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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없는 결혼식을 올린 조카 결혼식 모습. 신랑 아버지가 성혼선언문을 낭독한 후 동생 부부가 축가를 부르고 신랑신부가 답가를 불렀다.
 주례없는 결혼식을 올린 조카 결혼식 모습. 신랑 아버지가 성혼선언문을 낭독한 후 동생 부부가 축가를 부르고 신랑신부가 답가를 불렀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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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일까. 오전 8시, 동생이 사는 곡성을 떠난 버스가 충남 홍성까지 가는 길가에는 가을이 주는 기쁨이 넘쳐 났다. 산에는 단풍이 짙게 물들고 가지런히 자란 배추와 아직 베지 않은 벼, 시골집 지붕위에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고속도로 주변의 노란 국화가 하늘거리고 풀밭에 높이 자란 억새가 손짓하는 모습이 한 해를 마감하는 결실의 계절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겨울 추위와 한여름 무더위를 이기고 이제 씨앗을 남기기 위해 준비하는 건 자연이 주는 섭리다. 결혼은 청년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잘 다듬어진 고속도로를 따라 길옆에 펼쳐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스쳐가는 파노라마 속에서 문득 동생과 내가 살아온 세월이 겹쳐진다. 어릴 적 7남매가 사는 가난한 우리 집은 언제나 배고팠다. 그래도 형제 간에 욕 한 번, 싸움 한 번 안 하고 자랐으니 그것도 복이다.

주례 없는 결혼식, 거참 괜찮네

가을이 절정에 오른 수덕사 모습. 절에 걸려있는 멋진 글귀가 조카 결혼식을 더욱 축하해준다. 절에 걸린 '인연설'의 한 글귀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라"
 가을이 절정에 오른 수덕사 모습. 절에 걸려있는 멋진 글귀가 조카 결혼식을 더욱 축하해준다. 절에 걸린 '인연설'의 한 글귀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라"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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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터울인 동생은 돈이 없어 중학교만 졸업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발 기술을 배우고 정육점에서 일하던 동생은 나이가 들어 군대를 갔다. 당시 일병 월급이 680원 하던 시절,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동생은 월급을 모아 전기밥솥을 어머니께 선물했다.

1970년대 말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졸병 때 배가 얼마나 고픈지 잘 안다. 훈련 중 나눠주는 맛없는 건빵 하나라도 더 타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에 동생은 배고픈 걸 참고 월급을 모아 전기밥솥을 사와 식구들을 감동시켰다.

학교 갈 돈이 없어 제대 후 1년간 공장을 다녀 모은 돈으로 대학을 다녔던 나는 친구들한테 술 한 잔 살 수도 없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피하곤 했다. 과외도 금지된 시절이라 방학 때면 노가다를 나가 한 학기 학비를 충당하던 시절이다.

자취생 시절 반찬을 가지러 토요일 날 시골집에 가면 "형! 돈 없지?" 하며 주머니에 용돈을 집어 넣어주던 동생. 주머니 속 돈을 만지며 가슴이 먹먹했었다. 돈을 벌겠다고 사우디에서 일하다 귀국했을 때 조그만 선물을 잊지 않았던 동생. 태어나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던 동생은 그 어떤 친구보다도 각별한 사이다. 그 동생이 둘째 딸을 시집 보낸다.

사회자가 "오늘 결혼식은 주례없는 결혼식"임을 선포한다. 말은 들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기는 처음이다. 신랑 신부의 두 어머니가 손을 잡고 입장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신랑의 아버지가 성혼문을 낭독했다.

떨리고 틀려도 상관없다, 알곡 가득 찬 삶 살길

수덕사로 가는 길. 가을이 절정에 올랐다
 수덕사로 가는 길. 가을이 절정에 올랐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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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 없이 잘 커준 아들이 고맙고, 예쁘게 키워 딸을 보내준 사돈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인사에 이어 조카가 키워준 동생 부부에게 감사 편지 낭독을 했다. 감개무량하다. 너무나 가난해 동생 집에 갈 때마다 안쓰럽던 조카다.

이제 조카는 건강하게 자라 서울 중견회사에 취직해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든든하게 해낸다. 신랑도 키워준 부모에게 감사편지를 낭독한 후 축가 차례가 왔다. 누가 축가를 부를까 궁금해 하는 하객들. "신부 부모님께서 직접 축가를 불러준답니다"는 사회자의 말에 하객들이 모두 "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술 한 잔하고 나서 기분 좋으면 노래를 곧잘 부르던 동생과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노래를 불러 상도 탔던 제수씨가 노래를 한단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오고 제수씨가 먼저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를 부르고 동생은 화음을 넣었다.

자신 있다고 프로그램에 넣었지만 사돈과 많은 하객들이 모인 곳이라 약간 떨린다. 하지만 틀리고 떨리는 게 무슨 문제인가? 새 출발하는 자식들의 앞길을 남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축하해준다는데.

신혼 부부는 답가를 부르겠다고 나섰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는 신혼 부부. 떨려도, 틀려도 상관없다. 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그들에게 격식은 껍데기 일뿐이다. 그래! 알곡이 가득 찬 인생을 살아라.

전세 버스를 타고 전라도 곡성에서 올라온 하객들은 멀리 충청도 홍성까지 왔으니 수덕사를 보고 가잔다. 수덕사 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는 길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뒤덮이고 단풍 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수덕사에 여행온 신혼부부. 독일에서 결혼하기 위해 입국했다고 한다
 수덕사에 여행온 신혼부부. 독일에서 결혼하기 위해 입국했다고 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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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국남자가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동반하며 절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다정해 보여서요"라며 카메라를 들이대자 결혼하기 위해 독일에서 온 부부라며 "노 프라블럼"이라고 외친다.

절 구경을 마치고 곡성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본다. 가을보다 더 높은 하늘이 유난히 아름답다. 창밖에 흔들리는 억새풀에도 사랑이 가득하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과 '문화촌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주례없는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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