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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오는 신간이나 베스트셀러 책들이 별로 감흥이 없고 당기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독서가는 그럴 땐 고전을 읽으라고 권유하던데 나는 그럴 때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들이 꽂혀 있는 서고 사이를 산책한다. 곧 여름 휴가 시즌이라 여행 관련 서고를 둘러보다가, 각종 여행책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제주의 풍경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가 김영갑님의 책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만난 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사실 여행 관련 서적은 아니다. 책 제목도 그렇고 저자가 제주도에 20년 가까이 살면서 찍은 사진들과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여행 분야에 넣은 것 같다. 내가 도서관 사서라면 에세이 분야에 넣었을 텐데.

섬, 제주도 풍경, 제주도에서의 삶과 사진, 갤러리 두모악. 겉으로만 보면 낭만적인 사진들과 이야기가 나올 듯싶지만, 이 책은 저자의 나이 47세 때 걸린, 근육을 점점 쓸 수 없게 되는 고약한 난치병 루게릭 병과 싸우면서 쓴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책이다.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제주 중산간 들녘의 사진들을 보면, 그래서 감탄과 슬픔의 두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가

"마음이 평온할 때면 나는 그 들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고 마음이 불편해져야 그 들판을 생각합니다. 그래도 들판은 즐거운 축제의 무대를 어김없이 펼쳐줍니다. 들판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본문 가운데)
김영갑 글, 사진 - 휴먼앤북스
 김영갑 글, 사진 - 휴먼앤북스
ⓒ 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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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떠났을 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닷가를 달리다가 우연히 제주의 속살이라는 내륙의 중산간 길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바다와 달리 들판은 그 위를 직접 달려갈 수 있어서 그런지 무척 이채로운 기분이 들고 중산간녘 들판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 느낌이 저마다 다른 크고 작은 오름들이 솟아 있고 신령스럽게 들려오는 까마귀들을 울음소리, 부는 바람에 억새들이 춤추는 원초적인 풍경. 저자가 느낀 감동과 끌림에 공감 가는 장면들이다.

이렇게 한껏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은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깊은 외로움을 전해주기도 한다. 평화와 외로움, 전혀 다른 느낌의 말이지만 저자에겐 숙명과도 같은 대상이요 사진재료가 되었다. 외롭고 허무한 세상살이를 잊기 위해 그는 미친 듯이 사진 하나에만 몰입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사진을 찍는 하루하루는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런 저자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처음에 진정한 자유는 혼자일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에 섬 속의 섬 마라도에서 혼자 지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을 견디기 힘들었으며 그 후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체념했단다. 그를 도통한 구도자급 사진가로 여겼는데 나처럼 외로움과 고독에 약한 평범한 인간이었구나. 책 맨 뒤에 약력과 함께 나오는 그의 얼굴 사진을 들춰보게 된다.

그가 찾던 파랑새는 무엇이었을까!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본문 가운데)

"밥벌이 안 되는 일을 언제까지 할꺼꽈? 시내 나강 사진관 하믄 돈 벌 텐데. 모두들 떠나지 못행 안달인 촌구석이 무사 좋앙 눌러앉앙 살암신지 이해하지 못하꾸다."

제주도에 이사를 와 살게 되면서 저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주로 듣던 동정과 타박이 섞인 말이다.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꿍쳐둔 돈을 톡톡 털어 제주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가졌다. 아마도 과시나 누구를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게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면서도 동이 트기 전 20킬로그램이 넘는 사진 장비를 둘러메고 온종일 들녘을 해매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생활을 이십 년 넘게 반복하다가 결국엔 치명적인 병까지 얻어가면서 과연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함이 책장을 넘기면서 모락모락 떠오른다.

춥고 배고팠던 나머지 그때는 몰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파랑새를 품 안에 끌어안고도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단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 현재가 이어도라 한다. 오랜 시간 내공을 쌓아온 구도자의 말 같다.

김영갑의 생명과 맞바꾼 제주 중산간녘의 사진들
 김영갑의 생명과 맞바꾼 제주 중산간녘의 사진들
ⓒ 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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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채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혀를 찬다. 그래도 나는 웃는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다.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뭐했냐고 다그쳐도 웃는다.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뭍의 것들이기에 일상적인 풍경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내 사진에 표현하고 싶은 주제(마음)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문 가운데) 

시인들이 일상의 평범한 언어와 이야기들로 시를 창작하여 새롭게 승화시키듯, 그도 눈에 익숙해진 평범한 풍경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오랜 시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사진이 제주를 담은 다른 사진들과 무언가 달라지게 된 계기는 바로 그 섬에 사는 사람들 덕이었다.

들에서 밭에서 바다에서.. 섬사람들의 토박이들의 고된 삶을 경험하기도 하며 가까이에서 보니 그들을 통해 저자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만만하게 세상과 삶에 대해 떠벌렸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사진 속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저자는 제주도의 유명인이나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노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제주 사람들의 삶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수록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카메라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그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무덤이 보이고 동자석이 보였다. 토박이들이 꿈꾸었던 '이어도'라는 유토피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실마리가 될 무덤을 찍다가 장례식과 굿판을 기웃거리게 되고 오름들을 만났다. 저자가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보다 바람 부는 중산간 들녘의 초원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교회나 절, 성당을 찾아가 회개하고 기도하듯 그는 마라도, 중산간의 들판, 오름에 가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곳에만 가면 가슴속 응어리가 풀렸고, 섬 자체가 삶을 깨닫게 해주는 경전이자 성지였다고. 올 여름 휴가 땐 그가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헤매었을 중산간 들판을 찾아가 저자의 사진들을 회상하며 그의 영혼의 고향, 제주도 초원 위를 실컷 달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씀, 휴먼앤북스 펴냄, 2004년 1월, 254쪽, 1만3500원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2013)


태그:#김영갑, #제주도, #중산간,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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