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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당이 가운데 있다. 선비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 사촌마을의 풍경 만취당이 가운데 있다. 선비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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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중순, 가로숲을 지나 경상북도 의성 점곡면 소재지인 사촌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길. 길 중간 쯤에 '만취당(유형문화재 162호)'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다. 만취당? 언뜻 만취당(滿醉堂), 즉 '잔뜩 술에 취하는 집'인가 싶어 빨리 그 집이 보고 싶어진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 취미였던 옛날 선비들이 그것으로도 모자라 집에까지 그런 이름을 붙였구나!

하지만 짐작은 틀렸다. 만취당(滿醉堂)이 아니라 만취당(晩翠堂)이다. 1582년부터 3년 동안 이 집을 지은 김사원(金士元) 선생이 자신의 호를 붙여 '만취당'이라고 했을 뿐이다. 실제로 가보면 집도 정자 모양이 아니라 거의 서원의 강당을 닮은 듯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집 안에 들어가면 현대식 학교의 교실 네 칸은 충분히 돼 보이는 대청마루가 답사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만취당이 커다란 마루를 중심에 놓은 'T'자형 구도로 지어진 덕분이다. 게다가 마루는 사방 벽에 커다란 문을 달아 놓았고, 또 활짝 열려 있다. 우리나라 기와집 중 규모가 큰 곳도 가운데에 마루, 그 좌우로 방을 '一'자형으로 배치해놓아 지나치게 정돈된 느낌을 주는 데 반해, 만취당은 그렇지 않아 햇살과 바람이 자유로이 드나든다.

마루에 드러누워 한석봉을 감상하다

만취당의 마루
 만취당의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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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국민 명필' 한석봉 선생의 현판 글씨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체험이다. 김사원과 한석봉은 친구 사이였다. 한석봉은 어릴 때 가난해 종이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집 밖에서는 돌다리에 글씨 연습을 하고 집 안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 겉면에다 연습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사원은 집에 있을 때는 글을 읽고, 틈이 나면 농사에 힘썼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그는 평생을 두고 벼슬에 나아간 적이 없지만,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실천하는' 선비였다. 또, 성품이 착하고 온화해 자신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들을 도왔는데, 흉년이 든 해에는 벼이삭 남은 것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빌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가난해 갚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빌려줬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문서를 태워버렸다. 사람들은 김사원의 집을 '의로운 창고'라 불렀단다.

김사원은 동네 규칙을 직접 만들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사촌의 풍속이 줄곧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름 그대로 '으뜸(元) 가는 선비(士)'의 모습을 평생에 걸쳐 선보인 '일하는 학자'였던 것이다.

만취당? 소나무처럼 푸르게 살겠다는 뜻

후산정사
 후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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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마을에는 김사원과 관련이 있는 집이 한 채 더 있다. 마을 중심 도로를 사이에 놓고 만취당과 맞은편에 있는 후산정사(後山精舍)가 바로 그것. 1767년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지내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쓰려고 처음 지었단다. 1991년에 다시 지어졌다. 지은 연대가 짧아 문화재는 아니지만, 우람하고 오래된 나무들과 집이 잘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김사원이 집에 '만취당(晩翠堂)'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담 건너편의 500년 된 향나무(기념물 107호)와 관련이 있다. 높이가 8m나 되는 이 거목 향나무는 소나무(松)가 아니면서도 '만년송(萬年松)'이라 불린다.

김사원의 증조할아버지인 김광수(金光粹, 1468~1563) 선생이 심었고, 이름도 김광수 선생이 붙였다. 그는 연산군의 폭정에 절망한 나머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사촌마을에 숨어(隱·숨을 은) 살면서 글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송은(松隱) 선생'이라 불렀단다. 김사원도 죽을 때까지(晩·늦을 만) 소나무처럼 푸르게(翠·푸를 취)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뜻에서 집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안내판은 500년 고목 '만년송'의 크기를 '높이 8m, 수관폭 2.5m'이라고 설명한다. 높이는 알겠는데, 수관폭(樹冠幅)은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수관폭은 '나무(樹·나무 수) 중에서 모자(冠·갓 관) 모양 부분의 폭', 즉 나무 중에서 가지와 잎이 가장 많이 달려 있는 부분의 가로 너비를 말한다. 전나무 등 바늘잎나무의 수관폭은 대략 원뿔 모양을 이루고, 느티나무 등 넓은잎나무는 반달처럼 둥근 모습을 보인다. 국립국어원은 '수관폭' 대신 '나무갓'을 쓰는 것이 우리말을 곱게 가꾸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만취당과 향나무
 만취당과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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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송 넓은 그늘 아래에 서서 만취당을 바라본다. 김광수 선생도 아마 무더운 여름날이면 만년송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워진 만취당 마루에 누워 한가로이 시를 읊기도 했으리라.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후미진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靑苔一逕隔紅塵  幽興相尋日轉新
車馬縱然嫌地僻  鶯花曾不厭家貧
看山坐處凉生腋  高枕眠時翠滴巾
自喜萬年松影裏  四時風景屬閑人

눈썹 같은 강이 흐르는 곳

만취당의 지붕과 마루
 만취당의 지붕과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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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키운 곳이다.
 영귀정.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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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영귀정(詠歸亭·문화재자료 234호)이 사촌마을 앞을 흐르는 미천(眉川) 바로 건너 절벽 위에 보인다. 아니 가볼 수 없다. 영귀정에 닿으면, 담장 바깥의 왼쪽에 홀로 자라고 있는 휘영청 굽은 향나무와 뜰 안 오른쪽에 역시 외롭게 버티고 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가 영귀정에 올라,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미천과 사촌마을 쪽을 바라본다. 지금은 강(川·내 천)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탓에 물길이 눈썹(眉·눈썹 미)처럼 곱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말하고 시를 노래하던 당시에는 아마도 보기 드문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리라. 

영귀정의 선비 김광수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영의정의 상징'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외할아버지이다. 사촌마을에는 역시 선비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사촌'마을은 아무래도 '士村'마을이다.


태그:#의성, #사촌마을, #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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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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