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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월)

Love, Blue Ridge parkway, VA - Buchanan, VA
63 mile. ≒ 101.3 km

Love의 아침이 밝았다.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텐트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니 제법 차가운 공기가 뺨을 적신다. 말이 2인용이지, 몸이 꽉 들어차는 텐트에서 밤을 지내면 온 근육이 뒤틀어지기 마련. 선선한 햇살을 맞으며 슬렁슬렁 몸을 푼다.

이 캠핑장에는 나 이외의 텐트 여행자가 없다. '오크 캐빈'(Oak cabin)이라 불리는 통나무집에서 여행객들이 주로 머물기 때문. 어디서든 밤은 똑같이 지나가는데 몇 배 비싼 숙소에 굳이 갈 이유는 없다.

미국인의 딸이 찍힌 사진 속에 담긴 사연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랜디 아저씨가 쥐어준 20달러로 그날 저녁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 랜디 스와이어즈(Randy Swyers), 페트리샤(Patricia) 부부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랜디 아저씨가 쥐어준 20달러로 그날 저녁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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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히 밤을 보냈을 사람들이 통나무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랜디 스와이어즈(Randy Swyers), 페트리샤(Patricia) 부부도 개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왔다. 이들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 고리가 있다. 이제 어엿한 26살의 여인으로 성장한 따님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녀가 없었던 이 부부는 생후 3개월 된 아기를 입양해 친자식 못지않게 길러냈던 것.

"주원미라고 하지. 마지막에 '미'자가 한국어로 아름다움을 뜻한다며?"

사람도 연어처럼 회귀본능이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생모를 찾기 위해 그녀는 지금 한국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생모를 만났지만, 한국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며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단다. 랜디 아저씨가 아이패드로 딸의 블로그를 보여줬다. 거리를 거니는 그녀의 오른편에 '원조 순대국밥' 간판이 눈에 띈다. 두 달 후에 미국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 보따리를 품고 올지 궁금해진다.

딸과 동향이라는 이유로 나는 반가운 손님이 됐다. 덕분에 형편없는 공용 화장실 대신 깔끔한 숙소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아침식사로 커피와 시리얼까지 대접받았다.

공립학교 부부 교사였던 랜디와 페트리샤는 은퇴 후 한가롭게 정취를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곳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는 이들이 매년 꼭 들르는 휴식처다. 전몰장병 추모일(Memorial day·5월 마지막 월요일)인 오늘(5월 28일)이 3일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이 짐을 싸서 떠나는데 이들은 꿈쩍 않는다. 5월 30일까지 머물면서 근처를 찬찬히 둘러볼 예정이란다.

통하는 사람끼리는 인종과 나이, 국적을 초월하는 법이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출발 예정 시각이 2시간이나 연기됐다. 부랴부랴 텐트를 접고 자전거에 짐을 꾸린다.

랜디 아저씨는 중간 경유지인 렉싱턴(lexington)까지 태워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차에 의존하면 자전거 라이더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된다.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10마일을 이동해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를 벗어난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이 관통하는 곳이라 마지막 순간까지 내리막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파크웨이 출구를 나서면서 SR 56으로 들어선다. 베수비우스(vesuvius)까지 4마일 동안 1500피트를 하강한다. 조금 전까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던 다리는 할 일이 없고, 브레이크를 잡는 손가락만 분주하다.

중간 기착지인 렉싱턴(Lexington)에 도착할 즈음 맹렬한 더위 때문에 온몽이 건오징어처럼 말라버렸다. 주스 한 통을 사 목젖을 열어젖힌 채 단숨에 원샷. 쉬어갈 만한 타이밍이지만 늦은 출발시각 때문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Interstate 81에 도달했다. 아래로 뚫린 터널을 통과해 CR(County Road) F-055 도로를 탔다. 경계선 하나를 두고 차들과 나란히 달린다. 뭐든지 함께 나눠야 좋다지만 자동차와는 도로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고속도로 위로 난 다리를 통과해 CR F-054 도로를 탄다. 짧은 시간 동안 차들이 맹렬하게 질주하는 도로를 왼쪽 오른쪽으로 껑충껑충 넘나든 셈이다.

'City limit, Buchanan, pop 1233.' 반가운 도로 표지판이다. 처음으로 하루 100km 주파에 성공했다. 작고 한적한 마을 옆으로 제임스 강(James river)이 흐른다. 인근 대여점에서 카누를 빌린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땀에 절어버린 나도 옷을 입은 채 강으로 뛰어든다. 목욕과 빨래를 동시에 하는 일거양득의 지혜다.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가고 적막한 제임스 강변에 나 홀로 남았다.
▲ 뷰캐넌(Buchanan)의 일몰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가고 적막한 제임스 강변에 나 홀로 남았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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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 대여점의 허락을 받아 강변에 텐트를 설치한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한 번도 텐트를 설치해 본 적도 없는 초짜가 연달아 캠핑을 하다니... 살다보면 본인조차 자신의 모습에 놀랄 때가 있다.

다음날을 위해 잠을 청한다. 잔잔한 강물의 흐름과 이따금 강변을 지나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자장가 삼아.

5월 29일(화)

Buchanan, VA - ellet, VA  도착 5마일 전 지점(CR 785와 CR 723의 교차점)
56.5 mile ≒ 90.9 km

잠을 설쳤다. 캠핑 장소에 문제가 있었다. 해가 저물기 전 사람들이 흥겹게 물놀이를 즐길 때는 마음이 탁 놓였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자 인적이 드문 외딴 곳이 돼버렸다.

한밤 중에 바스락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가로등 조명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가 텐트 천 위로 음영을 드리웠다. 사람의 그림자로 착각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근처를 지나는 차량은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각성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설핏 잠이 들었다 깨니 오전 6시. 해가 서서히 떠오른다. 멍한 상태로 짐을 꾸린다. 이 상태로 시험을 봤다 치면 아무리 잘 맞아도 D+ 정도나 나올 법하다.

오늘 목적지는 크리스챤스버그(Christiansburg).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총 12개 섹션 중 첫 번째를 마무리 짓는 도시다. 어제처럼 100km 이상을 달려야 한다.

아침 식사는 지난 몇 끼와 마찬가지로 핫도그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편의점들도 다양한 먹을 거리를 마련해 놓지 않는다. 다행스럽게 라이딩 도중에 배고픔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더위에 지친 몸이 물을 원할 뿐이다. 도착지에서 먹게 될 풍성한 저녁에 한껏 기대를 걸며 자전거 탄 나그네는 구름에 달 가듯이 발을 구를 뿐이다.

트러트빌(Troutville)과 데일빌(Daleville)을 지나 CR 779번 도로로 들어선다. 17마일을 쭉 가야 한다.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쉼 없이 반복되는 버지니아의  지형으로 보면 2시간은 꼬박 가야 한다. 중간에 변변한 상점이나 마을이 없다는 정보에 반만 남은 물통을 근심스레 쳐다봤다.

카타우바(Catawba)에 도착했다. 1~2년 전만해도 영업 중이던 음식점·편의점·주유소·우체국·캠핑장이 최근에 다 없어져버린 혹독한 마을이다. 천만다행으로 구멍가게 하나가 살아있다. 음료수를 구입한다.

미국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다보면 가끔씩 'Thirst Quencher'라고 적혀있는 제품이 있다. 우리말로 '갈증 해소제'다. '포카리OOO' '게토OO' 등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침은 어느덧 3시 반을 가리킨다. 물을 한 모금 들이키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말을 건다. 바이크 레이싱에도 참여해 본 전력 탓인지 자전거 여행자에게 살갑게 군다. 크리스챤스버그(Christiansburg) 근처 블랙스버그(Blacksburg)로 간다는 아저씨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지금 날씨가 굉장히 화창하잖아. 근데 이 기상 예보 좀 봐.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지? 해질 무렵에는 비가 올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화창한 하늘이 무색하게 스마트폰 화면에는 비구름 표시가 선명하다. 마음이 급해진다. 늦게 출발한 오토바이가 나를 앞질러 가고 허벅지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CR 785번으로 들어선다. 14.5마일의 거리다. 보통 이렇게 기다란 길은 라이더를 힘들게 하는 편. 역시.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는 무수한 언덕들. 자연과 악전고투하는 동안 하늘은 점점 구름으로 덮여간다. 태양의 광채도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CR 723번으로 좌회전하고 나서 과감한 판단을 내릴 순간이 됐다. 목적지까지는 8.5마일이 남았다. 루비콘 강을 앞에 둔 카이사르의 심정이다. 저녁 무렵에 내리는 비는 자전거 라이더에게 최대의 적이다. 조금이라도 안전한 편을 택할 것인가, 모험을 걸어볼 것인가. 초단과 홍단, 청단에다 고도리 비상이 걸린 가운데 '쓰리 고'를 눈 앞에 둔 나는 패를 만지작 거린다.

그래. 멈추자.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다.

떨어지는 빗방울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텐트를 설치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항상 선택은 과감하고 신속해야 한다.
▲ 갑작스러운 캠핑 텐트를 설치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항상 선택은 과감하고 신속해야 한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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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가정집 몇 채 딸랑 있는 마을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문 두드리기 신공. 인상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잔디를 깎고 있다. 최대한 정중함을 담아 영어문장을 날렸다.

"Would you mind if I ask you to set up my tent in front of your house?"(집 앞에 텐트를 쳐도 괜찮을까요?)
  
예상은 적중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전거를 세우고 캠핑 장비를 꺼낸다. 전광석화와 같이 텐트를 세운다. 바쁜 손놀림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잠시 후 비가 쏟아졌다. 애매모호한 현실을 명확하게 결정짓는 쾌도난마의 빗방울이다. 우수에 젖은 하늘은 아쉬움을 달랠만한 강력한 이유가 된다. 텐트 속에서 빗소리를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접하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 갈림길마다 했던 결정은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다. 즉시 결과 값이 나오지 않아도 순간의 판단을 끝까지 믿어줄 수 있을까. 예상과 달리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이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자전거 여행자는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캠핑은 허락해줬지만 집 주인은 더 이상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화장실을 이용하자 다음부터 옆집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을 정도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찾아간 옆집 브루스 아저씨. 따끈따끈한 치킨 너겟으로 여행자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 브루스(Bruce) 아저씨 캠핑은 허락해줬지만 집 주인은 더 이상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화장실을 이용하자 다음부터 옆집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을 정도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찾아간 옆집 브루스 아저씨. 따끈따끈한 치킨 너겟으로 여행자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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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국 여행,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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