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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저물어가던 겨울, 나의 '첫 번째 연애'는 석 달을 겨우 넘기고 장렬하게 끝이 났다. 달랑 문자 한 통으로 이별을 고하던 상대의 무신경함에 경악하며 서서히 이별을 실감할 때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그가 준 책 한 권만이 남았다.

남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역시 물건을 처분하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책은 여전히 책장에 꽂혀 있었고, 그 사실을 불과 며칠 전에 알고 무척 놀랐다. 어차피 읽지도 않을 책,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gYOg(Give Your Old Gifts), '옛 애인 선물 바자회'라는 행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4일 낮 2시 창전동 '재미공작소'에서 '옛 애인 선물 바자회'가 열렸다.
 14일 낮 2시 창전동 '재미공작소'에서 '옛 애인 선물 바자회'가 열렸다.
ⓒ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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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창전동 '재미공작소'에서 열린 '옛 애인 선물 바자회'는 말 그대로 헤어진 연인이 남기고 간 선물을 기증받아 바자회를 여는 것이다. 수익금은 소년소녀가장들을 돕는 데 쓰인다. '전 남친', '전 여친'이 남기고 간 선물이 없다면 재능기부도 가능하다.

낮 2시부터 열린 이 행사장 한 쪽에서는 네일아트와 즉석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수제 비누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자신이 직접 만드는 쿠키를 기부하거나 드로잉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직접 바자회에 찾아가 보았다. 어색한 마음에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 우선 책을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작 한 권뿐이라 부끄러운데' 하는 생각도 잠시, 상냥한 미소를 띤 담당자가 "기부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넨다.

책만 건네고 돌아서려는 찰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권하는 그녀. 이 책에 얽힌 사연을 알고 싶단다. 딱히 가슴 아린 추억도 없는지라 더듬더듬 대답을 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벽면을 메운 저 선물들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남자친구가 군 입대를 앞두고 선물해 준 와인과 글라스, 열심히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보라며 '미드'(미국드라마)를 넣어준 외장하드, 생일 선물로 받은 지갑이며 구두에 커플링까지….

이 외에도 책이나 인형, 향수, 귀고리 등 그 사연만큼이나 다양한 선물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MP3 플레이어나 고가의 브랜드 액세서리 같은 경우는 경매 코너를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값어치에 상관없이 가장 마음을 울렸던 사연은 귀고리에 있었다. 무척 아끼던 귀고리를 잃어버리고 상심해 있는 여자 친구를 위해 화장실에 간다던 남자 친구가 부리나케 사가지고 온 서프라이즈 귀고리라는 설명을 보고 있노라니 '한때는 사랑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모든 물건들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 외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읽어 내려 갈 때마다 역시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고마운 기억이나 아픈 심경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심지어 물건마다 담긴 의미와 추억들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이 바자회가 꼭 작품들이 나열된 전시회처럼 느껴졌다.

나 역시 책을 한 권 기증했다. 부디 좋은 새 주인을 만나길 바라며.
 나 역시 책을 한 권 기증했다. 부디 좋은 새 주인을 만나길 바라며.
ⓒ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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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물건, 그것도 사랑이 담긴 것들을 가져도 괜찮은 일일까? 또 남이 내 물건을 사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지난 기억을 잘 정리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위해 내 주변을 비워두는 것, 그것도 썩 괜찮은 일이라 느껴졌다.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이름 모를 낯선 이에게 나의 작은 책 한 권이 즐거움이 되길 빌며, 또 다음 사랑을 위해 자리를 한 켠 내주며 행사장을 떠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안녕, 지나간 추억들아! 누군가에게 소소한 기쁨이 되기를.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앞둔 내게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태그:#옛 애인 선물 바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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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 1기로 활동했습니다. 사람과 영화가 좋습니다. 이상은 영화, 현실은 시트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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