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 대평원의 바람은 거셌다. 누렇게 변한 풀들은 강풍 속에서 겨울을 맞을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키가 한 뼘이나 될까 말까 한 길가의 풀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배를 땅에 대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듯 했다. 차가 옆으로 죽죽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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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과 산 US루트 89번 길 주변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멀리 길 왼쪽으로 글래시어 국립공원을 구성하는 산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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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대씩 언덕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마주 오는 차를 제외하고는 도로는 대체로 텅 비어 있었다. 하늘엔 여름이 끝자락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떠나 글래시어(Glacier) 국립공원으로 가는 2000리 남짓한 길은 어딘지 숙연했다.
산들이 눈을 이고 있는, 북쪽으로 달려갈 때면 순례자가 되는 기분이다. 4년 전 북극해를 눈 앞에 두고 알래스카의 북부 분지에서 나는 울었다. 마구 쏟아지는데 걷잡을 수 없었다. 속죄의 눈물 같은 거라고나 할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북쪽 땅끝에서 나는, 그냥, 시원(始原)을 느꼈다. 아열대의 쪽빛 바다에 떠 있는 섬,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를 향할 때는 정반대 기분이었다. 쾌락이랄까, 자유라고나 할까, 아무튼 파생물 같은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글래시어, 즉 빙하라는 말 그대로 글래시어 국립공원은 맑고, 시원하거나 혹은 찬 기운이 지배하는 곳이다. 글래시어의 북쪽 경계는 캐나다와 국경이다. 미국 48개 주 본토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게다가 높이 3000미터가 넘는 산들을 여럿 끼고 있어서, 연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눈에 덮여있다. 9월 중순까지 여름 한철 딱 4개월 가량만 문을 여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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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과 산 글래시어의 고봉 사면에는 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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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시어로 가는 길, 옆 자리의 아들은 순례자 기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풍광의 강렬한 대조에 어느 정도 넋을 뺏긴 듯 했다. 평원의 저 끝 지평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아 있는 글래시어의 연봉들을 한번씩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생각인가에 잠기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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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과 겨울 하절기 글래시어는 사실상 여름과 겨울이 공존한다. 연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십수미터가 넘는 눈에 쌓여 있다가 여름 한철 고도가 낮은 곳에만 여름이 찾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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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기운이 남아 있어 눈이 많이 녹긴 했지만 설산과 들판은 묘한 어울림과 대비를 낳았다. 둘은 같은 뿌리이면서 동시에 질감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겉으론 다르지만 피를 공유한 우리 부자의 관계도 어쩌면 저 산과 들 같은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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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으로 가는 길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로 총 길이는 약 85km이다. 군데군데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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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원 동쪽 입구의 야영장에서 한 밤을 나고, '태양으로 가는 길'(Going-to-the-sun road)을 탔다. 태양으로 가는 길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다. 길이 85km로 글래시어의 속살을 손쉽게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거대한 계곡과 폭포, 빙하, 산, 호수 등이 길 주변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다. 매연을 내뿜으며 자동차로 속살을 헤집고 다니는 게 한편으로 미안함을 넘어 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천길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등 위험한 구간이 적지 않지만, 아들은 차 속에서도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아들을 밀쳐내곤 했다. 그러나 내심은 좋았다. 초등학생 혹은 유치원 아이처럼 구는, 덩치가 다 큰 아들은 마음을 거의 다 활짝 열고 있었다. 녀석의 가슴에 내가 박아 둔 얼음장들이 꽤나 많이 녹아 내렸다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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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봉 안내 표지판이 높이 약 2800미터의 '하늘봉'을 가리키고 있다. 글래시어 국립공원에는 고도 3000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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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들은 예외 없이 자연호수들을 낳는다. 산의 자식이 물이라는 게 어색한 것 같지만, 산과 호수처럼 서로 잘 어울리는 풍광도 없다. 높은 산들에 걸맞게 글래시어의 호수들은 크고 또 깊어 보였다. 명징한 호수의 물빛은 내가 지금까지 북미대륙에서 봐왔던 그 어떤 호숫물보다 아름다웠다. 산 그림자를 담고 있는 호수의 맑은 기운이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퍼져나가 스며있는 듯했다. 어느 사이인가, 평,화,가,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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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녹아 만들어진 공원 동쪽의 호수. 물이 차고 맑은 탓인지 이끼를 찾아보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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