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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꿈을 꾸면서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 누릴 삶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립니다. 어떤 일을 할지 생각하고, 어떤 하루를 보내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만한가 하고 헤아립니다.

밤마다 꿈을 꾸면서 잠듭니다. 오늘 하루 누린 삶을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그리면서 이튿날 새롭게 맞아들일 이야기를 그립니다. 즐겁게 누린 삶을 되새기고, 아쉽게 보낸 삶을 돌아봅니다.

틈틈이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그립니다. 앞으로 이루려는 꿈을 담은 그림을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아로새깁니다. 몸과 마음이 오롯이 꿈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내 그림'을 기쁘게 노래하고 웃으면서 바라봅니다.

나 스스로 '내 꿈'으로 나아가려고 그리는 그림입니다.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깊이 돌아본 뒤, 이러한 꿈을 내 마음에 맡긴 채 다른 생각이 없이 그립니다. '꿈 그림 그리기'를 하면서 스스로 나아가려는 꿈을 늘 제대로 바라보며 되새기려고 합니다.
 나 스스로 '내 꿈'으로 나아가려고 그리는 그림입니다.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깊이 돌아본 뒤, 이러한 꿈을 내 마음에 맡긴 채 다른 생각이 없이 그립니다. '꿈 그림 그리기'를 하면서 스스로 나아가려는 꿈을 늘 제대로 바라보며 되새기려고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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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물리학은 서로 끌어당기는 양전하와 음전하로 구성된 물질이 왜 붕괴하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었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전기적, 광학적 특성의 정밀하고 정량적인 기술을 가능하게 했고, 초전도나 소립자들의 특이한 특성과 같은 놀라운 현상들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틀을 마련해 준다. (16쪽)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양자 비국소성의 이야기가 사실은 단순하고 매우 인간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들은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는 우리의 확고했던 직관이 옳지 않다는 사실이 물리학에서 발견되었다. (26, 27쪽)

니콜라스 지생님이 쓴 <양자우연성>(승산, 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양자'가 얽히는 물리학 가운데 '양자우연성'이 무엇인가를 놓고 벌이는 '벨 상자 게임'을 이야기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이론이나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고, 이 책에서 밝히듯이 양자우연성으로도 알려집니다.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든, 가장 깊이 들여다볼 대목은 '양자'입니다. 오늘날 물리학뿐 아니라 과학은 '양자'를 한복판에 두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할 만하며, '양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양자' 이야기가 비로소 불거진 뒤 다른 모든 이론을 버티던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 낱낱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양자'를 다루는 이야기는 '끝이 없는 끝'으로 온갖 이야기를 모조리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들이 메커너즘을 찾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야. 왜냐하면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이지 … 순수한 창조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까지 존재하지 않아." (40쪽)

겉그림
 겉그림
ⓒ 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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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우연성>은 아주 쉬운 길잡이책입니다. 양자물리학이나 양자과학이나 양자역학이 낯선 사람한테는 아무튼 어려울는지 모르고, 양자물리학이든 양자과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새롭게 배우는 사람한테까지 이래저래 어려울 수 있으나, 이 책은 아주 쉽게 풀어서 쓴 길잡이책입니다.

요즈막에 선보인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는 바로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나온 <콘택트>라는 영화라든지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도 바로 양자역학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합니다.

'양자' 이론은 언제나 '관찰자(보는 눈·보는 이)'가 모든 것을 이루거나 짓습니다. '관찰자(보는 눈)'가 없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실험을 하면서 '이러한 결과'를 바란다면, 이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관찰자가 똑같은 실험을 다시 하면서 '저러한 결과'도 나올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면, 저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어떤 결과는 단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만, 어떤 결과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도 영향을 받는다. (46쪽)

모든 과학 수업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야기 없이 어떻게 에너지, 분자, 지질층, 상관관계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소개할 수가 있겠는가? (50쪽)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합니다. 한겨레 옛말입니다. 그러면, 왜 콩 심은 데에 콩이 날까요? 콩을 심으면서 콩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팥 심은 데에 팥이 나는 까닭도 팥을 심은 줄 지켜보면(관찰)서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콩을 심었으나 팥으로 여기면서 '팥을 키우듯이' 돌보면, 콩씨가 팥씨로 바뀔 수 있습니다. 콩을 심고 팥으로 여겼으나 '아무래도 팥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 콩씨 그대로 나오지요. 콩을 심고 팥인 줄 알면서 팥으로 거두려 하면, '콩도 팥도 아닌 새로운 열매'를 얻기도 합니다.

먼 옛날 한겨레 어느 스님이 이웃나라로 먼 길을 나섰다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시원하게 마셨다지요. 이 스님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실험을 하는 관찰자 뜻'입니다. 그러니, 이 스님은 아주 시원하고 좋은 물로 알고 밤새 달콤하게 잤어요. 이러다가 이튿날 아침 해골 바가지인 줄 알고 우웩거리지요. 이때에 이 스님은 깨닫습니다.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달고 시원한 물'로 여기면, 그저 달고 시원한 물로 내 몸에 스며들어서 내 몸을 살립니다. 한낮에 멀쩡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바라보면서 '맛없어' 같은 생각을 하면, 그냥 멀쩡한 물이지만 내 몸에 나쁘게 스며들어서 내 몸을 망가뜨려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실마리를 푸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양자물리'가 나타납니다. '기존 과학'이나 '기존 사회'는 '기존 지배질서'를 지키려고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일삼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면, 모든 '기존 것'을 무너뜨려서 '새롭게 세워야' 하고, 우주여행을 하는 바탕이 되는 이론 체계도 모두 새롭게 써야 하지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실마리를 푸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양자물리'가 나타납니다. '기존 과학'이나 '기존 사회'는 '기존 지배질서'를 지키려고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일삼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면, 모든 '기존 것'을 무너뜨려서 '새롭게 세워야' 하고, 우주여행을 하는 바탕이 되는 이론 체계도 모두 새롭게 써야 하지요.
ⓒ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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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일어나는 일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인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하지만 그 일들이 이해하기 너무 복잡한 과정들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또는 그러한 결과가 나오도록 영향을 준 모든 세부사항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우연성에 의해서 발생되는 진실로 우연적인 결과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예측할 수 없다 … 진정으로 우연한 결과는 이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순수한 창조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 불가하다. (59쪽)

'양자' 이야기는 '물 결정'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물 결정을 얼려서 사진으로 찍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마사루 에모토님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이 일본 과학자는 물한테 좋은 말하고 궂은 말을 따로따로 들려준 뒤 하룻밤을 그대로 두고는 이튿날 결정을 얻어서 사진으로 찍어요. 어떻게 될까요?

좋은 말을 들은 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결정이 됩니다. 궂은 말을 들은 물은 결정이 나오지 않거나 일그러집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물은 아름다운 결정이 되고,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물은 시끄럽거나 일그러진 결정이 됩니다.

이러한 '물 결정' 모습이란, 양자우연성이나 양자역학이라고 할 '양자'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짚거나 밝히는 여러 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한 방울을 고마이 여기면서 기쁘게 웃으면서 꿀꺽꿀꺽 받아들이면, 이 물은 달디단 샘물이 될 뿐 아니라, 포도술도 되고 맥주도 됩니다. 그러나, 깊은 두멧자락 정갈한 샘물에서 길은 물이라 하더라도 찡그리거나 골을 내면서 마시면, 이 물은 지저분한 공장 폐수하고 똑같은 물로 바뀝니다.

이 부등식을 보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듯이 이 부등식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63쪽)

더구나 앨리스와 밥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상자를 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송수신처로 갈 수 있다. (72쪽)

벨 게임과의 차이점은 벨 게임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통신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가 무작위적으로, 그러나 계획된 방식에 따라 나오기만 하면 된다. 앨리스와 밥의 상자들은 상대방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만, 앨리스와 밥은 이 '아는 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83쪽)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나오는 '물 결정' 사진을 보면, 우리가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 물한테 말을 거는 대로 물맛과 물결이 달라지는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물을 마셔야 하는가가 아니라, 물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가 말하는 '우연성'과 '얽힘'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나오는 '물 결정' 사진을 보면, 우리가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 물한테 말을 거는 대로 물맛과 물결이 달라지는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물을 마셔야 하는가가 아니라, 물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가 말하는 '우연성'과 '얽힘'입니다.
ⓒ 더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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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우연성'이라고 하는 '우연'이란, 미리 못박지 않은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미리 못박은 대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지구별 자연은 사람(관찰자)이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나 똑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관찰자)는 마음속으로 꿈을 지어서 생각으로 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관찰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마음에 깃들어, 이처럼 깃든 생각이 씨앗이 되어 삶(현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양자우연성>에서 다루는 '벨 상자 실험'은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담아 삶을 짓는 흐름'을 과학 실험과 수식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 후의 많은 실험들이 아인슈타인의 직관에는 위배되며, 양자이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멀리 떨어진 두 상자가 하나의 물체인 것처럼 조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한다. (84쪽)

아인슈타인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신, 오히려 "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가"라고 묻자. 그에 대한 답은, 자연은 전달 없는 통신의 가능성 없이도 비국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진정한 무작위성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93쪽)

생각하여 꿈을 꾸는 사람은 생각을 엮어서 꿈을 이룹니다. 생각하지 않고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꿈도 없으니, 스스로 이루는 삶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을 꿈으로 가꾸면서 새로운 하루를 짓습니다. 생각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종교권력 따위가 시키는 일만 하는 쳇바퀴 놀음에 얽매일 뿐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첫머리에서 재미난 대목이 나옵니다. '예전 교과서'는 모두 거짓된 지식과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미래 세계에서는 새로운 교과서를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래 세계에서 쓰는 교과서도 '미래 세계를 이끄는 정치권력자 입맛에 맞게 조금 고친 교과서'일 뿐이에요.

이런 대목을 우리는 얼마나 알아채거나 느낄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르치는 교과서가 '진실·진리'로 여기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대입시험을 치르도록 하나요? 아니면, 교과서가 진실도 진리도 아니지만, 대학교 졸업장이 없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억지스레 아이들을 학교에 내모는가요?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매우 즐깁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과 달리, 하느님(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쁘게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왜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기쁘게 즐길까요? 재미있기 때문이고, 삶을 새롭게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양자물리의 기묘한 이론은 멀리 떨어진 두 물체가 하나의 실체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흔하다고까지 얘기한다! 그것이 얽힘이다 … 양자이론은 각각의 결과들이 측정될 확률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가 선택되는지는 우연이며, 따라서 얽혀 있는 실체가 단일체로서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정보를 보낼 수는 없다. (109∼110쪽)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을 수 있다면, 거짓된 지식이나 정보에 휘둘릴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닫는다면, 스스로 꿈을 짓는 길을 걸어가겠지요.

어마어마한 돈을 바라든 커다란 집을 바라든 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대로 모두 이룹니다. 다만, 꿈을 꾸되 '못미덥다(의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기는 했으나 '아마 안 이루어지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이루어지지요.

꿈을 꾸는 사람은 '이 꿈은 꼭 이룬다!'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꿈을 꾸는 사람은 꿈만 꿀 노릇입니다. 꿈을 꾸고서 '안 이루어져' 하고 생각하면 이 생각대로 안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지구별 아주 많은 사람들은 꿈을 못 이룹니다. 내가 꾸는 꿈만 깊은 마음으로 헤아리고 언제나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싶기는 하지만 스스로 '꿈'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거나 '배부른 소리'로 여기고 말아, 처음부터 아예 아무 꿈을 꾸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꾼다고 하지요. 그러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는' 꿈을 이룹니다.

영화 <콘택트>에서 주인공은 '외계에서 전파 신호'로 보낸 엄청난 자료를 분석해서 우주선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우주선은 '현실 세계에서 보면' 고작 몇 초 동안 빛물결 사이를 지나갔을 뿐인데, 주인공은 '실제로 우주여행을 하면'서 무척 긴 시간에 걸쳐서 녹화를 했어요. 다만, 현실 세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나왔을 뿐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공간'을 이해하려면 바로 양자물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영화 <콘택트>에서 주인공은 '외계에서 전파 신호'로 보낸 엄청난 자료를 분석해서 우주선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우주선은 '현실 세계에서 보면' 고작 몇 초 동안 빛물결 사이를 지나갔을 뿐인데, 주인공은 '실제로 우주여행을 하면'서 무척 긴 시간에 걸쳐서 녹화를 했어요. 다만, 현실 세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나왔을 뿐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공간'을 이해하려면 바로 양자물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 콘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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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상태의 형태로 보내지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구조이다. 마지막 큐비트가 처음 큐비트의 상태를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히 동일하다 … 송신자와 수신자조차도 이동되는 큐비트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므로 앨리스와 찰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찰스가 밥에게 전달하게 할 수 있다. (163쪽)

사회가 달라지거나 거듭나는 까닭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회가 바뀝니다. 그런데, 사회를 바꾸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얼마 안 됩니다. 사회를 바꾸려는 꿈이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 아주 많습니다. 대안언론이나 독립언론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고, 대안학교나 독립학교도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꿈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사람은 꿈을 이루는 길로 갑니다. 꿈을 이루려고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부딪히지요. 꿈을 안 바라보고 꿈이 아예 없는 사람은 '이루려는 꿈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조차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보스러운 사회가 무너지는 까닭은, 또 그악스러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사람들(관찰자)이 스스로 생각을 짓고 꿈을 빚어서 가슴에 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보스러운 사회를 무너뜨리고 독재자도 거꾸러뜨렸으나, 사회가 다시 바보스럽게 뒤집어지면서 독재자가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관찰자)이 다시 생각도 꿈도 접거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려는 두 학생이 서로의 답안을 베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반드시 공간적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실험을 준비하는 과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7쪽)

영향이 임의의 먼 지역을 순식간에 연결할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이런 영향을 비국소적 상관관계의 설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영향이 공간을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간의 바깥으로 거리 0인 지름길을 따른다는 말하고 같다. (185쪽)

양자우연성은 물리학이나 과학에서만 다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다룰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권력이나 교육이나 문화나 종교에서 양자 이야기를 다루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관찰자)이 생각도 꿈도 없이 '맹신·맹종·복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은 바보처럼 휘둘립니다. 이른바 '종(노예)'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남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습니다. 꿈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아이들이 꼭 대학교에 가야 하나요? 아이들을 꼭 대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대학교 없이 아름다운 사회를 일굴 꿈을 못 꾸나요? 수출이나 수입이 없이 한국 사회가 저마다 자급자족을 하면서 아름다운 숲집과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맛있는 밥을 즐기는 삶을 꿈꿀 수 없나요? 도시에서도 누구나 '마당 있는 집'에 나무를 심고 아이들이 실컷 놀도록 하는 꿈을 꿀 수 없나요?

하이젠베르크 님이 쓴 <부분과 전체>는 양자물리를 깊이 헤아리려고 하는 분들한테 좋은 길잡이책이 될 수 있습니다. 무척 낱낱이 파고들며,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벌인 논쟁 이야기까지 여러모로 두루 양자물리를 다룹니다.
 하이젠베르크 님이 쓴 <부분과 전체>는 양자물리를 깊이 헤아리려고 하는 분들한테 좋은 길잡이책이 될 수 있습니다. 무척 낱낱이 파고들며,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벌인 논쟁 이야기까지 여러모로 두루 양자물리를 다룹니다.
ⓒ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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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지 않으니 꿈을 이루지 못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양자이론이고 양자과학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생각을 아예 잊고 말아서,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삽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뇌를 많이 썼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정작 뇌를 다 쓰거나 많이 쓰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까닭은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안 받아들였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지은 셈이지요. 스스로 생각을 넓게 뻗지 않았지요. 스스로 한계를 지으면 뇌를 그만큼 못 쓰고, 스스로 생각을 더 넓게 뻗으려 하지 않으면 그만큼 뇌를 조금만 쓰기 마련입니다. 뇌를 쓰는 이야기는 영화 〈루시〉에서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절대 자연과학 이론을 테스트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당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나는 확실히 자유의지를 즐기고 있으며 당신은 절대 그 사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 자유의지는 존재할 뿐 아니라 이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우리가 의미 있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전제조건이다. 자유의지 없이는 이성적 사고란 없다. 따라서 과학과 철학에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다. (190∼191쪽)

측정의 결과란 것 자체가 없다고 가정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N가지 가능한 결과가 있는 측정을 행한다는 환상을 가질 때마다, 우주가 모두 다른 결과를 갖고 있으며, 또한 똑같이 실재적인 N개의 가지로 갈라진다. 실험도 N개의 복사본으로 갈라지고 각자가 N개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를 '본다'. 이것이 다중세계 해석 혹은 다중우주 해석으로. (196쪽)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스스로 무엇이든 하려는 생각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을 품을 적에, 이러한 생각을 도와줄 이웃이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이웃은 나를 못 돕지요.

자, 생각해 보셔요. "이봐, 뭘 도와줄까?" "응, 도와줘. 그런데 뭘 도와 달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네?" "뭐라구? 도와 달라는 소리야, 아니야?" "나도 내가 무슨 도움을 받아야 할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 어찌 될까요? 나는 내가 나를 돕지도 못하고, 내 이웃도 나를 못 돕습니다.

도움을 바란다면 내가 바라는 도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고, 이 생각을 꿈으로 지어서, 이 꿈과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맨 먼저 나 스스로 이 꿈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스스로 꿈길을 찾으면 이웃이 하나둘 나타나서 어느새 내 짐을 덜어 줍니다.

자연은 진짜로 우연적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219쪽)

<양자우연성>은 아주 쉽고 가벼운 이론을 딱 한 가지(벨 상자 실험)만 보여주는 얇은 책입니다. 이 대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양자 이야기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양자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은 참말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배웁니다. 그리고, 양자 이야기를 '내 삶과 꿈을 짓는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삶과 꿈을 어떻게 지어서 스스로 기쁘며 아름답게 하루를 열까 하는 길을 여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우리(관찰자)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패이거나 성공일 뿐입니다. 실패나 성공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실패이든 성공이든 모두 '스스로 지은 꿈'으로 가는 길목에서 겪는 온갖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꿈을 바라는 사람은 실패를 몇 차례 했대서 주눅 들 일이 없고, 가볍게 성공을 몇 가지 했대서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요하면서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하늘을 가르는 작은 새처럼 홀가분하게 구름을 타'고서 꿈을 지으면 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글
이해웅·이순칠 옮김
승산 펴냄, 2015.7.6.
15000원



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지음, 이해웅 외 옮김, 김재완 감수, 승산(2015)


태그:#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양자물리, #삶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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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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