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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엄마는 천상 여자세요” 딸 성구씨의 말이 딱 맞다. 집앞에서 사진 한장 찍자고 청하니 스웨터에 자켓에 머플러, 모자까지 찬찬히 챙겨 걸친다. 참 고우시다.
 “우리 엄마는 천상 여자세요” 딸 성구씨의 말이 딱 맞다. 집앞에서 사진 한장 찍자고 청하니 스웨터에 자켓에 머플러, 모자까지 찬찬히 챙겨 걸친다. 참 고우시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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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형태가 그대로인 대흥의원 앞에서 젊은 이수 여사가 고 윤영수 원장과 나란히 앉아 있다.
 지금도 형태가 그대로인 대흥의원 앞에서 젊은 이수 여사가 고 윤영수 원장과 나란히 앉아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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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사모님'이 남편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의료기구 앞에서 33년만에 활짝 웃었다.

이수(89)씨, 예산군 대흥면 최초의 민간의료기관인 대흥의원 안주인이었던 그가 남편이 쓰던 의료기구들과 병원 집기들을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해오다 슬로시티대흥의 달팽이미술관 개관전시에 함께했다.

대흥의원 역사전시를 둘러본 이들은 한결같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옛 의료기구들을 보며 추억에 잠긴다. 그리고 이 귀한 자료를 33년동안이나 고이 보관해온 이의 정성에 감복한다.

"원래는 병원자리에 전시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내가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서울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는 바람에 못하고 말았어요. 이렇게라도 전시를 하니 너무나 기쁘고 뿌듯해요. 슬로시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걸려있던 대흥의원 간판.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걸려있던 대흥의원 간판.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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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가 다 된 나이에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모습의 이수씨가 말한다. 말씨도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병원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대흥면 동서리 초입에 위치해 역사마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옛 대흥의원. 지금은 이수씨와 막내딸 윤성구(61)씨가 살고 있다. 이 집은 일제 때 지은 건물이라 건축재료와 건축방식 현관문 앞에 심은 향나무 두 그루까지 모두 일본풍이다. 그 또한 우리 역사이기에 건물이 잘 보존돼 대흥의 근현대사를 길이길이 보여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면 좋을 듯 하다.

이수씨 역시 그런 염원으로 집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온전히 보존해오다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3년 전에 방 일부를 개조했다고 한다. 그래도 예전에 진료실과 입원실로 쓰던 방들과 외부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대흥의원은 1930년대 초 문을 열어 1980년 고 윤영수 원장의 타계로 문을 닫을 때까지 광시, 신양, 대흥, 응봉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던 의료기관이었다. 그 외 지역은 예산읍에 있던 대동병원과 순천병원(지금의 박외과)으로 갔다고 한다.

"그때는 농약을 마셨다거나, 다리가 부러졌거나, 귀에 고름이 찼다거나, 아기를 낳은 임산부까지 죄다 오는 종합병원 같은 곳이었죠. 학생들 예방접종도 왕진가방 들고 학교에 가서 하던 시절이였으니까요."

이수씨가 객담검사기, 위세척기, 산소호흡기 같은 의료기기들과 처방전, 사망진단서, 의학사전 같은 의료문서들은 물론 왕진가방 등도 버리지 않고 보관해온 이유에 대해 한 방송에서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풀이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 때문 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흥의원에서 쓰던 사망진단서와 진료일지, 의학사전 등 문서와 책자들.
 대흥의원에서 쓰던 사망진단서와 진료일지, 의학사전 등 문서와 책자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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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영수 원장의 손때묻은 왕진가방. 큰 것은 산부인과용이고 작은 것은 일반진료용이라고 한다.
 고 윤영수 원장의 손때묻은 왕진가방. 큰 것은 산부인과용이고 작은 것은 일반진료용이라고 한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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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의료기관에서 쓰이던 산소호흡기(왼쪽)와 붕대통(오른쪽) 등 기기들.
 과거 의료기관에서 쓰이던 산소호흡기(왼쪽)와 붕대통(오른쪽) 등 기기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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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을 함께 한 대흥의원

예산군과 인근 시군의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 이수씨는 유명하다. 역사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알게 모르게 지역의 역사연구에 많은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부흥군과 임존성, 봉수산(대흥산) 관련 학술행사장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젊은이들보다 더 열심히 발표를 듣고 토론에도 나서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교수들도 광시 마사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흥 동서리로 시집와 평생을 살며 선대로부터 듣고 보아온 이 산증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연구 자료로 삼았다.

이수씨가 임존성 역사에 적극 나서게 된 계기가 있다.

"어느날 신문을 보니 '어느 마을에서 형제가 힘자랑 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간단히 나왔더라고요. 봉수산 묘순이 바위얘기잖아요. 제대로 바로잡아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십 몇 년 전 당시 예산문화원 이항복 원장과 함께 봉수산 역사를 알리는 마당극의 극본을 쓰고 복장도 직접 고증해 공연을 했는데 그게 지금의 백제부흥군위령제의 효시가 됐다고 한다. 당시 공연장에 온 관객들에게 콩죽을 쒀먹였다고 하니 먹거리와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지역축제의 시작이기도 하다.

향토사학자들에겐 유명인사

딸 성구씨는 "제가 학교 다닐 때 국사선생님이 수업하시다가 문제가 막히면, 어머니께 배워오라고 하셨을 정도였어요"라며 "학교라고는 문턱도 못 가보신 분이 연대기를 외우시고 왕조 역사를 줄줄이 꿰셨다니까요"라고 자랑한다.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사상을 가졌냐면 '여자는 접시 열 개를 못세어야 잘산다'고 하셨어요. 운동회날까지 학교에 놀러갈까봐 매질을 할 정도였죠. 글자는 남동생 배울 때 어깨넘어 깨쳤어요."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에 글씨 연습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소녀의 학구열은 지금까지 긴 세월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수씨의 방에는 책들이 많다. 두꺼운 역사사전, 인물사전부터 단행본 책까지. 파일철도 여러 권이다. 편지든 안내문이든 신문이든 읽다가 특이하다 싶은 것은 스크랩해 모아둔다고 한다. 벽 한켠에는 세계지도와 한국지도가 나란히 걸려있다. 참 대단한 할머니다.

시간이 가도 늙지 않는 어머니의 학구열에 딸 성구씨는 머리를 흔든다.

"엄마는 지금도 여행을 가시면 하나라도 더 보고 공부하려고 하세요. 그래서 단체여행을 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기도 한다니까요."

남편의 병원일을 도울 당시에는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환자는 많고 일손은 딸리니 나도 보조를 해야 했는데, 약품이 모두 영어로 쓰여있어 알 수가 있어야지. 내가 약도 못찾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밤에 알파벳 26글자를 모두 외워버렸지."

아무래도 보통머리는 아닌 듯한데, 지금은 예전같지 않다며 속상해 한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눈이 아파서 이제 오래 보기가 어려워요. 가고 싶은 곳, 보고싶은 것들이 많은데 그것도 예전처럼 쉽지 않고…."

그 중에 가장 아쉬워서 꼭 하고 싶은게 있느냐고 물으니 "지난 게 다 아쉽죠. 수의 전시회 했을 때 어떤 교수님이 인사동에서도 하자고 했는데 그걸 못한 게 두고 두고 아쉬워"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고 보니 2001년 예산군문예회관에서 열린 수의전시회 당시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든 남녀 전통수의도 화제였지만, 출판사와 일일이 연락하면서 만든 도록이 많은 이들에게 감탄을 줬던 일이 있다.

이수씨는 도록 앞쪽에 위성사진으로 본 임존성의 모습과 충청도읍지(대흥군)의 옛 지도를 수록하고, 임존성에서 바라본 예당저수지 사진, 임존성 유구 배치도를 넣어 지역역사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 평범치 않은 할머니, 이수씨는 언제까지나 대흥의 역사를 증거하며 옛 대흥의원에서 살아 가실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예산지역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예산군, #대흥의원, #이수, #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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