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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바라본 아차도
▲ 아차도 배에서 바라본 아차도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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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서울 강서구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강화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외포리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타고 1시간 30분 남짓. 4시간을 달려서 아차도에 도착했다. 주민 34명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섬 아차도, 주문도나 볼음도 사이에 끼어 있으며 작고 외진 섬이라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학교 선배 겸 교수님이었던 설치미술 작가인 고영택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고영택 작가) 이곳 아차도를 처음 방문 한 것은 2012년 7월. 그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지역공동체 만들기 기획공모)을 받아 이곳 아차도 주민들과 만난다. 그와 그의 작가동료들(박유미, 강민채, 김다루, 김준아, 홍유경)은 아차도에서 한 달 이상을 거주하며 '섬의 노래'라는 음반을 제작하였다. 모든 가시적인 것을 배제하고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이야기를 그저 열심히 듣고 담아내어 그들의 악기가 되어보고자 했던 작업. '섬의 노래'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들 소개하는 발표회는 2012년 11월 17일 6시, 아차도교회 선교관에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열었다. (네오룩 자료)

한 달 이상 그곳 섬마을에서 머물며 그와 동료들이 함께 했던 작업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5월 초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내가 본 작가와 아차도

고영택 작가 함께 3일 동안 머물게 된 집은 송동순(55) 어머님이 혼자 사시는 작은 집이었다. 5평 남짓한 작은 현관 베란다에선 갓 잡은 바지락과 농사를 지으며 수확한 농작물들을 말리고 있었다. 거실에는 TV와 피아노, 딸이 그렸다는 작은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다. 딸이 미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대학을 보내줄 수 없던 형편으로 딸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님. 그럼에도 자신의 딸은 스스로의 힘으로 전문적인 학원 교육도 받고 지금은 취직까지 하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셨다. 그리고 딸과 모든 가족이 떠난 작은 집에서 어업일과 농사일로 피곤한 몸과 마음을 피아노를 치며 푸시던 모습은 내가 아차도에서 본 첫 날의 기억이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 고영택 작가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작은 손가방에다가 수첩과 카메라, 녹음기를 들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작가는 말했다. 매일 이렇게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며 함께 밭일이든 어업일이든 한다고,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멀리 어머님 한 분이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 뭐 심으세요~?" 너무나 친근하게 건네는 그의 말에는 자연스러움과 정이 묻어났다.

반갑게 그 말에 대답하는 어머님, "왔구나~, 머 심긴! 옥수수고, 호박이고, (생략)" 몇 년은 함께 알아왔을 것만 같은 대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민들에 대한 걱정과 긴장이 풀려 버렸다. 이어지는 너무나도 소소하고 일상적인 대화들... (주절주절)

고영택 작가가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서 끌고가는 할머니와 걸어가고 있다.
▲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와 작가 고영택 고영택 작가가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서 끌고가는 할머니와 걸어가고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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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님은 어느새 텃밭 일을 모두 마쳤는지 옆에 있던 유모차를 끌고 움직이신다. 이곳에서는 유모차가 이동수단이라고. 나이가 들어서 허리가 굽은 어머님들은 항상 이렇게 유모차를 끌고 다니신다고 작가는 말했다. 가만 보니 유모차는 굉장히 편리한 수단이었다. 허리를 지탱해주는 지팡이 역할도 하고 함께 물건을 넣고 나르기에 굉장히 편리해 보였다. 이래서 유모차는 이곳 아차도 섬 모든 집 앞에 한 대씩 서 있었다.

아차도에 다녀오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숭어를 잡던 어부이다. 내가 그를 친숙한 언어로 아저씨나 할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어부라고 한 이유는 그의 분위기 때문이다. 그는 말이 없는 분이었다. 조용하게 그물을 쳐둔 바다를 응시하던 어부였다. 고영택 작가 또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올해부터라고 한다. 말이 없던 그가 1년 프로젝트를 마치고 2년 프로젝트를 위해 돌아온 작가 고영택을 반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정'때문 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 어부 말고도 아차도에 비교적 젊은 나이의 한 형제가 살고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 고영택 작가의 일행을 보고서 탈북자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들 또한 작가와 1년 동안 말을 붙이지 않고 경계하곤 했다. 형제가 작가와 대화를 시작한 것은 올해부터라고 한다.

그날은 숭어가 가방에 가득찼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을 때가 있는 반면 풍족하게 잡을 때도 있다. 그날, 나는 그를 처음 보았지만 주름진 얼굴에 입가에 희미하게 띤 미소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의 풍족함은 그가 살아가는 행복의 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물에 숭어가 여러 마리 걸렸다. 돌아가는 길에 갖고 온 가방이 너무 비좁지만 마음은 넉넉했을 그.
▲ 그물에 걸린 숭어를 잡는 어부 그물에 숭어가 여러 마리 걸렸다. 돌아가는 길에 갖고 온 가방이 너무 비좁지만 마음은 넉넉했을 그.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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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차도에 간 2박 3일, 작가는 밤마다 '한 분'의 인생 이야기 취재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보았을 때 그녀의 정원 가꾸는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차도 최고의 정원사였다. 아기자기하게 피어있는 꽃들 너머로 붉게 익은 단풍나무 밑에 평상까지. 매일같이 농사와 어업일에 종사하시는 할머니께서 이렇게 정원까지 가꾸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이다. 그녀의 집안 또한 꽃이 활짝 핀 화분으로 가득하다. 꽃향기가 방안을 장식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너무나 굴곡이 많고 험난한 실타래였지만 이야기 속에서도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할머니는 작가 앞에서 자신의 일생 이야기를 거침없이 토해 내셨다. 그 현장은 살아있는 소통의 현장이었다. 진솔한 소통이 있다면 분명 새로운 소통을 만들어낸다. 그 파장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공미술

아차도 최고의 정원사 할머니. 그녀의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 그녀의 정원 아차도 최고의 정원사 할머니. 그녀의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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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 녀석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최근 들어 붐처럼 일어나고 있는 공공미술, 마치 모든 풀리지 않는 사회적 문제 지점에 투여되는 최후의 수단인양 뿌려지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례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성공했다는 프로젝트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자칫 수혜냐 공공이냐 라는 혼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며, 이것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오묘함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의 명료함이 보이질 않아 안개 낀 활동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한정된 금액과 한정된 기간 때문에 주민들에게 자칫 강요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문제에는 항상 관계가 껴 있었다.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어떤 의미 있는 프로젝트와 활동도 퇴색되기 마련이었다.

고영택 작가는 그러한 공공미술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는 계획과 고민의 단계를 거쳤다. 관계의 중요성이 과연 공공미술에서만 필수적인 요소일까. 관계는 모든 인간사회문화에 깊은 토대이며 하며 본질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어떤 이상적인 정책도 어떤 예술적인 실험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차도에서의 일 년은 그들에게 관계를 쌓는 단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관계를 쌓아가는 작업과 동시에 그것을 확장시키는 전략적인 작업을 하였다. 한국의 모든 정책 또한 이처럼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면 곳곳에서 피를 토하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마련된 그들의 관계는 앞으로의 이어지는 일 년의 현실적 이상향을 그려가는 초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아차도는 과연 10년 후에 어떤 섬이 되어 있을까. 궁금하다.


태그:#아차도, #공공미술, #고영택, #이승훈,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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