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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의 옥수수 밭 사이로 난 흙길이 지평선을 향해 뻗어있다. 단조로우면서도 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 끝없는 길 일리노이의 옥수수 밭 사이로 난 흙길이 지평선을 향해 뻗어있다. 단조로우면서도 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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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이 내 가슴팍 앞을 지나 아들의 무릎 근처까지 파고 들었다. 정수리를 사정없이 달궜던 해가 이젠 제법 기울어 며칠 전부터는 주로 뺨에 그 열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여행을 시작했던 한달 전에 비해 어쨌든 기세가 한풀 꺾인 게 확실하다. 하루가 다르게 햇빛이 누렇게 여물어 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디트로이트를 거쳐 시카고를 지나 북부 일리노이의 시골 지역을 관통해 우리는 정서쪽으로 달려갔다. 20번 US루트를 기본으로 하고, 중간중간 시골길로 빠졌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북부 일리노이는 한반도의 맨 북쪽 끝보다위도가 더 높다. 남쪽보다 가을을 더 빨리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들판은 여전히 녹색이다. 엽록소에 한껏 여름을 머금고 있는 나무와 풀 잎들을노련하게 훑는 오후의 노란 햇살들이 마치 화가의 붓끝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윤의는 친구들과 있을 때보다 한결 말수가 줄어 들었다. 의자를 뒤로 젖혔다, 다시 세웠다 하기를 거듭하며 좁은 차 안에서 지루함을 떨쳐내려 애를 쓰는 게 역력하다. 그러나 표정은 대체로 밝다. 디트로이트의 고모할머니 댁에서 사나흘 휴식을 취해 심신의 상태가 호조인 게 분명하다.

사우스 다코타 중부 고원이 막 시작되는 지점에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다. 해바라기는 이름처럼 태양이 땅에서 현신한 존재로,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
▲ 해바라기 평원 사우스 다코타 중부 고원이 막 시작되는 지점에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다. 해바라기는 이름처럼 태양이 땅에서 현신한 존재로,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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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다코타 동부의 유령마을 알림판. '1880 타운'이란 글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백인들은 이 시기 미국 북서부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인구 가운데 유령 숫자가 170명이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 고스트 타운 사우스 다코타 동부의 유령마을 알림판. '1880 타운'이란 글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백인들은 이 시기 미국 북서부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인구 가운데 유령 숫자가 170명이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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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은근슬쩍 화제를 이끌어내는 재주가 내겐 없다. 계절은 아무 소리를내지 않고서도 어느덧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고 있지만, 우리 부자 사이에 가로 놓인 어색한 공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바뀌지 않을 듯하다. 손발이다 오글오글해지는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정면돌파다.

"지금은 아빠 때문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말했잖아요, 옛날에 아버지가 일부러 저를 괴롭히기 위해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제게 무슨 말을하면 저도 모르게 그때 생각하고 연결이 되는 거예요. 제가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고,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참 평화롭다. 구름 몇 조각, 낮은 언덕, 점점이 박혀있는 시골 집들… 난 이런 풍경만 보면 마음이 편해지더라."
"아버지는 그러니까 시골에 가 농사지으면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꼭 그래서 그런건 아니다.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게 옳은 삶 같으니까 그런 거지. 풍경 때문에 농사 지으러 가려는 건 아냐."

아들에게 설명을 좀 더 추가하려다 그쯤에서 그만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나는 설명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목소리가 커지는 버릇이 있다. 게다가 윤의 말로는 나는 대개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할 때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내 말은 논리적으로 반박이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 요컨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언짢을 수 있는 얘기도 적지 않다는 거였다.

아이오와와 네브라스카의 경계를 이루는 미주리 강위로 독특한 구조물 장식을 가진 다리가 놓여져 있다. 미주리 강은 미시시피 강과는 달리 로키 산맥 북서쪽에서 발원, 험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탓에 물살이 센 곳이 많다.
▲ 미주리 강 아이오와와 네브라스카의 경계를 이루는 미주리 강위로 독특한 구조물 장식을 가진 다리가 놓여져 있다. 미주리 강은 미시시피 강과는 달리 로키 산맥 북서쪽에서 발원, 험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탓에 물살이 센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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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와 아이오와 경계의 미시시피 강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빛을 가진 미시시피 강가에 해가 저물면 대지 위로 평화와 안식이 함께 내려 앉는다.
▲ 미시시피의 석양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경계의 미시시피 강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빛을 가진 미시시피 강가에 해가 저물면 대지 위로 평화와 안식이 함께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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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둘이서만 엿새째를 같이 지내왔는데, 한번도 서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우리 부자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서로 조심하고, 또 참는 등 나름 신경을 써온 결과이다. 하지만 시종 대체로 마음을 평안하게 했던 주변의 풍광들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윤의는 일리노이 북부의 비슷비슷한 시골 풍경에 대해 조금 지루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런 풍광들로 인해 마음이 불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빠는 참 이 곳을 유달리 좋아하시네요."
"정말 기막히지 않니. 강 너머 석양이 너무 좋구나."

디트로이트에서 출발, 하루 종일을 달려 일리노이의 시골 마을, 하노버(Hanover) 인근의 강가에 도착했을 때 강 너머로막 해가 지고 있었다. 미시시피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들게 긴 강이다. 유장한 맛이 일품인데, 4000km에 육박할 정도로 강의 길이가 긴탓만은 아니다. 산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대평원 지대를 주로 통과하다 보니 급류가 형성되기 힘들다. 강과 땅은 서로를 닮게 마련인가 보다.

느릿한 강물은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는 여명 속에서 초저녁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온 대지에 평화로운 기운이 하나 둘씩 내려 앉았다. '무얼 그리 다툴 일이 있었다고 핏대를 세웠던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갑자기 물처럼 밀려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평안을 앗아갔던 욕심이란 존재가창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윤의를 숨막히게 했고, 삶의 의지를 꺾어놨던 것도 똑 같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지자요수(智者樂水)라 했던가. 욕심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어리석기 때문이다.미시시피의 강물은 옆에서 소리 없이 순리를 읊조리고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 윤의는 내가 저녁밥을 짓는 시간을 틈타,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윤의도어둠 속에 잠긴 미시시피를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항상 어색하기만 한 우리 부자, 큰 강에서 만나 하나로 어울려 같이 흘러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일리노이 북부와 아이오와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유에스 루트 20번. 고속도로 형식이지만 신호등도 중간중간에 적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시골 마을들을 주로 이어주는 목가적인 풍광을 가진 길이었다.
▲ US 루트 20 일리노이 북부와 아이오와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유에스 루트 20번. 고속도로 형식이지만 신호등도 중간중간에 적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시골 마을들을 주로 이어주는 목가적인 풍광을 가진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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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평화, #안식, #미시시피,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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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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