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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일찍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주장했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정치집단의 동질성은 오로지 적에 대한 동일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상대적 통일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사실상 정치적인 것은 공동체의 내부문제라기보다 경계구축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는 외부를 향했던 정치가 내부로 침투하면서 내부의 이질적 존재를 섬멸하려는 '내란'의 전형적 형태를 보여줬다. 정치의 최고 형태인 전쟁은 그렇게 하나의 집단을 두 개의 진영으로 정확히 갈라놓았다. 이쯤 되면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의 언변에서만 목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분당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강기갑 대표가 3일 국회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강 대표는 "혁신재창당을 실현하고 분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저의 불찰과 부족함으로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이에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들과 당원들께 석고대죄하고 백배사죄하는 마음으로 단식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통합진보당이 분당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강기갑 대표가 3일 국회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강 대표는 "혁신재창당을 실현하고 분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저의 불찰과 부족함으로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이에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들과 당원들께 석고대죄하고 백배사죄하는 마음으로 단식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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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갑 대표는 곡기를 끊는 마지막 시도를 감행했지만 결국 분당을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소위 '신당권파'는 분당을 준비하기 위해 자파 비례의원을 '해당행위'라는 웃지못할 명분으로 당기위에 제소하고 스스로 제명(일명 '셀프 제명')시키려는, 시대의 촌극까지 시도 중이다.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

5월 초부터 시작된 통합진보당 사태는 5개월째로 접어드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평행선을 달려오고 있다. 한쪽은 '이석기 제명'이라는 프레임에서 한 치도 물러섬이 없고, 다른 쪽은 억울함만 호소 중이다. '혁신'의 언어는 남발되고 있지만 양측이 만 4개월 동안 한 일이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지켜보는 이들은 조금씩 관점을 바꿔 생산적인 역할을 해내기를 주문하지만, 당사자들은 자신의 프레임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한 어느 것도 이뤄질 수 없다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평행선이 지루하게 지속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도 한 몫 했다. 호시탐탐 진보세력의 허점을 노리는 보수언론과 진보진영의 속사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는 언론의 보도태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진보언론'이 이번 사건에서 보인 모습은 민망할 지경이다. 대부분의 진보언론은 평행선 긋기의 당사자가 되어 프레임 전쟁의 적극적인 지원군을 자임하면서 이성을 감정으로 대체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다. 사건의 복잡성은 처음부터 무엇이 팩트(fact)인지 확인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부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초기에 알려진 단편적인 내용들은 누가 보더라도 '경악' 그 자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언론이 그것을 규탄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종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언론이 자신의 논조를 고수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민번호 뒷자리가 같은 문제나 소스코드 수정 뒤 득표율 상승과 같이 심각한 부정사례로 보도된 내용들이 후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도 이를 전혀 바로잡지 않거나 특정 진영에 불리한 여러 내용에는 침묵하는 등의 편파성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언론이 통합진보당 내의 모든 잘못을 드러내고 성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보다 당사자 간의 진실공방과 감정에 근거한 갈등만 부추겼다. 다른 정당의 유사한 문제를 다루는 데 나타난 명백한 이중 잣대 역시, 그 주체가 보수언론이었다면 한목소리로 비판했을 것들이다.

어쨌거나 분당은 기정사실로 되고 있고, 소위 '신당권파'는 결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기존의 적대 프레임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분당에 대한 최대한의 정당성을 동반해야만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짐은 자명하다. 물론 구당권파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성립한다. 이렇듯 분당이 현실화되는 순간, 내부갈등은 최고조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사태의 비극은 어느 한쪽의 성공도 아름다운 결과로 귀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신당권파, 혁신의 내용이 있는가?

통합진보당 내 신당권파는 자신을 '혁신의 주체'로 자임하고 있지만, '이석기 제명'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면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이질적인 세력이 모여 있는 신당권파는 사실상 구당권파를 대상으로 한 적대의 동일시에 다름 아니다. 사태 초기, '새로나기 특위'에서 혁신방향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내부에서도 '확정된 안이 아니라 토론을 해보자는 것' 정도로 위상을 격하시키면서 혁신의 쟁점과 내용을 만들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 

지난 7월 15일 오후 여의도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2기 지도부 출범식'에서 박원석, 강동원, 서기호, 정진후, 김미희, 김제남 의원 등 의원들과 참석자들이 애국가 1절을 부른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지난 7월 15일 오후 여의도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2기 지도부 출범식'에서 박원석, 강동원, 서기호, 정진후, 김미희, 김제남 의원 등 의원들과 참석자들이 애국가 1절을 부른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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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혁신의 내용이 없다는 것은 분당 이후 신당권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분당으로 공동의 적대가 사라지는 순간, 숨어 있었던 이질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석기 의원이 제명되지 않음으로써 실현될 수 없었던 혁신의 내용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의 이질성을 묶어줄 공통성은 정치적 이해관계 외에는 찾기 어렵다. '민주당으로 합류'의 시나리오가 전혀 뜬금없이 들리지 않는 이유다.

신당권파가 당내 부정을 일소하거나 패권에 대한 적극적인 청산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초기부터 일관되게 강조한 '정치적 해법'은 자신의 부정을 드러내고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제를 봉합하는 방법에 가까웠다. 스스로 '누구도 부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진상에 대한 이견을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데는 소극적이거나, 추가 진상조사에서도 특정 집단에게만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가 과잉표출된 것은 이러한 혐의를 강화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진상조사위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이 되었던 소위 '김인성 보고서'다.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 컴퓨터 법의학) 전문가인 김인성 교수는 2차 진상조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온라인 투표결과를 조사하면서 신당권파 일부 인사의 부정행위를 적시했다. 더구나 범죄자로 지명당한 이가 1차 진상조사위원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 교수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뺑소니 사건"이라고까지 단언한 의혹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은 침묵했고, 신당권파는 공개 검증을 거부했다.

1차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했던 박무 위원이 반박 보고서를 내기도 했지만,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 말이 맞는지 검증해볼 도리가 없다. 공개검증을 거부했던 이유는 이것이 '구당권파의 불순한 의도로 점철된 보고서'라는 것이었는데, 김인성 보고서의 내용을 신뢰하는 구당권파의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이 될 리 없다. 합리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라도 공개적인 검증을 통해 의혹을 해소해야 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회장 변희재)가 당사자들을 고발함으로써 검찰의 손으로 넘어 갔다.

자신이 수적 우위를 점한 공간에서 진행된 의사결정 과정도 패권의 단절과는 거리가 있었다. 패권은 또 다른 패권으로만 근절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패권청산이 단지 특정 정파의 제거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면, 구당권파가 다수를 점할 때와 신당권파가 다수를 점할 때 동일한 논리가 위치만 바꿔 반복되는 상황을 혁신이라 부르기는 민망할 것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수적 우위를 활용해 자신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것이 패권이라면, 화룡정점을 찍은 것이 공정성을 담지해야 할 당내 사법기관인 당기위원회를 동원한 소위 '셀프 제명'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과도한 언론 플레이나 정치공학적 사업 방식, 종종 자행되는 종북 낙인찍기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서 '구당권파보다 더 심한 패권'이라는 냉소가 퍼져나가는 이유를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찰이 부족한 구당권파... 쌓였던 불만 터져 나온 것

그러나 신당권파의 이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데에는 구당권파의 역할이 컸다. 문제의 시작이 어떠했건 간에, 평행선의 간격을 좁히기 어렵게 만들었던 계기는 5월 12일 중앙위 폭력사태다. 5월 12일 사태의 핵심은 단순히 폭력사용 때문에만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 내부에서도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사안이 있다면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3일 오전 기자회견을 자청해 지난 5월 발생한 중앙위 폭력사태에 대해 사과한 뒤 대선출마 계획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번 당 대선 후보는 고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쉬운 일이라면 아마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3일 오전 기자회견을 자청해 지난 5월 발생한 중앙위 폭력사태에 대해 사과한 뒤 대선출마 계획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번 당 대선 후보는 고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쉬운 일이라면 아마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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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권파의 입장에 같은 논리를 적용해 보라. '제명이 곧 혁신'이라 믿는 신당권파가 자신의 정당성을 관철하기 위해 어느 정도 무리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떤 논리로 비판할 수 있는가? 동일한 논리가 양 진영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구당권파는 선거부정의혹과 무관하게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가 이토록 심각한 감정대립으로 진행된 기원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이 이뤄져야 한다. 지금 구당권파로 향하고 있는 불만이 오로지 선거부정의혹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여전히 상황인식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라는 3주체의 통합으로 탄생한 통합진보당이 4.11 총선을 앞두고 경험한 약 3개월간의 기간 동안, 당 내에서는 이미 구당권파에 대한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통합 이후 과도기적 기간 동안 사무총국에서 일어난 독단과 각 지역 총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불거진 잡음, 당직자 정리해고 등 일련의 사건, 그리고 구민주노동당 시절 3주체 통합추진과정에서 나타난 구당권파와 타 정파 간의 갈등은 구당권파에 대한 적대감의 이유를 제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진행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여론조사 과정에서 '부정응답'시비가 불거지고 '경기동부'라는 특정 정파의 명칭이 갑작스레 수면위로 부상하자, 언론 역시 통합 과도기의 모든 문제를 구당권파의 책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비례선거 부정의혹은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계기가 되었다. 

신당권파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모두 구당권파가 아니듯, 구당권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신당권파이거나 선거부정을 확신하고 있는 이들은 아니다. 설령 선거부정의혹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뺑소니 사건'으로 밝혀지더라도, 구당권파에 대한 불만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구당권파가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성찰을 진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 이정희 전대표가 5월 12일 사태에 대해 사과의 의사를 표했지만, 그것만으로 성찰의 진정성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하다. 

구당권파는 현재 당내구조에서 신당권파에 동의하지 않지만 남아 있기도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당권파가 분당을 감행하고, 다시 구당권파가 초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당에 희망이 없다고 보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가? 그 답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진영 전체의 균열을 막는 방법

통합진보당 김제남, 정진후, 박원석 서기호 의원이 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제명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김제남, 정진후, 박원석 서기호 의원이 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제명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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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분당을 반대하고 새로운 계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화해와 내용 있는 혁신을 기다리기에는 당사자들도, 지켜보는 이들도 너무 지쳤다. 조금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은 일에 희망을 거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지금의 모습 이대로 결별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당이 쪼개지는 결과만이 아니다. 진보진영 전체의 균열과 반목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명망가들은 살아남더라도 신물 나는 내부정치에 질린 평범한 사람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희망을 걸어볼 마지막 가능성은 분열의 봉합이 아니라 각자의 빈 구석을 채워, 각자의 성찰근거로 삼는 것이다. 언제까지 특정 정파나 특정 인물에 대한 반감만으로 혁신을 이야기할 수 없다. 언제까지 누군가의 정치공작 운운하며 결백만 주장하고 있을 수 없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떠난 이후에, 남기로 한 사람은 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다.

이 과정이 진행되지 못한다면 갈등의 '일시적' 봉합일 뿐, 문제는 매우 퇴행적인 형태로 되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이 이뤄져도 지금 당장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4년 뒤 누가 살아남아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지 몰라도, 그 순간이 지금과 같지는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의 근거를 먼저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제 잠시라도 거울을 볼 때다.


태그:#통합진보당, #신당권파, #구당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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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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