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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야르카르카에서 토롱페디까지는 토마스, 마케터, 미란과 함께 걸었다. 누가 더 느린지 치열한 경쟁을 하던 미라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걷던 세 사람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처졌다.
 야르카르카에서 토롱페디까지는 토마스, 마케터, 미란과 함께 걸었다. 누가 더 느린지 치열한 경쟁을 하던 미라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걷던 세 사람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처졌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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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워서 그런가 싶으면, 서린 공기 속으로 하얀 입김이 구름처럼 새어나온다. 눈앞의 설산이 시린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들어 올리지 못한 두 눈은 차갑게 식은 두 발에 가늘게 고정되어 있다. 쎅쎅, 쎅쎅. 잦고 강하게 이어지는 숨소리. 더는 못 가, 하는 외침이 바로 튀어나올 만도 한데. 쿨럭! 하고 예고 없던 기침만 강하게 이어진다. 미라는 아무 말이 없다. 쎅쎅. 쿨럭쿨럭. 거칠고 잦은 숨소리, 그리고 기침 소리가 지난 두 시간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다.

"괜찮아?"

그냥 보고만 있기가 안쓰러운 나는 괜찮냐는 질문만 반복한다. 들숨 날숨에 리듬을 맞춰 미미하게 들썩이던 미라의 고개가 끄덕, 하고 조금 더 깊숙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괜찮다는 뜻이렷다. 아니, 괜찮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속 가겠다는 뜻이렷다. 아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하라는 뜻인가. 영양가 없는 질문은 그만 해야겠다. 지금 미라에겐, 내 쓸데없는 질문에 낭비할 호흡 같은 건 없어 보인다.

미라는 지금, 숨 쉬는 것도 곤란한 상태에서 5000m에 가까운 고산을 오르고 있다. 나라면 떼굴떼굴 굴러서라도 당장에 내려갈 텐데. 이 상태로 걷고 있는 미라의 정신력이 참 대단하다 싶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만 걷겠다고 해도 괜찮은데. 야크카르카까지, 마낭까지라도 함께 내려가 줄 수 있는데. 제발 그만 걷겠다고 하지. 미라는 그만 걷겠다는 말 대신 두통이 있다며 다시 한 번 기침을 쏟아냈다. 물을 조금 더 마셔봐. 아픈 미라는 착한 아이처럼 순하다. 대답 대신 물통을 꺼내 물을 두 모금 마신다. 괜찮아, 천천히 가자. 내가 다독였다. 다독이면 안 되는 건가. 억지로라도 돌려보내야 하나.

토롱 페디로 오르는 길. 고도가 높지만 어렵지는 않다.
 토롱 페디로 오르는 길. 고도가 높지만 어렵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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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 페디 가는 길.
 토롱 페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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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카르카에서 합류한 토마스, 마케터, 미라와 토롱페디로 가는 길이다. 같이 걷던 다섯은 오래지 않아 두 팀으로 갈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토마스, 체격은 작지만 달리기 대회에서 매년 우승을 할 만큼 운동을 잘한다는 마케터, 그리고 동글동글한 게 발만 빠른 더스틴이 앞서나갔다.

누가 더 느린지 치열한 경쟁을 하던 미라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걷던 세 사람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처졌다. 선두로 걷던 셋은 우리가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리 느린가 싶겠지만, 미라와 나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걷고 있다.

하나! 둘! 셋! 토롱페디 도착!

미라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야크카르카에서 토롱페디까지 이어지는 세 시간 남짓의 길은 어렵지 않았다. 오르막길이 거의 없는 평이한 길이다. 어느덧 토롱페디의 현판이 보였다. 해발 고도 4450m. 참 높이도 왔다. 현판 앞에서 다시 다섯이 모였다. 고도 4450m를 넘는 이 영광스런 순간을 함께 해야 한다며 토마스가 어깨동무를 제안했다. 유치해. 유치하지만 유쾌해. 미라, 마케터, 토마스, 더스틴 그리고 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섰다. 국적도 제각각, 속도도 제각각인 우리. 다른 키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까치발을 들고, 양팔을 번쩍 벌려 서로를 얼싸안았다. 하나! 둘! 셋! 넘었다!

토마스와 마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토마스, 체격은 작지만 달리기 대회에서 매년 우승을 할 만큼 운동을 잘한다는 마케터, 그리고 동글동글한 게 발만 빠른 더스틴이 앞서나갔다.
 토마스와 마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토마스, 체격은 작지만 달리기 대회에서 매년 우승을 할 만큼 운동을 잘한다는 마케터, 그리고 동글동글한 게 발만 빠른 더스틴이 앞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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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에서의 한때. 안나푸르나를 오른다면 카드게임은 필수품이다.
 산장에서의 한때. 안나푸르나를 오른다면 카드게임은 필수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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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높은 토롱페디에는 마을이 없다. 산장은 단 하나다. 산장 식당은 쏘롱 라를 넘기 위해 모여든 트레커들로 복적였다. 쏘롱 라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식당의 서늘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미라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던데."


토마스에게 미라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기 돌던 토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라의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오래된 일. 이반과 함께 돌아가라고 지극히도 설득을 했단다. 이반과 헬레나 커플도 설득이 쉬운 건 아니었다. 구토를 거듭하는 상태에서 쏘롱 라를 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들을 설득하느라 심하게 싸우기까지 했단다.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반드시 쏘롱 라를 넘어 하산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미라는 결국 말리지 못하고 같이 왔다. 미라는 고산증이 왔을 때 주의해야 하는 두 가지를 어겼다. 첫째, 일정에 스트레스 받아 무리하지 않는다. 둘째, 증상이 심해지면 포기하고 하산한다. 오랜 친구인 토마스도 꺾지 못한 고집을 나라고 꺾을 수 있겠나. 굳이 고집을 부린다니, 부디 무사히 넘길 수 있길. 동료가 사고를 당하는 끔찍한 일은 겪고 싶지 않으니까.

야크카르카 가는 길에 만난 영국 할아버지. 마낭에서 처음 만난 80세 할아버지는 가이드도 없이, 런닝화를 들고, 물 한 모금 짊어지지 않고 홀로 걷는다. 대신 천천히,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사진처럼, 쉬고 싶으면 그냥 발라당 누워서 쉬다 간다.
 야크카르카 가는 길에 만난 영국 할아버지. 마낭에서 처음 만난 80세 할아버지는 가이드도 없이, 런닝화를 들고, 물 한 모금 짊어지지 않고 홀로 걷는다. 대신 천천히,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사진처럼, 쉬고 싶으면 그냥 발라당 누워서 쉬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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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과 나.
 더스틴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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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이 되니 식당은 더 복적였다. 50명 가까이 되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 저 사람을 내가 만난 적이 있나. 베시사하르에서 본 적이 있던가. 닮은 사람인가. 트레커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돌아봤다. 음. 저 남자는 뭐지. 검은 직모, 검은 눈동자, 짤막한 키. 특이하게 생겼네. 중국인인가.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검은 직모, 검은 눈동자, 짤막한 키는…. 나잖아.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걷는 내내 만난 사람은 네팔 현지인과 서양 트레커뿐. 산에 오래 있다 보니 이젠 내 얼굴도 까먹었구나. 나 자신을 잊는 것도 고산병 증상인가.

몸이 아파 저녁도 못 먹는 미라는 방에서 쉬고 있다. 내일 쏘롱 라에 오르려면 준비 운동을 해야 한다며, 토마스가 산책을 제안했다. 싫다. 힘들다 이놈아. 오늘은 이미 충분히 걷지 않았느냐. 나는 춥고 피곤하다. 게으름을 피울 테다.

더스틴과 체코 커플이 산책을 나가고, 식당에 혼자 남아 차를 마셨다. 프랑스 커플 하나가 합석했다. 40대 중반의 이 커플은 1년 장기 휴가를 받아 세계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어떻게 1년이나 휴가를 받아요?"
"프랑스에서도 그렇게 흔한 경우는 아니에요. 운이 좋았죠."


그 옆에 앉은 샌프란시스코 변호사도 한 달의 시간을 내서 히말라야에 올랐다. 부럽다. 여행하는 한국인을 만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방학 중 여행 온 대학생 혹은 선생님이거나 나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고작 2주 휴가 다녀오면 장기 휴가라고 하니까. 2주 휴가가 있다고 해도, 눈치가 보여 그렇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직장을 다니면서 한 달 혹은 1년 동안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과 1년에 4일 5일 다녀오면 다행인 사람의 삶의 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 여행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직장이 인생의 전부일 필요도 없는 사람들의 자유가 부럽다.

앞에서 걷는 토마스, 마케터, 더스틴은 나와 미라는 왜 저리 느린가 싶겠지만.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걷고있다.
 앞에서 걷는 토마스, 마케터, 더스틴은 나와 미라는 왜 저리 느린가 싶겠지만.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걷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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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 페디 가는 길.
 토롱 페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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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에서 돌아온 더스틴, 마케터, 토마스의 모자가 하얗게 서려 있다. 눈이 오나 보다. 너희 셋은 어쩜 그렇게도 힘이 넘치느냐. 나는 늙은 노모처럼 힘없이 그들을 맞았다. 내일이 두렵다. 쏘롱 라를 넘어 가장 가까운 마을인 묵티나트까지 이어지는 길은 8시간이 넘는 장거리 코스다. 갈 길이 멀기도 하거니와,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500m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빨리 갈 수도 없다.

늦어도 새벽 5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것 외엔, 별다른 고산병 증세는 없었다. 밥을 먹고 나니 조금 두통이 있는 것도 같다. 산책을 갔다 왔어야 하는 건가. 미라는 아직 몸이 안 좋은가 보다. 내일 같이 오르는 건 무리고, 혼자 며칠 더 쉬다가 당나귀를 타고 쏘롱 라를 오르겠다고 했다. 그래. 몸도 안 좋은데, 혼자 힘으로 걷는 것보다야 낫겠지.

새벽 4시 반, 쏘롱 라로 향하다


새벽 4시 반. 아직 여명도 밝지 않았다. 어둑한 산장 식당 주위로 트레커들이 모여들었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이다. 토마스, 마케터와 함께 더스틴과 나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천천히 올랐다. 산 위로 뜬 밝은 달. 저 멀리, 산등성이를 희미하고 천천히 여행 중인 붉은 해. 두려운 마음 사이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감정이 스며든다.

토롱페디를 출발해 쏘롱 라로 오른다. 새벽 4시 반. 아직 여명도 밝지 않았다.
 토롱페디를 출발해 쏘롱 라로 오른다. 새벽 4시 반. 아직 여명도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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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짐을 진 트레커들. 각자의 두 발로 한 걸음씩 천천히,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한 발자국이라도 건너뛸 순 없다. 작고 잦은 발걸음으로, 먼 길이지만 조금씩 차근히 밟아, 혼자 힘으로 걸어내야 한다. 혼자의 힘으로 가야 하지만 혼자는 아니다. 육체의 고통을 끌어안고 정신적 싸움을 해내고 있는 트레커들은, 자신의 존재에 오롯이 집중한 채 말이 없다. 하지만 함께 걷는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만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여명이 비추는 산을 오른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다. 차가운 공기에 숨을 불어넣으며, 천천히 두 발을 움직였다. 발이 빠른 토마스와 마케터는 하이 캠프 산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보냈다.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다. 두통 때문인가. 속도 조금 안 좋다. 기분 탓일지도 몰라. 기분 탓이라고 밀어붙이다 고산병이면 어쩌지.

몸이 하는 말을 잘 들으라고 의사가 그랬는데. 몸은 꾀병을 부리고 싶은 걸까, 그만 가라고 말하는 걸까. 판단이 어렵다. 같이 출발한 트레커들이 하나 둘 우리를 앞질렀다. 다음 무리와 함께 걷다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토마스와 마케터가 기다리고 있다.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도 한참을 더 기다린 모양이다. 더 기다리게 하기는 미안해 다음 티숍(찻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속이 안 좋은 것 같아."
"기분 탓 아냐? 다시 내려갈까?"

더스틴이 물었다.

"모르겠어."
"네 상태는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내려가고 싶으면 말해.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일단 어제 미라 정도의 상태는 아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껍긴 하지만 쓰러질 정도로 힘든 건 아니다. 따뜻한 수프를 먹으면 조금 나아질까. 감자 수프를 시켜 몇 숟갈 떴다. 배가 따뜻해지니 속이 조금 풀린 것도 같다. 두통은 그대로 있다. 묵직한 무언가가 머리 위에 내려앉아,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붕, 하고 들어 올린 느낌이다.

조금만 더 가보자.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걸었다. 끝이 저기인가, 어느 만큼 왔나, 가늠할 정신도 없이, 멍한 상태로 두 발만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영원처럼 계속되던 발걸음 끝에 티숍이 보였다. 토마스와 마케터는 보이지 않는다. 낯선 트레커들이 티숍 여기저기에 앉아 쉬고 있다.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그룹이다.

하늘로 이어지는 길.
 하늘로 이어지는 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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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고통을 끌어안고 정신적 싸움을 해내고 있는 트레커들은, 자신의 존재에 오롯이 집중한 채 말이 없다. 하지만 함께 걷는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육체의 고통을 끌어안고 정신적 싸움을 해내고 있는 트레커들은, 자신의 존재에 오롯이 집중한 채 말이 없다. 하지만 함께 걷는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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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에 있는 티숍까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무 바위에나 대충 걸터앉았다.

"괜찮아요?"

레타르 가는 길에 만났던 네덜란드 커플이다. 유쾌하고 밝은 기운의 사람들. 오늘도 씩씩해 보인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멍하니 앉아 숨만 몰아쉬었다. 힘이 없다. 머리가 멍하다. 이 상태로 5500m의 고지를 넘기고, 8시간의 트레킹을 거쳐 묵티나트까지 가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저한테 고산병 치료 약이 있어요. 저희는 필요 없으니까 다 줄게요. 이거 복용하고, 다시 토롱페디로 내려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나는 그저 먼 산을 쳐다보며 숨이나 몰아쉰다. 두 무릎을 감싸고 오므려 앉은 내 등을 중심으로 더스틴과 네덜란드 커플이 둘러섰다. 뒤따라온 트레커들이 하나 둘 티숍에 도착한다. 다들 웃고 있다. 쏘롱 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어쨌거나 어딘가에 당도했다는 게 기쁜 모양이다. 난 하나도 안 기쁜데. 이대로 앉아 있는 것도, 힘을 내서 올라가는 것도, 다시 돌아가는 것도. 다 싫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질문에 반응을 안 하거나 반응이 느린 것도 고산병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제가 보기엔 반응이 느린 것 같은데. 제 말이 들리기는 해요?"


들려요. 대답하기 귀찮을 뿐이지. 힘을 쥐어짜면 대답을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닌데. 힘을 쥐어짜야만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건가. 고산병인가. 고산병이 아닌가. 답을 해다오.

2주 전 출발한 베시사하르에서 여기 이 곳, 토롱페디까지 왔다.
 2주 전 출발한 베시사하르에서 여기 이 곳, 토롱페디까지 왔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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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자. 내려가서 쉬자."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이렇게 버티는 건 어떻게 해보겠지만, 쏘롱 라를 넘어 8시간의 산행을 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티숍에 모여든 트레커들은 모두 멀쩡하다. 더스틴도 멀쩡하다. 멀쩡하다 못해 묵티나트까지, 아니 카트만두까지 단숨에 걸어낼 기세다. 나만 이 꼴이다. 어제 더스틴을 따라 산책을 다녀왔어야 하는 건데. 쏘롱 라고 뭐고 됐다. 두통과 메스꺼움만 사라진다면, 내 베시사하르까지라도 하산하겠다.

하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몸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런가. 머리는 바위 하나가 눌러앉은 듯 묵직하다. 오르는 것보다 더 느리게, 한발 한발을 내려가다 다시 주저앉아 한참을 쉬었다. 더스틴은 내 배낭까지 짊어지고 내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화가 난다. 서럽다. 나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더스틴에게 미안하다. 미안하고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고여 나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산이라니. 나는 쏘롱 라를 넘고 싶었다. 묵티나트에 도착해 동료 트레커들과 얼싸안고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토마스, 마케터와 함께 축배를 들고 싶었다. 쏘롱 라는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실패했다.

안나푸르나를 비추는 여명, 그리고 달빛. 함께 걷는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만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여명이 비추는 산을 오른다.
 안나푸르나를 비추는 여명, 그리고 달빛. 함께 걷는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만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여명이 비추는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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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고산병, #안나푸르나,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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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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