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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공주이던 시절, 당나라에서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신라에 보내왔다. 당시 신라에는 모란꽃이 없었다. 처음 보는 꽃을 앞에 두고 궁금증이 폭발한 부왕 진평왕은 그것들을 공주에게 보여주었다. 공주가 말했다.

"이 꽃은 보기에는 매우 아름답지만 향기는 없을 것입니다."

진평왕이 물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꽃이 없는데,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공주가 대답했다.

"화가가 꽃그림에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중략)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꽃은 매우 아름다운데도 벌도 나비도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이 꽃에 향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두루 전하는 선덕여왕 일화를 현대어로 적어본 것이다. 물론 이 일화는 선덕여왕의 총명함을 전파하기 위해 책 속에 채록되었을 터이다.

김윤종 화백의 작품 2점. 송아당화랑이 제작한 엽서에 인쇄된 그림을 기자가 스캔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김윤종 화백의 작품 2점. 송아당화랑이 제작한 엽서에 인쇄된 그림을 기자가 스캔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 상아당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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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인사동 '봉산 문화 거리'

김윤종, 전재경, 노충현, 김영대, 최향, 김영식...... 대구 화단을 대표하는 중진화가들 중의 여섯 분이다. 이 분들이 나서서, 서울의 인사동 골목에 해당되는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 문화 거리'의 일부를 꽃으로 꾸몄다. 송아당화랑(053-425-6700)이 5월 17일부터 30일까지 마련한 '5월, 꽃과의 교감전'을 통해 대구의 5월을 꽃으로 장식한 것.

초대받은 화백들은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미술애호가들 사이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중진작가들이다. 우선, 김윤종 화백의 그림은 이상향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몽환의 꽃을 그린 듯 천연의 고운 빛을 숨김없이 드러내준다. 꽃들은 하늘에 닿아 있고,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듯이 여겨지는 곳에 무더기로 피어 있다.

노충현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작품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노충현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작품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 노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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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화백의 꽃은 작고 세밀하지만, 사람보다 클 뿐더러 '사람의 사물'인 피아노와 자동차는 물론 심지어 주택보다도 더 커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꽃이 화면의 상단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구도와 내용상의 비중이 두드러진다.

이는, 흔히들 '꽃보다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노충현 화백의 그림에서는 '사람보다 꽃'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꽃이 앞장서서 사람과의 '교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백이 넓고 빛깔이 연하여 서양적 사물들이 동양적 세계로 빨려들어온 듯한 조화를 빚어내는 까닭에 보는 이의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진다.

'백화만발' 자연의 이치, 화가들 그림으로 개성적 표현


그런가 하면 전재경 화백의 그림은 사뭇 달라서, 무르익어 난만한 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보여준다. 사람은 없다. 노충현 화백의 그림에서는 작게나마 존재를 드러냈던 사람이 전 화백의 작품에 와서는 아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가시적으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비인간의 자연'을 표현했다고 재단할 수는 없다. 이미 화병이 있고 의자가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전재경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작품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로 차이가 남.
 전재경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작품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로 차이가 남.
ⓒ 전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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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화백의 활짝 피어난 꽃잎들은 짙고 불투명한 빛깔의 화병과 배경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꽃들은, 노 화백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폭의 상단부를 차지하고 있다. 의자 위에 자리를 잡은 채 꽃은 지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르익어 터질 듯 활짝 핀 꽃은 그 기다림의 뜨거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김영대 화백의 그림 속 꽃들도 화병을 거느리고 있다. 화병과 배경의 색깔이 짙고 불투명하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김영대 화백의 꽃은 활짝 피어 있기는 하지만 마치 봄소식을 퍼뜨리는 전령사인 양 작고 단아하다. 화백의 심성 자체가 그처럼 섬세하다는 뜻일 터이다.

김영대 화백의 작품.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김영대 화백의 작품.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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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 화백의 작품은 전시장에 출품된 그림들 중에서 가장 빛이 부드럽고 맑다. 소재가 파꽃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붓의 흔적도 세세하고 곱다. 그래서, 유년기를 농촌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림 앞에 서서 동심의 눈으로 파꽃을 응시했던 어린 날을 회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향 화백의 파는 '파의 빛깔'이 아니다. 연분홍이기도 하고, 뽀얗기도 하고, 회색조이기도 하고, 더러는 파랑새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최 화백의 그림속 파꽃은 사람의 먹을거리 수준에 멈춘 파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화제가 '파꽃은... 바람에 흩날리고...'인지도 모른다.

최향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다름.
 최향 화백의 작품. 화랑에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다름.
ⓒ 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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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 화백의 그림처럼, 김영식 화백의 작품들도 상당히 여성적이다. 물론 여기서 사용하는 '여성적'이라는 어휘는 '좋은 뜻'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안정된 구도, 그에 어울리는 소재, 차분하고 고운 색감, '그리움'이며 '매화' 같은 화제들...... 모두 고운 정서를 자극하는 매개들이다.

그 탓에, 최향 화백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순간의 분위기를 안겨준다. 하얀 매화 뒤로 붉은 매화가 은은히 드리워져 있는 한국화풍의 '매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구도와 형체 등에서 서구적 분위기가 강한 '그리움'까지도 원초적인 색조에 힘입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적셔주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모란의 나비는 나비, 그림의 나비는 사람

향기가 없는 모란을 그리면서 나비를 넣었다면 그 화가는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것을 선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덕은 화가가 그림 속에 나비를 그리지 아니한 까닭을 날카롭게 간파했다. 모란에 향기가 있다면 당연히 나비가 날아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꽃과 나비'의 관계에 상응하는 대칭은 '그림과 무엇'일까?

김영식 화백의 작품.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김영식 화백의 작품. 전시된 그림을 기자가 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남.
ⓒ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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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나비가 따르듯 그림에는 사람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향기가 없는 모란은 있지만 향기가 없는 그림은 없다. 꽃에는 나비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림에는 당연히 사람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삶의 경지를 한 단계 위로 이끌어주는 그림을 어찌 사람이 추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도 '꽃 그림'이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에서 보듯, 꽃은 사람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꽃을 여섯 분의 이름높은 화가들이 그려서 보여준다. 그 화단을 어찌 찾지 않으랴. 꽃그림에 취해 봉산문화거리를 한참 헤매는 경험도 사람살이의 한 가지 즐거운 호사이리라.

화가들이 공들여 그린 작품을 전시해도 시민들이 찾지 않는다면 "대구는 꽃이 피어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도시"라는 말을 듣게 될 터인데, 그래서야 왕년의 '교육문화도시' 명망을 이어갈 수 없지 않겠는가.


태그:#꽃과의교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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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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