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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바다 성산포에서 바라본 제주의 바다와 성산항의 등대, 칼바람에 바닷가에 설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물리치고 제주의 바다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풍광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 김민수
일기예보를 볼 것도 없이 숙소를 나서자마자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칼바람이었다. 성산포바다 근처의 숙소에서 바라본 성산포엔 흰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긴 했지만, 그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불었기에 인증샷만 찍고 바람을 피할 만한 곳으로 가야했다. 또다시 숲으로 갈 것인지, 실내로 들어갈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서귀포쪽으로 가면 이곳보다는 바람이 덜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동백꽃 구경을 가자했다.
종달리바다 종달리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우도와 성산일출봉, 아침 햇살에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펼쳐진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도 갈매기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갈매기도 훨훨 날아가고 있는데 중무장을 한 나는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김민수
밤 사이 내린 눈이 아직도 해안가에 남아있다.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바위에 앉아 있고, 몇몇은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난다.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새들도 저렇게 날아다니는데 중무장한 우리들이 너무 나약한 것이 아닌가 싶어 많이 걷자고 했다.

"그래도 이곳은 아니야. 바람이 너무 세잖아."
"서귀포 쪽은 좀 낫지 않겠어. 동백에 수선화가 피었다는데 동백꽃을 보러가자고."

운전대를 잡은 나는 마음이 급해서 일주도로 대신 중산간도로를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중산간도로 곳곳이 빙판길이었고, 빙판길도 그늘진 곳 중간중간에 있어 오히려 위험했다. 돌고돌아 다시 일주도로를 타고 동백이 유명한 곳을 찾아갔다.
동백 피었던 동백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추위에 얼어터지고 피어나던 꽃망울은 잔뜩 움추러 들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떨어져도 슬픈데, 떨어지지도 못하고 얼어터진 동백은 더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 김민수
그러나 화사하게 피어난 동백은 볼 수 없었다. 한파로 피었던 동백들이 죄다 얼어터졌고, 그나마 떨어진 꽃들은 눈에 묻혀버렸고, 몽우리는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차라리 피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피었다 얼어터진 꽃은 너무도 슬펐다. 제 빛을 잃어버린 꽃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날 같았을 터인데 갑자기 추워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바보꽃이다시피한 진달래도 피었다 죄다 얼어버렸고,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도 누런 빛을 몸에 새기고 말라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서 이번 추위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사계리에서 점심을 먹고 걷고자 했으나 바람이 너무 세서 포기했고, 따뜻한 커피와 차로 몸을 녹인 후 형제섬이 보이는 바다를 걸었다. 그러나 결국 이십여 분만에 칼바람에 굴복했다.

숙소에 들어가 대화나 나누자며 돌아가는 길, 아쉬움이 남아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가다 온평리바다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검은 화산석과 하얀 눈과 바다를 닮은 하늘 때문이었다.

이미 일행 중에는 강추위에 감기몸살이 걸린 친구가 있었기에 그가 운전을 하고 나머지 일행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자했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고, 눈보라도 여전히 날렸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광이었기에 돌담이 끝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온평리 해안도로 온평리 해안도로에는 해풍을 막는 돌담이 쌓여있다. 돌 하나하나도 예술이지만 켜켜이 쌓아올린 화산석은 제주의 바다와 어우러지며 멋드러진 풍광을 보여준다. 거기에 하얀 눈이 쌓여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추운 바람이라도 폭설이라도 이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 김민수
온평리바다 온평리어촌계에서 관리하는 바다, 바다로 난 길 끝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저 길 끝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 아닐까? ⓒ 김민수
온평리 제주의 눈은 하늘에서 오는 것 같지 않았고, 제주의 눈은 위로부터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쌓였다. 세찬 바람에 쌓였던 눈은 날아갔지만, 여전히 검은 화산석에는 흰눈이 쌓여 있다. ⓒ 김민수
온평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다의 색깔은 화사하지 않았지만, 담담한 수채화처럼 그들만의 빛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 김민수
온평리바다 돌담과 억새와 저 멀리 등대와 하얀 눈, 이런 조합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칼바람과 눈보라에 온 몸은 꽁꽁 얼었지만, 그럴수록 내 삶의 아픔같은 것들은 무뎌졌다. 칼바람에 비하면 이 정도의 아픔 쯤이야, 이겨낼 수 있는 아픔이지. ⓒ 김민수
온평리바다 돌담과 하늘의 조화, 아마도 이런 풍광을 다시 만나려면 몇 년의 기다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니, 단 한 번 주어진 풍광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풍광은 없을 터이고, 단 한 번의 순간만 보여주었고, 나에게도 단 한 번만의 셔터만 허락했을 것이다. ⓒ 김민수
온평리바다 돌담과 흰눈과 하늘과 그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었다. 그 완벽한 날은 따스한 봄날 같은 날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날이라도 사실은 완벽한 날이 아닌가? ⓒ 김민수
제주도에서 6년을 살았던 적이 있지만, 그 시간 동안 이런 풍광은 종달리 해안가에서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눈이 와도 왠만해서는 평지나 해안가는 금방 녹기 때문에 눈이 쌓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짜릿한 쾌감, 왜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에 도전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만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만한 크기 정도의 삶의 아픔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으며,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소소한 기쁨은 그보다 더 큰 아픔을 이긴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온몸이 바닷바람에 꽁꽁얼어버렸다. 그래도 깊은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그곳에 있고 싶었다. 삼각대도 세울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오니 그나마 자동초점이 맞춰지는 시간까지는 그곳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 뿐이었다. 현실이 마음을 이겨버린 것이다.

제주도에 살았더라면, 내일 이곳에 또 올 수 있었더라면, 이런 풍광을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나는 굳이 그 바람과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곳에 서게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네 삶에서 '단 한 번의 순간'이 아닌 때가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삶을 대해야 하는 이유다. 제주의 돌담과 흰눈과 하늘과 바다는 완벽했다. 바람까지도.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19일, 걸으며 담았던 흔적들입니다.

태그:#제주도, #돌담, #동백, #온평리, #성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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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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