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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한지에 풀칠하던 모습을, 삼베에 곱게 염색물을 들이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손길이 지나가면, 누렇고 꼬깃꼬깃한 그림은 족자 안에서, 병풍 안에서, 액자 안에서 새로 태어났다. 철이 들면서, 풀을 쑤고, 천 염색을 하는 것은 아들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야무진 손맛이 느껴지는 표구를 만들던 어머니의 그 자리에 아들이 서 있다.

김산호씨가 병풍을 살펴보고 있다.
▲ 병풍을 보고 있는 김산호씨 김산호씨가 병풍을 살펴보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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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대째 표구사의 전통을 이어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태릉표구 화랑 김산호씨.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옛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건 아닐 것이다. 기본은 지키되, 오늘에 맞게 재구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배움, 연구가 필요할 터. 대학을 졸업하고도, 또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2학년 편입을 할 수도 있었지만, 1년 빨리 졸업하는 것보다 1년 동안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몸과 손이 배웠던 경험에 이론과 지식을 더한 김씨. 그가 말하는 표구는 어떤 것일까? 오늘에 맞게 표구를 현대화하고,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난 10월 말 찾아간 태릉표구 화랑은 인사동에서 좀 떨어진 중화역 1번 출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대료가 비싸다는 인사동에서 벗어나서인지, 빼곡하게 전시작품이 쌓여있는 인사동과는 달랐다. 햇살이 잘 들어는 큰 창을 두고 양 옆에 표구된 작품들이 감상하기 좋게 잘 전시되어 있었고, 가운데 너른 공간은 그대로 비워져 있었다. 동양화의 흰 여백처럼.

"표구는 패션이에요."

"표구란 한마디로 무엇이냐"고 묻자, 김씨는 이렇게 답했다. 옷을 잘 입혀야 사람의 인물이 돋보이는 것처럼, 표구도 작품의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무릎을 딱 치게 하는 명쾌한 대답.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 아시다시피, 표구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러면서 가지게 되는 표구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액자 유리 끼우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로 배접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세탁소 개념으로 다림질 잘 해 달라. 오염된 것을 빨래 좀 잘 해 달라. 이렇게 말씀하세요. 대부분 쉽게, 간단하게 생각해요. 쉽지 않은 작업, 어떨 땐 대단히 위험한 작업인 걸 모르시더라고요. 그럴 때는 좀 귀찮더라도 표구사 하시는 분들이 표구사는 화방, 액자 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 표구사가 화방, 액자 집하고 어떻게 다르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화방이나 액자 집에서 하는 작업은 작업 과정을 최소한 한 것이에요. 대신 가격이 떨어지죠.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해요. 그 대신 작품을 보존하는 보존성은 확 떨어지죠. 표구는 아무래도 여러 번 종이를 발라서 해야 하고, 좋은 종이를 써야 해요. 풀도 다르게 만들어서 사용하죠. 그래서 시간도 오래 걸려요. 제가 참여한 것 중에 오래 걸린 것에는 1년 넘게 걸린 것도 있어요. 나주 죽림사 괘불을 할 때. 중간에 참여했기 때문에 전 과정을 참여한 것은 아닌지만, 그 작품은 1년 넘게 했어요."

- 배접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1년은 너무 긴데요, 더 많은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나요?
"문화재는 훼손된 부분, 없는 부분을 하나하나씩 다 때워야 해요. 그래서 특히 비단 작품 같은 경우는 더 오래 걸려요. 유사한 조직을 찾아야하거든요. 비단이 없으면 다시 짜야하죠. 직조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옛날 느낌 나게 염색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염색도 화학염이 아니라 천연염을 해야겠죠. 훼손된 곳이 많은 문화재는 때우는 데에만 몇 달씩 걸려요. 문화재 복원은 최대한 전통 재료를 쓰고, 전통 기법을 써야하니 시간이 더 걸리는 거죠. 일반인들은 이런 과정을 잘 모르니까 빨리 빨리 해주세요. 이렇게 하는 것 같아요."

- 이러한 표구가 최근에는 많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표구문화가 쇠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아파트 중심의 문화가 표구문화의 쇠퇴에 영향을 끼쳤지요. 아무래도 표구는 동양적인 느낌이니까. 가구 구조와도 안 맞고. 그리고 가구별로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액자들도 많이 있고요. 한 번 만들고 나면 오래도록 보존되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비싼 가격도 영향을 끼쳤겠죠.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비싸다고 느낄 수가 있으니까요."

- 표구문화의 쇠퇴의 흐름 속에서 표구를 살리기 위한 어떤 방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것 찾기 운동'과 같은 것도 인식 개선운동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표구가 비싸다고 하지만, 다 수작업이거든요. 명품은 비싸도 사죠. 표구를 명품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니까 비싸다고 하는 거죠. 시민들의 인식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지 표구가 다시 발전할 수 있겠죠.

무조건 옛날 것만이 좋다고 하는 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대에 맞게 접목되어 약간씩 변화하면서 전통이 이어지는 것이죠. 현대적 감각이 접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작품에 따라 현대적인 느낌을 권하기도 해요. 디자인, 색상. 그리고 나무의 프레임 등으로 너무 과감하지 않게, 그렇지만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죠."

액자 나무의 모서리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 액자들 액자 나무의 모서리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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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나무의 모서리 테두리를 놓고 열정적 설명을 해주셨지만, 비전문가들의 눈으로는 아무래도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던 터라 결국 어떤 차이가 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무리 현대적인 느낌이 나도록 한다고 해서 팝아트처럼 할 수 없지 않느냐며, 머쓱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 족자, 병풍, 첩 등 표구 종류가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잘된 표구를 보는 팁을 주신다면?
"먼저 족자를 말씀드리면, 아무래도 '편편한 족자'가 잘 만들어진 족자겠죠. 그런데 열 프레스로 눌러서 편편한 것이 있고, 손으로 잘 만들어서 편편한 것이 있어요. 아무래도 손으로 만든 족자가 좋은 족자이겠죠. 열 프레스로 눌러서 만든 경우에는 작품이 망가질 수도 있거든요. 잘 보면 손으로 만든 족자는 육안으로 표시가 나요. 두드려서 편 흔적이 나타나거든요.

병풍은 글쎄요. 겉으로는 다 잘 하거든요. 겉만 화려하게 하고 속은 엉터리로 하는 경우가 있어요. 속은 뒤집어 볼 수 없으니까요. 제작할 때 속 재료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겠죠. 제작할 때 어려운 게 첩이나 족자, 두루마리에요. 액자나 병풍은 고정할 수 있는 틀이 있지만, 첩이나 족자는 종이를 붙여서 모양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니까요. 힘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첩은 역시 겉으로 봤을 때에는 판판하고 넘겼을 때 잘 넘겨지는 게 좋은 거예요."

- 표구 재료에 대해서도 좀 설명해주세요. 표구 장인들에게 재료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 풀 이야기를 하시던데요, 오래된 '풀'이 좋은 풀인가요?
"무조건 오래된 풀이라고 해서 좋은 게 아니고, 목적에 맞게 풀을 써야겠죠. 밀가루에서 단백질만 뺀 것은 접착력이 좋아요. 잘 붙어요. 그리고 단백질을 제거하면 곰팡이가 생길 확률도 줄어들어요. 단백질이 곰팡이의 먹이 공급원인데, 그 공급원을 제거한 것이니까요. 산 풀보다 밀가루에서 단백질을 제거한 풀의 접착력이 더 좋아요. 아무래도 접착력을 높이려면 풀의 농도가 진해야 되고, 아무래도 그러면 공장의 입장에선 생산성이 떨어지니까요.

저희 표구사에도 한 10년 이상 된 풀이 있는데, 오히려 그 풀은 접착력이 약해요. 족자할 때에는 접착력이 강하면 틀어지거든요. 그래서 이런 풀을 사용해요. 포스트잇 같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포스트잇은 접착력은 있으되 강하지는 않죠. 이런 풀은 일반 액자에는 안 쓰고, 고서할 때 조금씩 써요."

직접 만들 풀은 기존의 풀보다 맑은 색깔이 난다.
▲ 표구에 쓰이는 풀 직접 만들 풀은 기존의 풀보다 맑은 색깔이 난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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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구를 주문하려는 시민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선 표구는 여유를 두고 맡기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문화재가 아닌 이상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투자를 한다고 생각을 하시고 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정성이 많이 들고, 좋은 재료를 쓰는 표구가 비쌀 수밖에 없어요.  제가 아는 분 중에 종이를 연구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맥도날드 햄버거를 닥지로 쌀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요. 잘못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겠죠. 적절한 선에서 제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작업장에서 고서를 보고 있다.
▲ 김산호 씨 작업장에서 고서를 보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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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보고는 잘된 표구와 잘못된 표구를 알 수 없다. 표구 장인의 양심에 맡겨져 있는 문제다. 그래서인지 표구 장인이 가져야할 중요한 덕목이 뭐냐고 질문했을 때, 김씨는 '정직성'을 뽑았다.

어떤 풀을 쓰는지, 어떤 재료를 쓰는 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는 표구 장인만 아는 일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함께 인터뷰 하자고 말씀 드렸을 때 손사래를 치던 김씨 어머니도 이 부분만은 강조하시고 싶으셨는지 말씀을 보탰다.

"예전에 우리 집에 있던 기술자들이 자신을 '풀쟁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왜 스스로를 격하시키느냐고, 우리는 '예술인'이라고 말했죠. '무슨 예술이요?'라고 되물을 때, 대답했어요. 선과 각의 예술이라고. 그러니 예술가다운 정신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장인 정신이 중요해요. 겉과 속이 같아야 해요. 후대에게 작품이 전달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장인들의 말을 믿어줄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너무 고독한 길이니까요."

그러한 마음으로 대를 이어 표구를 만들다보니, 표구사 손님도 대를 이어서 오고 있었다. 참된 표구 장인이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재)종로문화재단과 함께 무지개다리지원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의 일환으로 기획한 "장황의 기록, 손의 기억' 展을 준비하면서 취재한 인터뷰입니다. 행사 도록에 중복게재 됩니다.



태그:#표구, #김산호, #장황, #태릉표구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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