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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일은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된 지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함의가 있다.

이명박 정권 이후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라고 강조한 이 선언이 4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도 현실적 함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올해 3.1 민주구국선언 40주년을 맞이하여 3.1 민주구국선언의 성격과 역사적·현실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은 무엇이었나?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당시 모습.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당시 모습.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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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배경과 성격을 살펴보자.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대화 노선의 여러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영역에서 본격화되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전 등이 그 당시 저항의 흐름을 대표한다. 그런데 정치, 시민사회 영역 가릴 것 없이 고조되던 당시의 저항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사실상 멈춰버리게 된다.

10월 유신 당시 일본에 있었던 김대중은 망명하여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반 유신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유신 정권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그동안 움츠려 있던 국내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큰 자극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그해 10월 2일에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시위를 전개하였고, 12월 24일에는 '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가 결성되어 100만 서명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국내에서도 반 유신 운동이 가시화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신 정권은 1974년이 되자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등을 통해서 민주화 운동을 매우 억압적인 방식으로 억누르려고 하였다. 그리고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여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전쟁)이 종식되어 국내 안보위기론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5월에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정 요구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김대중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모색하던 장준하가 의문사하였다. 결국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제대로 이뤄지지도 못한 채 침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대중과 문익환은 1976년 3.1절을 앞두고 각각 선언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인이자 신학자였던 문익환은 성서 번역에 몰두하는 등 원래 정치사회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인 장준하의 의문사 뒤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정한 후 불굴의 민주화 투사로 변신하였다. 두 인물은 사전에 논의한 바가 없었지만 이심전심으로 각자 선언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일형, 이태영 등이 가교 역할을 하여 두 사람의 선언문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이에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이우정,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등이 공동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진행된 3.1절 57주년 기념미사에서 마무리 기도형식으로 이우정이 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것이 바로 3.1 민주구국선언이다.

이날 선언문 낭독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비화된 것은 정부가 강경 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3월 1일 선언문 낭독 외에 특별한 대중적 시위를 조직하지도 않았으며(사실 그 당시 상황상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선언 발표 이후 후속 행동을 논의하거나 계획한 것도 없다.

당시 정부는 이 선언을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여 공동서명자들과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준비한 천주교 관계자들을 조사하여 재판에 넘겼다. 만약 당시 정부가 가만히 두었으면 이 행동은 '3.1 민주구국선언'으로 끝났을 것인데, 강경 대응을 하여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된 것이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역사적 함의는?

당시 유신 정권이 강경 대응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이 선언문에는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비록 조건을 두기는 했지만 유신 정권의 퇴진 필요성까지 언급하는 등 전과 다른 매우 강도 높은 주장을 담고 있다. 그 이전 민주화 운동은 '개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선언문은 정도가 매우 강해진 셈이다.

정권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부담스러운 인사들이 이 선언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전직 대통령 및 전직 대통령 후보 등 정계 인사, 개신교 및 천주교 등 종교계, 학계 인사 등의 연합을 방치하면 정권에 큰 부담이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정부의 강경 대응 때문에 '사건'으로 비화된 이 선언의 파장은 컸다. 사건 관련자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민주화 인사들이었고 국제적인 지명도 및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여론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인권외교를 내세우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게 되자 유신 정권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재야' 세력의 질적 발전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재야' 세력은 민주화 운동 시기 지식인 및 운동가, 정치인 등 상층 엘리트 인사들이 조직한 정치적 전선체를 뜻하며 대체로 1969년에 조직된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그 모태로 본다. 그 뒤 1971년 4월에 결성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1974년 11월에 결성된 '민주회복 국민회의' 등으로 이어진다. 조직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당시 '재야'는 '민주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1 민주구국선언에서는 분단체제가 한국의 독재를 강화하는 구조적 원인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면서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1971년 7대 대선과정에서 김대중이 제기한 4대국 안전보장론과 3단계 통일론, 1972년경부터 본격화된 장준하의 통일 운동 등에서 나타난 시대정신이 이제 민주화 운동 세력 내에서 합의된 지향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1979년 3월에 재야 세력이 연합해서 발족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명칭에서부터 '민족통일'이 전면에 나오게 된다. 이처럼 1970년대 후반경부터 운동의 지향점으로써 '민주주의'와 '통일'을 동시에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제도권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이 재야 민주화 투사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 점도 역사적 의미가 크다. 김대중은 제도권 야당의 비타협적 정치인으로서 재야의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사회운동가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은 재야 세력과 긴밀한 인간적, 정치적 유대감을 형성하였다.

김대중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야당과 재야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의 전략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전략은 민주화 운동 과정과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당정치 전개 과정에서 매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선언문의 핵심 가치는 '민주주의'

이처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은 한국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면 이 사건이 4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생각해볼 수 있지만 선언문에 있는 다음의 내용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승공의 길, 민족 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이 선언문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민주주의'다. 선언문의 마지막 내용이 '민주주의 만세'일 정도로 이 선언문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국방(안보), 경제, 통일 등 국가 주요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기반 위에서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선언에서는 강조한다. 당시 권위주의 세력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국방(안보), 경제, 통일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것과 다르게 이 선언에서는 반공 대신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국제적 차원의 냉전이 해체되고 기존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한 이후로 '반공주의' 담론의 효용성은 점차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요즘은 '반공'이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제 '반공' 대신 반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대북 압박정책과 '종북' 담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담론 상의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이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할 때 민주주의 약화를 수반한다는 사실은 과거 냉전 시대와 유사하다.

류제승 국방정책실장과 토머스 밴달 주한 미 8군사령관이 7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이날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관련 군사적 대책안을 발표했다. 이날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공식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류제승 국방정책실장과 토머스 밴달 주한 미 8군사령관이 7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이날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관련 군사적 대책안을 발표했다. 이날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공식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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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제도 위기, 평화(안보)도 위기인 상황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 극심한 위기에 노출된 개인은 결국 국가주의와 같은 거대 주체에 대한 맹목적 의탁 심리를 갖게 된다. 필자는 보수화된 일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하여 이들이 보수화되는 원인을 분석하여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밝혔듯이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위기에 처한 개인들은 결국 국가주의와 같은 보수적 담론에 의탁하게 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이 빈곤층 보수화의 중요한 원인이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국가주의(혹은 민족주의)는 맹목적 집단주의 성향을 보이면서 궁극적으로 개인의 인권과 이익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 민주주의를 원리를 무시하거나 우회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다. 사실 민주주의 위기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선 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 상황은 좋지 못하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라고 한 40년 전의 외침은 지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결국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다. 이것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현재 우리 사회에 주는 현실적 함의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장신기 기자는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그:#3.1 민주구국선언, #민주주의, #김대중,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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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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