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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재직하던 당시 경기문화재단의 활동 수준은 아직까지도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조직인 기전문화대학은 학교가 아니라 경기도의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지원 사업을 하는 기관이었다. 독자적인 조직과 독립적인 사업 예산이 배정되었고, 학장인 그가 전권을 갖고 경기도의 문화예술정책과 사업을 시행한 유일무이한 사례다. 지금도 기초나 광역의 문화예술지원센터가 독자적인 예산과 사업 영역을 확보하고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국 최초의 군부대 문화예술교육도 당시 경기도에서 시작되었다. 방과 후 교실에서 배우는 예능교육이 학교 문화예술 교육의 대부분이었던 당시, 기전문화대학은 인문학 교육을 비롯해 생각과 감수성을 자극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각 학교에 보급했다. 그것을 교과 내 수업으로 만들어서 양평의 조현초등학교에서 교육했던 것도 전국 최초의 기록이다. 

"그 다음에는 옥천에서 '향수 30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모단스쿨'의 교장을 맡아 주민교육프로그램을 개발했어요. 주민자치 도서관인 배바우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고, 70년대의 쇠락한 유원지를 리모델링해서 주말 방문객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했지요. 내용도 훌륭하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는데, 군수가 바뀌니까 모든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가더군요."

김두관 지사가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에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김 지사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도지사직을 사임한 뒤, 홍준표 지사가 들어오면서 산하 기관을 통폐합시킨 것이다. 조직이 없어지니까 기관장 자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년 반 일하는 동안 제일 기억나는 것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 eBook 콘텐츠를 출품했던 일이에요. 우리가 참가했던 2012년에 벌써 시작한 지 25년 된 유명 박람회였는데, 그동안 한국이 공식 참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25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부스가 세워진 거죠. 현지에 있는 삼성전자의 도움을 받아서 기기 세팅하고, 한국 동화로 만든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메이션 등도 가져갔어요. e북 콘텐츠 수출을 하려는 작업이었어요. 콜롬비아 경찰청에 한국어 교재를 납품하는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조직이 없어지는 바람에 무산됐지요."

출퇴근 투쟁을 할까 말까 하고 있는데, 마포문화재단에서 대표이사를 구한다고 연락이 왔다. 인디밴드로 대표되는 홍대 문화권. 한번 일해보고 싶었던 곳이라 쾌히 승낙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지자체와의 호흡이 문제였다. 구청장이 임기 마지막 3선 째를 맞으면서 기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에는 재량껏 하던 일들에 대해 담당공무원이 O, X를 치기 시작했다. 몇 번 시정을 건의했지만, 뜻이 통하지 않아서 결국 사표를 쓰고 나왔다. 3개월 후 인연을 맺은 곳이 성남문화재단 문화진흥국장 자리였다.

공연장이 아니라 시민참여형 생활문화의 장이 필요

"고양, 의정부, 성남의 경우 기초 지자체 공연시설 치고는 시설이 과하게 지어졌는데,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도 1800석짜리 대규모 공연장이에요. 성남문화재단은 전체 250억 예산의 대부분이 공연장 예산으로 쓰여요. 내가 맡은 문화진흥국 예산은 전체의 10%도 안 되었어요. 이재명 시장은 성남을 '생활문화수도'로 만들겠다고 했지만, 성남문화재단 대표는 국립오페라단 출신이셔서 좋은 예술 작품을 공연하고자 하는 의지가 크셨죠. 나랑은 생각이 달라서 내 활동이 억제가 많이 되고, 심지어 대외 활동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뒷방 늙은이처럼 앉아가지고 클릭, 결제만 하고 월급을 받아먹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는 말했다. 국장 세 명을 보좌하는 비서가 따로 있었고 연봉도 높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대우만 잘 받으면 뭐 하느냐'는 회의가 들었다.

"나는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니까 과감하게 사표를 냈죠. 국민의 세금으로 고액연봉 받으면서, 목숨만 부지하는 월급쟁이로 살아남을 이유가 없으니까."

기초 지자체의 공연장은 유럽처럼 시민예술극장 체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전문 공연은 최소화하고, 지역 주민들의 문화 놀이터나 발표회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생활 문화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과거 문예회관 시대에서 이제는 지역문화재단 위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지역문화재단에 최적화된 CEO고요. 그런데 아직도 정책을 만들고 운용할 사람이 아니라 공연장 위주로, 시설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요. 시대의 흐름은 바뀌고 있는데 아직 구시대의 구조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과도기죠. 나는 내 원칙과 소신에 의해 움직이는 건데, 왜 자꾸 옮겨 다니느냐는 힐난조로 바라보는 시선도 사실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위험한 인물인 거죠. 그게 세상의 편견이에요."

하지만 그의 뜻을 이해하고 지지를 보내주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같이 일했던 동료나 후배들 중에는 지금도 연락을 보내오고, '기회가 되면 함께 일하고 싶다'고 부탁해오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큰 힘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현역으로 뛸 수 있는 나이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는 있어요. 제도권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이 성과를 내려면 3~4년은 해야 결과가 나오거든요. 한두 해 만에 그만두게 되면 뭘 해보지도 못하고 중단되는 셈이죠.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해보고, 좋은 성과를 내고 싶어요. 그런 기회가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

그동안 백수가 되는 것을 한 번도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어떤 곳을 그만둘 때마다 또다시 새로운 일과 기회가 생기곤 했으니까.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자신의 근황과 문화정책에 대한 생각을 담은 그의 글이 자주 올라온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하고, 수많은 댓글이 달린다. 올해 스무 살이 되는 둘째 아들이 소아암으로 4년째 투병 중인데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담담한 그의 눈빛은 투명하기만 하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삶에 대한 지혜로운 충고들은 결국 모두 한 가지 이야기로 통한다. '가슴 뛰는 삶을 살라'는 것. 이날 햇볕 내리쬐는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내가 만난 이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 삶의 중심을 자기 안에 가지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 노동운동을 했던 8년을 빼고는 평생 문화운동 영역에서 일한 세월이 30년. 그만한 경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열정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또 있으리라.

이날 첫 강의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는 취지의 짧은 몇 마디 말만 하고 나왔다고 했다. 먹고살기 위한 직장을 찾지 말고, 본인이 정말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택하라고 했다고. 그것이 진짜 자기의 삶을 사는 길이니까. 다만 그 선택이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더 좋다는 말만 덧붙였단다.

"나는 '나를 따르라' 하는 권위주의적 리더가 아니라, 전문적인 역량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최적의 협력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호탕하게 술 마시고 어울리는 건 못하지만, 정작 일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역할을 주면 되니까요."

"21세기형 조직은 목적 공동체인 동시에 이익 공동체여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동일한 관점을 갖는 것이 인간관계의 최고의 경지'라고 고 신영복 교수도 말한 적이 있다. 구성원들이 함께 이루고자 하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이익도 실현할 수 있는 조직. 그것이 21세기에 지속가능한 조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것이 안 되면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하므로. 문화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 공공재로서의 가치에 동의하는 구성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과정에서 부도 실현할 수 있는 일. 그가 요즘 찾고 고민하고 있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보성, #노찾사, #시다의꿈, #끝나지않은노래, #문화예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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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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