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내가 언제부터 '레즈비언'이나 '게이' 혹은 '호모'라는 말을 알았었는지가 기억나진 않는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말을 알고 있긴 했다. 나의 10대 후반은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2.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난 여고에 다녀서 모든 학생이 다 생물학적 여성이었는데, 당시 우리반에는 체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과 대각선 뒤에 앉은 학생이 굉장히 친했고 그 두 명의 학생은 계속 손을 잡고 있고 싶어 했었다. 수업시간에는 그래도 필기도 해야 하고 해서 덜했지만 야간자율학습시간에는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교사들은 못 본척 하기도 했었고 몇몇 교사들은 간혹 손을 놓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둘은 반년 정도 그러다가 말았던 거 같다.

<난 그것만 생각해>라는 책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들이다. 이 책은 나의 10대시절, 정확히는 10대를 보내며 내가 섹슈얼리티(sexuality: 성별, 성적 관심)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겪었던 것들을 하나둘 기억나게 했다. 마치 시간을 되돌렸거나 혹은 봉인이 해제되는 것처럼.

기억 속, 과거의 나는 슬프게도 '정체성'을 찾기 위한 탐험에 그리 당당하지 못했다. 좀 더 용기를 내어 손을 놓지 않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아도 좋았을텐데 당시의 나는 그들의 잡은 손을 마치 투명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대했다.

학업에 열중하지 않음에 분노하고 나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어른'들에 의해 나의 첫 연애가 끝나버렸을 때에도 난 "헤어지기 싫어"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생각조차 못했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정체성 탐색을 '거세'당했고 과거의 내게 '성sex'은 삭제된 영역이었다.

그걸 깨달은 건 자그마치 13년이 지난 작년. 내 머릿속에 '난 왜 한 번도 그들에게 원망 한 번 하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어리석고 바보같았나'라는 말이 떠오른 순간 더 참지 못하고 꺽꺽 대며 울고 말았었다.

여러분의 자녀와 학생들을 '행운아'로 만들어 주세요!

이 책은 커밍아웃, 아웃팅, 동성애 혐오 등과 같이 성정체성을 둘러싼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난 그것만 생각해 이 책은 커밍아웃, 아웃팅, 동성애 혐오 등과 같이 성정체성을 둘러싼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주)우리교육

관련사진보기

그런 면에서 이스마엘은 참 멋진 사람이다. 앙글레 선생님이 '이스마엘, 너랑 있으면 세상이 깜짝 놀랄 좋은 일로 가득할 것만 같구나'라고 말한 것처럼 이스마엘은 반짝 반짝거리는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 자신의 성sex에 대해 생각하고 충실히 고민한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용기있게 학교의 교사와 자신의 부모에게 그 고민을 드러낸다. 샘이 날 정도로!

이스마엘이 가진 행운이 질투가 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의 고민을 인정하고 그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열심히 대답해주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다. 교사인 앙글레도, 부모도 이스마엘의 고민을 무시하거나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동성애에 대한 질문을 하는 아들 앞에서 결국 눈물을 쏟고 말지만 이스마엘의 고민을 막아서진 않는다. 정말 행운아지 않은가! 성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자녀/학생에게 이 책에 나오는 '어른'들 정도로 반응한다면 제법 많이 '괜찮은' 부모/교사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진 교과서 기능일지도... 고액과외나 성형수술보다 훨씬 쉽고 근본적이게 여러분의 자녀와 학생들을 행운아로 만드는 방법!

"상처주기 싫지만 나도 어릴 때 그랬어" 

많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이 시도하는 성sex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잘 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자녀가 연인을 만나 섹스를 할 거라는 걸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어떤 학부모는 본인에게는 그저 어리고 예쁜 딸이 아는 오빠와 새벽에 문자를 주고받은 것에 충격을 받아 며칠째 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다고 교사에게 상담한 경우도 있었다.

나 역시 청소년들의 연애 혹은 성sex적 실험에 대해 고민이 많다. 특히 교사인 내가 학생의 연애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여러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솔직히는 내 마음의 문제와 얽혀 있는 게 더 많다. 정말 이들에게 자유롭게 연애하도록 "허락해도 될까?".

한편,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과거 성sex을 거세당했던 나의 청소년기가 떠올라 아프고 억울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상처주긴 싫지만 나도 어릴 때 그랬는데" 그리고 또 드는 생각. "어릴 때 내가 잘못했었는데(할 뻔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잘 이렇게 컸으니 얘한테도 그렇게 해주어야 할텐데."

상처를 반복하기보다는 함께 치유해 나갈 수 있기를

하지만 <난 그것만 생각해>를 읽으며 좀 달라졌다. 하나둘 떠오른 과거의 기억은 나의 사춘기가 변변한 지원자 하나 없이, 내 성sex적 고민을 직면할 기회 한 번 없이 그렇게 억눌려 지나온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건 내가 잘못되거나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책은 말해주고 있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섬뜩했다. 이 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학생들에게 고민하고 실험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은 나와 똑같은 상처를 그들에게 주는 게 아닌가! 수십년 동안이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의 재생산.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고 자시고 하며 내가 감히 보상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큰 상처를, 더구나 내가 경험했던 상처를 지금의 학생들에게 내 손으로 주고 있는가. 오히려 상처를 치유해주진 못할 망정.

내 기억 속의 내가 잘못되고 나쁜 짓에 관심을 쏟는 문제거리였기 때문에 지금의 청소년들이 잘못되고 나쁜 짓을 하는 위태위태한 존재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를 긍정할 수 있다면 지금의 청소년들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청소년 성sex을 존중해주는 건 그들과 어른들의 싸움이라기보다 어쩌면, 상처를 함께 치유해가는 과정일지도. 이 책에서 말하듯 'n명의 사람이 있다면 n개의 젠더'가 있고 그런 자신만의 젠더를 찾아가는 건 모든 사람들이 평생 풀어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숙제이니까.


난 그것만 생각해

카림 르수니 드미뉴 지음, 김혜영 옮김, 조승연 그림, 곽이경 해제, 검둥소(2011)


태그:#동성애, #청소년, #성소수자, #연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매일 겪는 일상에서 분노하는 일도 감동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