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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타워와 그 옆에 보이는 콥틱박물관
▲ 로만타워 로만타워와 그 옆에 보이는 콥틱박물관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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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기르기스(Mar Girgis) 역에서 나오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로마시대에 세워진 바빌론 성의 성문 로만타워(Roman tower)의 잔해다. 그 옆에는 1908년에 개관한 콥트 박물관(Coptic museum)이 있는데 세계 최대 규모의 콥트 예술품을 보유한 곳으로, 이곳에 가면 기독교 수난의 역사와 콥트 미술의 프레스코화 등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은 크게 야외 정원과 박물관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실내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흔하지 않게 관람객을 감시하는 직원들도 있을 정도니 아주 철통같이 보안을 하고 있다. 입장할 때 카메라를 맡기고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돌려주며 야외에서 박물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한다.

정원에서 바라본 박물관 건물의 모습
▲ 콥틱 박물관 정원에서 바라본 박물관 건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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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공예품에 관심이 많은 이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에 푹 빠져있다. 내가 그곳에 가면 언제나 감탄하며 바라보던 것은 바로 나무로 만든 창문과 천장이었다. 스페인 알 함브라궁전의 벽에 새겨진 것들보다 더 정교하고 더 세밀하게 새겨진, 아랍어 캘리그래피로 꾸며진 창문과 벽, 천장 말이다. 우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려내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에서는 그래서 인물화 같은 그림 대신 부드러운 곡선이 아름다운 아랍어를 이용한 캘리그래피와 각종 문양들이 발전했다.

아랍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이다.
▲ 칼리그래피 벽화 아랍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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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물관의 그 아름다운 창문에는 비밀이 있는데, 사실 그토록 섬세한 조각은 외부의 시선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한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을 갈구했을 그때의 여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온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밖에서 바라본 창문. 안을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 콥틱 박물관의 창문 밖에서 바라본 창문. 안을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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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틱 박물관을 나와 마지막 행선지인 공중 교회로 갔다. 바빌론 성채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사실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교회 건물이 지상에서 5미터 정도 떠있었기에 매달린 교회(Hanging Church)라고 불렸다. 교회의 외부·내부는 아직 미처 치우지 못한 성탄 장식들로 시끌벅적했던 축제의 분위기를 여전히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리로 만들어진 바닥이 있어 잠깐의 아찔함도 느낄 수 있다. 복도 벽에는 역대 콥트 교황들의 사진이 죽 걸려있는데, 옆에서 기념품을 팔던 콥틱신자 아주머니 한 분이 "이 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교황님"이라며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신다. 감사하다며 손을 가슴에 얹고 미소를 짓자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손을 젓는다. 이제 올드 카이로를 떠날 시간이다.

공중교회로 올라가는 길, 아직 떼지 않은 성탄절 장식이 남아있다.
▲ 공중교회 입구. 공중교회로 올라가는 길, 아직 떼지 않은 성탄절 장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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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면에서 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리로 만들어 놓은 바닥.
▲ 공중교회 내부 실제로 지면에서 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리로 만들어 놓은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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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이드가 아니야!"

캐나다인 여자 두 명은 올드 카이로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 했는지 좀 둘러보고 오겠다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떴다. 하지만 문제는 조안나의 남자친구인 레오였다. 선글라스부터 발끝까지 누구나 알 법한 명품들로 몸을 감싼 레오는 고마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내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그저 가이드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것은 무엇인지, 안에는 뭐가 있는지, 화장실은 어디인지, 밥은 어디서 먹을 것인지 내게 묻기만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거의 다 알고 있는' 내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다만 그의 태도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마침내 몇 시간을 묵묵히 참던 내가 그들에게 가이드 포기를 선언한 것은 전통시장 칸앤 칼릴리에서 였다. 나는 배고픈 그들을 위해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아야만 했고, 7명의 저녁식사를 위해 전쟁 같은 주문을 끝낸 직후 레오가 다시 내게 말했다.

"소피, 내 콜라캔이 찌그러졌어. 이거 좀 웨이터에게 바꿔달라고 할 수 없어?"

오 맙소사, 마침내 하루 인연을 위한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그를 위해 이곳에 가이드로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우리가 프랑스 파리가 아닌 이집트에서도 가장 복잡한 카이로 시장통 어느 노천식당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게 내 역할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애정과 신뢰가 동반되지 않은 관계에서의 충고는 그저 충돌로 이어질 때가 많으니까. 우선 나는 말없이 그의 캔을 가져다가 카운터에 가서 새 것으로 바꿔주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성의를 담아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이 저녁식사가 끝나면 우리 셋은 따로 다른 곳에 갈 예정이야. 이곳을 더 둘러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아니라면 숙소로 가는 택시를 잡는 것까지 도와줄게."

내게도 일분일초가 소중한 3주간의 여행이었고 엄연히 내 돈과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어 만들어낸 여행이었다. 그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는 나흘라와 이보였다. 하지만 오늘 만난 이에게 단순히 정보 전달자로 자리 매겨진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이집트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것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속상해하는 나를 보던 나흘라가 내 하루를 망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며 따뜻하게 나를 안아준다. 우리는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고 또 같은 방식을 즐길 수 있는 우리만의 단란한 여행을 약속했다. 미안해하는 그들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여섯시 밖에 안 된 걸 뭐. 좀 있다 내 단짝 친구들과 만나서 신나게 새해를 맞이하면 돼! 그렇지?"

칸앤칼릴리 시장의 아주 복잡하고 정신없는 노천식당에서.
▲ 문제의 그 식당에서. 칸앤칼릴리 시장의 아주 복잡하고 정신없는 노천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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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의리 있는 아프가니스탄 친구들

사실 여행 몇 주 전부터 우리는 새해 첫날을 이집트에서 보내기 위해 일정을 조절하고 또 조절해야 했다. 나는 사막에서 고요하지만 신비로운 새해를 맞길 원했고, 이보와 나흘라는 카이로라는 대도시에서의 불꽃축제와 어우러질 화려한 새해 맞이를 기대했다. 그들은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고 나는 카이로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불꽃놀이 따윈 열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수많은 대화 끝에 결국 우리는 카이로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

카이로에 도착해 전화를 개통하자마자 내가 연락한 사람은 네 명이었다. 내 이집션 언니 샤이마와 나의 단짝 샴스와 하룬 그리고 귀여운 힙합보이 시코. 그 중 새해를 함께 맞이하기로 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샴스와 하룬은 3년 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말솜씨가 좋고 영어가 유창한 하룬에 비하면 샴스는 말수가 적고 영어 또한 거의 구사하지 못 했다. 나 또한 그랬다. 새로운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비해 3년 전 나의 영어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데다 두려움까지 더해져 소통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인사를 건네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 무서워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비교적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던 유러피안 학생들과는 달리, 아프리카 각지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다른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편안했고 또 유쾌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아랍어,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손으로 눈으로 표정으로 마음으로 언어의 부족함을 메웠고 심지어는 소통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나와 샴스는 단짝이었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날 위해 이집트 친구 무함마드는 차를 몰고 샴스, 하룬과 함께 우리를 데리러 왔다. 2년 만에 마주한 그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3년 새에 나와 샴스의 영어가 많이 늘어 더욱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만 빼면 그의 수줍은 미소 조차 여전했다. 그저께 만났던 것처럼 편안했고 10년 만에 만난 것처럼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샴스는 말수가 적은 대신 마음이 깊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듣고 기억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날도 2년 만에 와서 가장 먹고 싶은 것으로 이집트 전통 음식인 "쿠샤리!!"를 외치던 날 위해 저녁을 먹으러 샤와르마(케밥)를 먹으러 가는 길에 일부러 쿠샤리 가게 앞에 차를 세우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길 위에서 고깔모자를 보며 무심코 했던 말에, 잠시 후 아무도 모르게 여섯 개의 고깔모자를 사와 우리를 놀라게 해 준 사람이었다.

이후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나와 이보를 위해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고 요리를 하고 아프가니스탄 차를 내어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늦어져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루를 그곳에 머물게 된 날 위해, 그러나 내가 알게 되면 끝까지 만류할 것임을 알고는 몰래 친구와 나가 그 늦은 밤 시장까지 가서 깨끗한 새 이불과 칫솔을 사다 주었던, 내게 새로 산 이불을 깔아놓은 자기 침실과 난로까지 내어주고 자신은 정작 소파에서 잠들던, 진심이 아니면 절대 생각해 낼 수도 없을 깊은 마음 씀씀이에 내 가슴 한편을 울리던, 언제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우리를 마디에서 제일 맛있다는 샤와르마(케밥)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랍어로 카밥이라고 하는 케밥은 사실 '꼬치에 끼워 구워낸'이란 뜻으로, 그렇게 만든 모든 음식을 포함하는 총칭이었고, 우리가 흔히 터키식 케밥으로 알고 있는 넓적한 빵에 얇게 썰어낸 고기와 마요네즈를 넣어 돌돌 말아주는 음식은, 아랍에서는 보통 '샤와르마'라고 불렀다. 샤와르마를 먹고 있는데 샴스가 그새 어디서 사 왔는지 무심결에 예쁘다고 했던 고깔모자를 여섯 개 사서 왔다. 테러리스트는커녕 세상에 이런 로맨티시스트는 또 없을 거다.

아랍 국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샤와르마.
▲ 샤와르마 아랍 국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샤와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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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주나요?

내가 샴스나 하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언제나 듣는 이들의 첫 반응은 "뭐? 아프가니스탄?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한편으론 적잖이 속상했다. 그들 중 진짜 아프가니스탄 사람을 만나 그들을 경험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모든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내 친구들 같기만 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중엔 무서워 보이지만 점잖은 살라피 아저씨도, 정말로 위험한 이슬람 과격 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옆집 아줌마처럼 정 많고 푸근한 무슬림 아줌마도 있고 내 동생처럼 말 안 듣는 꼬마 아이도 있을 터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도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모두가 존재하지 않나.

어디를 가도 사는 방식, 생각, 살아온 환경이 다를 뿐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았다. 그렇기에 사실 감히 같은 인간이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문화와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시각적 차이가 존재하고, 그 어떤 것도 절대적 사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그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이 국적도, 인종도, 외모도, 피부색도 아닌 그 사람의 인간성, 그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게 샴스는 그냥 샴스였다. 내 주변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평화를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성숙한 영혼을 가진 친구 말이다. 

오로지 바람의 힘에 의해 나가는 돛단배, 펠루카.
▲ 나일강 위의 펠루카 오로지 바람의 힘에 의해 나가는 돛단배, 펠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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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식사 후 무함마드는 나일강으로 차를 몰았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나일강은 여느 때보다 붐볐다. 주차를 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 55분이다. 우리 계획은 여유롭게 펠루카 위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거였는데, 이거 왠지 길 위에서 새해를 맞을 것만 같다. 게다가 코앞에 나일강이 보이긴 하지만, 배를 빌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때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Guys, Run!"(얘들아, 달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선착장을 향해 나일강을 끼고 달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3분쯤 달렸을까. 앞에서 달리던 무함마드와 나흘라가 갑자기 달리기를 멈춘다. 그러곤 뒤를 돌아 심각한 표정으로 우릴 보며 다가왔다. 차에 뭘 두고 왔나 싶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함마드를 쳐다보는데, 그가 잠시 후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보고 말했다.

"You know what? Sophie? It is too late already.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is, We are here together!!! Happy new year guys!"
 "우린, 이미 늦었어, 정말 슬프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바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거야! 얘들아, 해피 뉴이어!"

그제야 시계를 보니 2013년 1월 1일 00시 00분이다. 우리는 가쁜 숨을 고르고 허탈하게 웃으며 서로 포옹을 주고받았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지금 이 아름다운 나일강 옆에 함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새해를 길 위에서 맞았다. 그까짓 펠루카는 이 아름다운 포옹이 끝나도 여전히 저 나일강 위를 떠다닐 테니까.


태그:#카이로, #이집트, #펠루카, #올드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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