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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蘇塗)'. 삼한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내던 성지로, 여기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이곳은 워낙 신성한 곳이라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했다. 

대한문 앞에서 한 청년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란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대한문 앞에서 한 청년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란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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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윤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12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농성촌 철거 항의집회 '대한문에서 만나'에서의 발언을 통해, 쌍용차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 이곳 덕수궁 대한문 앞을 '소도'에 비유했다.

양성윤 위원장 직무대행의 말처럼, 그들을 응원하고 함께 싸우는 모든 시민들에게 덕수궁 대한문 앞은 실로 '소도'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그 생존권을 되찾고자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에 의해 '죄인'들이 되었다. 그 '죄인 아닌 죄인'들은 대한문 앞에 '소도'를 설치하고 '인간 기본권의 신성함'을 알리고자 끊임없이 투쟁했다. 그리고 이 '소도' 안으로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연대 방문이 이어졌다.

세상 속에서 지친 시민들도 이 '소도' 에서만큼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보며 희망을 얻었다. 이 '소도'에 지난 4일 새벽, 서울시 중구청 직원들과 남대문경찰서 경찰들이 나타났다. 분향소 및 천막들이 순식간에 철거됐다. 그 자리엔 화단이 들어섰다.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건 플래카드. 이곳이 경찰 및 공무원 구사대에 의해 불법으로 침탈당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건 플래카드. 이곳이 경찰 및 공무원 구사대에 의해 불법으로 침탈당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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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철거가 이뤄진지 8일째인 12일 저녁에도 '소도'는 유지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미사는 평온했다. 미사 도중 '소도' 안의 사람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기자도 얼떨결이나마 미사를 드리던 시민들과 함께 인사를 나눴다. 울분에 가득차 있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화단에는 고동민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 기획팀장이 앉아 있었다. 고 팀장의 손엔 이번 분향소 철거사태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는 피켓이 들려있었다. 고 팀장은 쌀쌀한 날씨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꿋꿋이 앉아 있었다. 화단 주변엔 연대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 팀장은 그들 하나하나와 활기차게 대화를 나눴다.

일부 시민들이 고 팀장 및 그 주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비롯해 먹을거리를 갖다 주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에 6시 55분경, 소란이 발생했다. 경찰들이 노동자 몇몇을 둘러싸고 있었다. 둘러싸인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것은 집회 때 쓰일 스크린 설치도구였다. 바로 근처에 있던 노동자에게 어찌된 상황인지 물어봤다.

그는 경찰이 집회용 스크린 설치하는 게 신고가 안 됐다는 명목으로 도구를 갖고 들어오려는 걸 막았다고 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단 사실도 덧붙였다. 경찰 측의 감시는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나마 추가적 마찰 없이 스크린 설치는 이뤄질 수 있었다.  

고동만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 기획팀장이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화단 안에 앉아있다. 플래카드엔 '불법적인 분향소 철거 돕는 경찰? 이것이 민생인가? 박근혜 정부 책임져라!'라고 쓰여 있다.
 고동만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 기획팀장이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화단 안에 앉아있다. 플래카드엔 '불법적인 분향소 철거 돕는 경찰? 이것이 민생인가? 박근혜 정부 책임져라!'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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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부터 대한문 시민음악회가 시작됐다. 출연진은 바리톤 주영규 씨와 소프라노 최정심, 권재숙 씨로 이루어졌다. 이 공연 중반에 소프라노 이중창으로 그 유명한 '넬라 판타지아'가 울려 퍼졌다. 이미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통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넬라 판타지아'. 이 노래 자체의 유명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노래의 가사 내용은 익숙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일부 가사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이날 집회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 행위일 듯해서 인용한다.

나는 환상 속에서 모두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본다.
나는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영혼을.
나는 환상 속에서 밤조차도 어둡지 않은 밝은 세상을 본다.

대한문 시민음악회에선 성악가들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
▲ 성악가들의 공연 대한문 시민음악회에선 성악가들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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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0여 명의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성악가들의 공연은 마무리됐다. 이어서 8시경부터 사실상 이날 집회의 '본판'인, 민주노총 주최 투쟁문화제가 시작됐다. 이 자리엔 최근 3주째 파업 중인 KBS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해, 각지의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했다. KBS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최저임금(2013년 4860원)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는 사회자의 소개가 있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양성윤 위원장 직무대행의 발언을 마저 소개해야겠다. 그는 "민중의 지팡이를 민중에 대한 몽둥이로 쓰면서 이곳(소도)에 침투하고 있는 경찰들은 이곳에 들어와선 안 된다"고 했다. 이어서 "노동자들을 침탈 및 연행하고 따돌렸던 경찰들은 오래 못 살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신성한 지역이다"란 발언을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이곳 대한문 앞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모순이 응축된 곳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곳이 "정치 무능,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사회적 장치의 부재, 노사관계의 실종, 이 모든 것들이 모인 곳"이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이 정신 차리고 힘있게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힘과 함께, 정치권이 조속히 쌍용차 국정조사를 실시할 것을 강조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양동규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쌍용차에서 노동자들을 몰아내는)과정에서의 문제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면서, "회계조작, 먹튀자본(쌍용차를 인수한 후 단 한 푼의 투자도 없이 기술만 빼가고 발을 뺀 상하이자동차를 일컬음)의 기술유출, 그리고 고의부도를 내고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 등을 문제의 예시로서 들었다. 이어서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당시 내걸었던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노래패 '꽃다지'의 공연이 있고 난 다음, 집회 참가자들은 지난 4일의 분향소 철거 이후 처음으로, 다시금 분향소를 설치하고자 했다. 그 순간, 경찰 측이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경찰의 검거 지시 방송이 떨어진 데 이어, 대한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약 80여명의 경찰 병력이 순식간에 집회 장소로 몰려들었다.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분향소 천막 설치가 이루어진지 단 3분 만에 경찰 및 중구청 공무원 구사대들은 분향소를 다시 철거했다. '소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들은 분향소 설치를 가로막은 경찰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집회 참가자 중 천막 철거를 막고자 했던 3~4명이 연행됐다. 

그럼에도 집회는 중단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의 발언이 있었다. 김 지부장은 평소보다 더 결기 어린 목소리로 남대문경찰서와 중구청 측의 침탈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지난 6일 김 지부장이 중구청 직원들의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 물품 수집을 막은 것에 대해 공무집행방해죄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내세우며 연행해갔다. 그러나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 의해 김 지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됨으로써 김 지부장은 석방됐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수많은 시련 때문인가, 김 지부장의 발언은 더욱 분노가 응축되고 단단해져 있었다. 김 지부장의 결의발언을 끝으로 우여곡절 많았던 이날 집회는 마무리됐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경찰의 침탈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다.
▲ 연설하는 김정우 지부장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경찰의 침탈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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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경찰의 농성촌 철거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유지되고 있는 '소도', 그리고 그 '소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13~14일엔 이곳 대한문 앞 '소도'에 '캠프'가 차려진다. 쌍용차 문제를 끝까지 해결코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1박 2일 캠핑을 벌인다.

앞으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끊임없는 공권력의 개입과 침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곳을 지켜왔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이렇게 꿋꿋이 '소도'를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서, 조금씩 더 희망을 갖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태그:#쌍용차, #남대문경찰서, #중구청, #대한문,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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