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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예산에서 이른바 '촛불단체 부대의견'의 족쇄가 5년만에 풀렸다. 기재부가 예산 집행지침에서 보조금 지원 제한항목을 수정해 족쇄를 철폐한 것이다.
예산은 숫자로 표기된 정치다. 정치의 기본은 주고받으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산은 정치적으로 주고받는 숫자의 균형 맞추기인 셈이다. 이를테면 정당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심의에서 자당 출신 단체장의 지역예산을 더 챙길 수밖에 없다. 또 새누리당은 지지세가 강한 영남지역을 더 챙기고,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을 더 챙기기 마련이다.

국회의 예산결산 심사는 국정감사와 함께 행정부를 견제하는 핵심 기능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제54조 1항)고 돼 있다. 그러나 예산 편성권은 정부에 있다. 국회는 감액의 권한만 갖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제57조). 정부가 동의할 때만 비로소 증액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감액의 권한만으로 증액을 '거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예산심사는 국회의 권한이지만 예산 편성에서 정부와 여당은 한통속이다. 여대야소의 국회라면 야당은 더 더욱 예산심의에서 정부를 견제할 힘이 없다. 그래서 야당은 예산을 볼모로 여당과 정치적 거래를 하거나, 예산심사와 정치쟁점을 연계하기도 한다. 올해 예산도 국정원 개혁특위와 연계해 처리했다. 그러나 연계처리는 이것으로 '끝'이다. 야당이 예산을 정치의 볼모로 삼을 수 있는 '호시절'은 이제 끝났다는 얘기다.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 때문이다.

올해 예산의 특징

새해 예산안 및 국정원 개혁 관련 법안 등을 처리하기 위해 1일 새벽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민주당 김한길 대표, 전병헌 원내대표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있다.
 새해 예산안 및 국정원 개혁 관련 법안 등을 처리하기 위해 1일 새벽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민주당 김한길 대표, 전병헌 원내대표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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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30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국회법에 따르면 "예결특위는 '예산안 및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의 심사를 매년 11월 30일까지 마쳐야 하고, 그 기한 내에 마치지 못할 경우에는 그 다음 날에 위원회 심사를 마치고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본다(다만,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함)'(제85조의3). 예산안을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은 못하지만, 법정 기한내에 예산심의를 못하면 자동상정하게 된다. 또 '예산안등에 대한 무제한토론은 12월 1일 자정에 종료한다'(제106조의2제10항)고 명시돼 있다.

그러니 올해부터는 '예산 정쟁'도, 예산안 처리에 해를 넘기는 일도 없어진다. 이는 야당이 '예산 정치'를 할 공간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국회 선진화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인 지난해 마지막으로 국회를 통과한 올해 예산은 '최재천표 예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자로 표기된 정치'를 할 수 있는 국회 예결특위 민주당 간사인 최재천 의원(재선, 서울 성동갑)의 국가재정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각 상임위별 예산심의를 거쳐 예결특위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예결소위)의 예산안 심사가 시작된 것은 지난 12월 10일부터다. 예결소위 심사는 삭감사업부터 진행되는데 이후 15개 부처에 대한 삭감 1회독을 마친 15일까지 107개 사업 총 5707억원(총지출 기준) 삭감을 확정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근혜정부 주거공약인 '행복주택' 예산인데, 2014년 예산 9,530억원 중 5,236억원을 대폭 삭감해 이를 국민임대, 공공임대 주택예산으로 전환했다.

한편 국민대통합위원회 같은 대통령 자문위원회 운영사업과 새마을 운동 관련 사업 등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새누리당이 삭감을 반대한 34개 사업은 삭감이 보류되었다. 이때부터가 야당의 증액사업에 대한 '거래'가 시작되었다. 민주당은 핵심 증액예산으로 ▲무상보육 국고보조율 인상 ▲초중학교 무상급식 예산 지원 ▲학교 비정규직 지원 ▲학교 전기요금 지원 ▲쌀 목표가격 인상 등 다섯 가지를 주장했다.

편향적 안보교육과 불법 대선개입 책임을 물어 '징벌적 예산삭감'의 대상이 된 일부 부처와 새누리당의 반발 등으로 정회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예결소위는 12월 10일 제1차 소위원회를 개의한 이래 모두 열두 차례의 소위원회 심사와 간사 회의를 거친 끝에 2014년도 예산안 수정안을 마련해 31일 제11차 소위원회에서 이를 의결했다. 2014년도 정부 총지출 357조7000억원 중에 5조4046억원을 감액하고 3조5240억원을 증액해서 1조8805억원을 순삭감한 것이었다.

원자력 홍보예산은 묶고 촛불단체 '족쇄'는 풀었다

민주당이 관철한 증액분 3조5240억원은 정부가 지난해 10월에 국회에 넘긴 총지출 357조7000억원의 1%도 안되는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야당몫인 이 1%를 관철시키기 위해 정부여당과 끊임없이 싸우거나 사정하고 조율하면서 '밀당'을 하고 때로는 '연계 처리'를 해온 것이다. 증액은 전적으로 정부의 권한이기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정부가 동의해야 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예산 감액분 5조4046억원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3대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대통합위원회, 청년위원회, 문화융성위원회의 예산과 대통령 사업에 대한 정권 홍보성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이다. 민주당은 국민대통합위원회 1억5500만원, 청년위원회 4억5000만원, 문화융성위원회 2억2000만원 등 총 8억2천500만원을 삭감했다. 또 대통령 핵심사업에 대한 정권 홍보성 예산 40억원을 일괄 삭감했다. 대선 기간과 인수위 때만 '반짝'하고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형식적 위원회와 대통령 사업에 과감하게 칼을 들이댄 것이다.

시민단체와의 공조 플레이로 원자력 예산이 삭감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원전 해외수출 기반 구축사업 예산 4억원을 삭감했으며 무엇보다도 원자력 홍보예산 10억원을 최초로 삭감했다. 원자력 홍보예산 삭감은 지금껏 원전 반대 활동가들의 '역사적 숙원'이었다. 원자력문화재단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이 홍보예산을 토대로 원자력이 깨끗하고 싸고 질좋은 에너지라고 끊임없이 홍보하고,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온갖 로비가 쏟아졌지만 최재천 의원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삭감안을 내 끝까지 관철시켰다.

국회는 통상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을 심의·의결하면서 이러이러한 것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부대의견'을 단다. 이번에도 2013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을 수정의결 하면서 '지하경제 양성화 사후검증'을 비롯한 49건의 부대의견을 달았다. 부대의견은 더러 예산 집행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한다. 2008년 촛불집회로 홍역을 치른 정부여당이 2009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분풀이'성으로 붙인 이른바 '촛불단체 부대의견'이 그런 사례다. 국회는 불법시위에 적극 참여한 단체와 그 구성원이 처벌받은 단체에 대해서는 정부보조금을 지급하지 말라는 부대의견을 붙였고, 기획재정부는 '예산 및 기금 운용계획안 집행지침'에 이런 단체들에 대해서는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없도록 명시함으로써 민주시민 단체들도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없는 족쇄가 돼버린 것이다.

지난 2009~2013년 동안 이 족쇄 때문에 민주시민단체들은 헌법이 정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행사했음에도 불법시위가 된 촛불집회에 참석하거나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도 보조금을 한푼도 못받은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국정감사 때부터 이 문제를 제기한 도종환 의원이 관련 자료를 예결특위에 넘겼고, 최재천 의원이 기재부와 협상하면서 예산심의 종료 이틀 전에 정치적 결단을 촉구해 '촛불단체 부대의견'의 족쇄를 5년만에 풀었다. 기재부가 예산 집행지침에서 보조금 지원 제한항목을 수정해 족쇄를 철폐한 것이다.

SOC 대신에 보편적 복지와 소프트웨어에 집중

2013년 12월 30일 오후 국회 예결위 휴게실에서 새누리당 김광림 간사(오른쪽와 민주당 최재천 간사(왼쪽)가 예산안 증액심사회의를 하고 있다.
▲ 예산안 증액심사회의 2013년 12월 30일 오후 국회 예결위 휴게실에서 새누리당 김광림 간사(오른쪽와 민주당 최재천 간사(왼쪽)가 예산안 증액심사회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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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예산안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처음 제출된 예산이다. 당연히 예산에는 박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공약 이행계획이 담겨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관점에서 정부 예산안은 문제가 많았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번 예산심의에서 ▲재정 건정성(적자예산) ▲대통령 공약(기초연금, 4대중증질환, 보육책임 강화 등) ▲경기회복 위한 재정의 역할 ▲중앙-지방의 상생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같은 원칙을 토대로 최재천 간사는 철저히 보편적 복지와 소프트웨어 쪽으로 예산 배분을 집중했다. 최 의원은 지역구 의원들의 SOC사업 쪽지예산을 원천봉쇄 하기 위해 아예 "국회에서 늘리고 줄이고 할 부분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1조4000~1조5000억원을 보편적 복지에 배정했다. 구체적으로 무상보육 국고보조율을 5%p(3500억원 규모) 추가 인상했다. SOC로 따지면 도로설계나 실시계획 예산 350개 수준이다. 또 서울-지방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지자체 재정지원금으로 2018억원을 확보해 내려보냈다. 최 의원은 "민주당과 저는 SOC보다는 보편적 복지예산, 도로 땅 다리 철도 같은 토건예산보다는 정책예산과 사람예산을 주장했다. 100%는 아니지만 최소한 70~80%는 성취했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도로예산은 특정지역민을 위한 성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로당 난방비와 양곡비(586억원), 학교 냉난방비 지원(1,110억원) , 50년 된 수통 교체와 사병 급식비(333억원 증액), 보육교사 처우개선(12만원에서 15만원으로)과 어린이집 확충(110억원), 그리고 무상급식-무상보육 예산, 이런 것들은 어느 특정지역을 위한 예산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보편적 예산입니다. 입으로만 '전국정당'이 아니라, 저희들은 정책적으로 대한민국 구석구석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접하고 모시는 증거입니다."

예산 편성의 주무부처인 기재부에서도 국회의 이번 예산심의에 대해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의 한 고위 관리는 사석에서 "민주당이 과거와 달리 쪽지예산과 밀실예산을 버리고, 지역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대단히 공정하게 접근해서 야당 역사상 최고로 꼼꼼하고 능력 있는 예산심사를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예산안 처리기한을 넘긴 것을 제외하곤 후한 점수를 주었다. 우선 새해 예산의 본회의 통과 이후 연례행사이자 언론 보도의 단골메뉴였던 의원 외유 기사가 사라졌다. 또 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던 여야 예결위 간사몫으로 챙긴 예산에 대한 비판 기사로 안보였다. 여야 간사들이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센터 건립예산은 '최재천 쪽지예산'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센터' 건립비 40억원이 그것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8000여건의 예산꼭지(사업명)에는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예산이 빠져 있었다. 이른바 '친노' 정치인은 많지만 아무도 챙기지는 않은 것이다. 예산에 반영되려면 새로운 '이름표'를 달아야 했다. 최 의원은 나중에 자신의 블로그에 "제 이름으로 넣은 쪽지예산"이라며 "예결위 간사로서 책임지고 욕먹을 각오하고 맨 마지막에 제기했던 사업인데 새누리당이 동의해줬다"며 여당에도 감사의 뜻을 밝혔다. 노무현재단은 정부 지원으로 165억원, 모금 등으로 385억 원을 각각 조달해 목표 예산인 550억 원을 마련할 계획이다.

예산이 본회의 통과하면 예결위원들은 다음날 새벽에 부부 동반으로 '해외 출장'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에 덧붙여 예산심의 과정에서의 밀실(호텔)예산·쪽지예산도 늘 언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번에도 예결특위에는 예산제도 시찰을 위한 해외출장 예산이 약 1억원 규모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여야 간사는 예결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해외출장 관행의 악습을 끊었고, 해외출장 예산 1억원은 불용처리되어 국고에 반납되었다. 1억원은 적다면 적은 금액이지만 예결특위는 1억원으로 도덕성과 상징성을 확보했다.

이번 예산심의는 호텔방에 안 가도 예산심사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동안 예산심사는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증액 부분은 더욱 그러했다. 호텔방에 책상 하나 들여놓고, 여야 간사와 기재부 예산실장이 모여서 정리해오던 것이 거의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엔 모든 작업이 의원회관 835호실(최재천 의원 방)과 국회 본관의 예결위 회의장 부속실에서 이루어졌다. 이 방은 예산이 예산소위를 통과하고 나서 12월 30일 오후 3시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사실상 반공개로 예산 증액심사를 조정한 새로운 역사의 산실이었다.

올해 예산은 이제 국회의 손을 떠나 이제 시민감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최재천 의원은 예산 관련 자료집을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라고 밝혔다. 국회는 선출직의 특성상 조직의 변동이 심하다보니 앞선 사람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뒷사람에 잘 전달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개인적 경험과 노하우가 기록으로 전승되어 조직적 자산으로 치환될 때 그 조직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이른바 '실세예산' '쪽지예산'을 감시하는 일이 남았다.


태그:#쪽지예산, #촛불집회, #최재천, #부대의견, #원자력홍보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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