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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계획에 없던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후, 이듬해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 현지대학교에 입학한 32살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올해 7월 졸업을 앞두고, 이후 중국을 더 가까이 느끼고자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중국의 일상생활과 유학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기자말

현지인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며 나 스스로에게도 많은 도움이 됐다.
 현지인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며 나 스스로에게도 많은 도움이 됐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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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건 외국이건 학생은 늘 돈이 궁핍한 존재다. 넉넉지 못한 용돈을 쪼개 쓰며 항상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살림에 온 유학이라 언제나 돈의 압박에 시달린다. 3년 전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갔다가 그곳 알바생과 수다를 떨게 됐다.

"여기 일 할 만해? 나도 알바하고 싶어. 얼마 받고 일해?"
"그럭저럭 괜찮아. 한 시간에 4위안 받아. 한국인은 돈 많잖아. 뭐 하러 알바를 해?"

일반 중국인들은 한국인이라면 돈이 많을 거란 착각을 한다. 적어도 50여 명 넘는 이들에게 들은 말이다. 어느 곳이나 빈부격차가 있기 마련이건만, 이들 눈에 한국유학생은 죄다 부유층으로 보이나 보다. 그런데 한 시간에 4위안이라니? 4위안은 한국 돈 700원 남짓이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증오하는 단어 '열정 페이'도 아니고 너무한다 싶었다.

베이징같은 대도시의 임금은 이곳 진저우(錦州, 금주)보다 높다. 하지만 중소도시의 경우 알바는 물론 직장에서조차 그리 높은 월급을 받지 못한다. 보통 2000위안(35만원) 정도다. 당시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알바 미션은 쿨하게 떠나 보냈다. 그 돈을 벌자니 차라리 아껴 쓰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포기도 자기 합리화도 빠른 나였다.

번뇌 속에 단맛을 숨겨 놓았던 번역 아르바이트

알바를 하는 중국 여대생. 식사를 하는 손님들에게 장을 덜어 주고 있다.
 알바를 하는 중국 여대생. 식사를 하는 손님들에게 장을 덜어 주고 있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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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게 접었던 알바의 꿈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한국인 친구가 사정이 생겨 나에게 넘긴 통역 알바였다. 한국 대기업과 계약을 며칠 남겨둔 현지 반도체 재료생산 중소기업이었다. 맡은 역할이 막중해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수락했다.

통역은 처음이라고 말하니 하루 300위안이 책정됐다. 약 5만3천 원이다. 중국치곤 급여가 나쁘지 않아 흔쾌히 받아들이고 보니 통역은 하루 500위안은 받아야 하는 거란다. 물론 전문적인 통역사는 훨씬 비싸다. 속이 쓰려 배를 잡고 굴렀지만, 생초보를 믿고 써준 사장에게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의 요구는 높았다. 첫째, 노트에 그날 통역 내용을 모두 적을 것. 둘째, 공장에 대한 전반적 설명과 10장 분량 프레젠테이션 번역 및 발표. 셋째, 전체적 분위기를 살피고 오고가는 대화를 빠짐없이 사장에게 보고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300위안 어치는 더 될 분량의 일감같았다.

찜찜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번역을 시작했다. 한국어도 처음 보는 단어였다. 일을 받아온 것에 대해 자책했다.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인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틀 밤낮 반도체 용어를 찾아가며 번역에 매달렸다.

대망의 날이 밝았다. 걱정으로 마주한 한국 바이어들은 오히려 친절하고 재밌었다. 유학생인 내 처지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하게 이곳 직원과 능숙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일본어를 못 알아들으니 통역 내용을 써야하는 임무 또한 하늘로 시원하게 날아갔다.

제일 걱정했던 프레젠테이션 발표 또한 중국 직원인 일본인 엔지니어가 일본어로 제품 설명을 하고 한국 측 일본어 통역사가 한국말로 전달했다. 만찬을 즐기며 일상대화를 간간히 통역한 것이 고작 내가 한 일이었다. 크게 한 일이 없는데도 일정을 마치자 한국 분들이 고생했다며 무려 500위안을 건넸다. 일당 300위안에 생각지 못한 수입까지 챙겨 빵빵해진 주머니에 어깨 춤을 추며 학교로 돌아갔다.

중국인 과외하기 미션, 덕분에 한국어 다시 생각하게 돼

한국어로 K-POP을 열창하는 중국 학생. 가르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로 K-POP을 열창하는 중국 학생. 가르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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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에서 한국어 선생님을 했던 쾌활한 한국인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무료한 학교생활에 좀이 쑤셨는지 턱하니 유료 한국어 방과 후 교실을 개설했다. 원체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한국어 과외에 관심 있던 찰나에 황금 같은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덕에 노하우를 배우며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밖에도 언니는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마운 인연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한 시간씩 삼 개월을 꼬박 수업을 진행했다. 머릿수가 제법 모여 저렴한 수강료임에도 한 달 버는 돈은 꽤 쏠쏠했다. 학생들이 잘 따라오고 성실해서 실력들이 날로 늘어갔다. 용돈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한국의 문화와 정신에 대해 알린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老师, 谢谢! 太辛苦了!"(라오싀, 쎼쎼! 타이신쿠러! :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학기가 끝날 무렵 학생들의 인사에 콧날이 시큰해지며 그간 힘든 수업준비에 대해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더 가르쳐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이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던 언니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덕분에 별 생각 없었던 한국어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소문이 나자 여러 한국인 유학생이 찾아와 과외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풋내기 선생질을 했던 내가 으스대며 언니에게 계승받은 노하우를 제 것인양 늘어놨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언니에게 갑자기 사과하고 싶다.

작은 변화가 일으킨 커다란 파도

내가 다니는 학교의 야경, 땅부자 중국 답게 부지만 100만 평에 달한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야경, 땅부자 중국 답게 부지만 100만 평에 달한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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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있으면 딱히 장사 체질이 아님에도 수많은 사업 아이템이 머리를 들쑤신다. 아마 많은 유학생들은 한 번쯤 상상해봤을 것이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예를 들자면 진저우는 딱히 술집 개념이 없다. 클럽이나 나이트 클럽이 아니라면 음식점에서 술을 곁들여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집은 9시면 대부분 문을 닫고 늦어봤자 새벽 1시다. 24시간도 있긴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이런 시골에 한국의 다양한 메뉴를 그대로 가져와 아침까지 장사하는 한국식 술집을 내면 중국인들에게 신선한 문화 충격이 될 것이다. 절대 내가 아쉬워 누군가 와서 차려달라고 썰을 푸는 건 아니다.

또 반대로 향이 강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중국의 전병이나 주전부리로 한국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신기하고 무궁무진한 중국문화를 접할 때마다 머리가 근지러울 정도로 사업 구상이 떠오른다.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이미 나는 성공한 사장님이다.

이 외에도 내가 어떤 직업을 얻어야 할 것인지,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뇌도 끊임없이 밀려든다. 시야가 넓어지니 사고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 같다. 흐릿한 오솔길 입구에 세워진 낡아빠진 지표 정도는 보이는 느낌이다. 옛날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아주 작은 것들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책상 앞의 상념만으로 모든 결말을 예측할 순 없다. 하지만 미세하고 잔잔한 파동들이 나비효과처럼 해일이 되어 뇌 속에서 일렁인다. 중국 유학행은 나에겐 인생을 건 도박과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면 어떡하지? 친구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내 미래의 끝이 어둡진 않을까?' 항상 칼날 위를 걷는 불안함을 안은 채 새로운 생활을 맞이했다.

한국에 남아 이직을 했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수많은 경험과 인연들을 마주하면서 나를 키워나갔다. 중국을 선택해준 과거의 내게 고마워하는 이유다. 아직 길의 끝은 모른다. 다만 닥치지 않은, 설레는 작은 기적들을 기대하며 계속 나아갈 뿐이다.


태그:#중국유학, #중국, #진저우,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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