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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대부 집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아온 만취당이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다. 유형문화재는 지방 문화재이지만 보물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급이 한층 더 높다.
▲ 보물로 승격된 만취당 전경 16세기 사대부 집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아온 만취당이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다. 유형문화재는 지방 문화재이지만 보물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급이 한층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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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162호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만취당이 보물 1825호로 승격되었다. 지난 9일 문화재청이 경남 양산 통도사의 영산전 및 대명광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한 '의성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김사원(金士元)이 1584년에 세운 건물이다. 1727년 증축, 1764년 재증축을 거쳐 현존의 T자형으로 완성된 만취당은 16세기 사대부가의 주거 생활과 선비 문화, 사회적 요구에 따른 건축적 변화 과정 등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만취당의 넓은 마루는 사방으로 확 트여 있어 햇살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만취당 글씨는 김사원의 친구인 한석봉의 작품이다.
▲ 한석봉의 글씨가 걸려 있는 만취당 넓은 마루 만취당의 넓은 마루는 사방으로 확 트여 있어 햇살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만취당 글씨는 김사원의 친구인 한석봉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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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원은 평생을 두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과 싸웠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농사를 지은 일하는 선비였고, 성품이 온화하고 착하여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흉년이 들면 벼이삭 남은 것까지 털어 사람들을 구제했는데, 너무 가난한 이들이 갚지 못할 것을 걱정할까 봐 차용 문서는 불태웠다. 직접 동네규약[鄕約]을 만들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이끌었고, 그래서 사촌마을은 유난히 풍속이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의로운 창고'라 불렀다.

김사원은 죽을 때까지[晩] 소나무처럼 푸르게[翠]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자신의 호를 만취당이라 지었다. 그리고 1582년부터 1584년까지 3년에 걸쳐 집을 지은 그는 자신의 호를 집이름으로 썼다.

류성룡의 외할아버지이자 김사원의 증조할아버지인 김광수 선생은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사촌마을로 돌아와서 살았다. 그가 심은 수령 500년의 향나무를 사람들은 만년송이라 부른다.
▲ 만년송 류성룡의 외할아버지이자 김사원의 증조할아버지인 김광수 선생은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사촌마을로 돌아와서 살았다. 그가 심은 수령 500년의 향나무를 사람들은 만년송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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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원이 집의 이름을 만취당으로 정한 것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김광수 선생과도 연관이 있다. 김광수는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길을 마다하고 사촌마을에 숨어[隱]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송은(松隱)선생이라 불렀다. 지금도 만취당 담장 옆에는 그가 심은 수령 500년의 거대한 향나무가 기념물 107호로 지정된 채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소나무도 아닌 그 향나무를 만년송(萬年松)이라 부르며 선생을 기리고 있다. 김사원은 증조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자신의 호를 만취당이라 했던 것이다.

김광수 선생은 류성룡의 외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류성룡이 1542년 사촌마을에서 태어났을 때에는 만취당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지만,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영귀정(문화재자료 234호)은 마을 앞을 한가로이 흐르는 미천 물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기 류성룡은 미천 물길을 바라보며 외할아버지 김광수가 읊조리는 시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 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김사원의 후손들이 그를 제사지내고 집안 아이들 교육을 위해 1767년에 지은 후산정사. 만취당 인근에 있다. 현존 건물은 1991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 김사원을 기리는 후산정사 김사원의 후손들이 그를 제사지내고 집안 아이들 교육을 위해 1767년에 지은 후산정사. 만취당 인근에 있다. 현존 건물은 1991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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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선생은 점곡면 소재지 앞을 흐르는 미천 물가에 영귀정을 짓고 그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이 남긴 영귀정 김광수 선생은 점곡면 소재지 앞을 흐르는 미천 물가에 영귀정을 짓고 그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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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류성룡, #만취당, #사촌마을, #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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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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