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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일은행이 망했을 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금고에 항상 돈이 가득한 은행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놀라웠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었다. IMF 구제금융, 위태로운 국가 경제 뉴스도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제일은행 사건에 이어 경기은행이 망한 것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큰 일이었다. 둘째 오빠가 경기은행 직원이었던 것이다.

 

경기은행은 한미은행에 인수되었고 몇몇 직원은 고용 승계되어 살 길을 얻었지만 오빠는 해고자 그룹에 속했다.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고되었고 오빠는 같이 해고당한 이들과 매일 한미은행 본점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처가 없었고 같이 데모하던 이들조차 제 살길 찾아 떨어져 나가자 오빠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렇게 실직자가 되었다. IMF 광풍이 휘몰아칠 때여서 실직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흔한 일이라고 해서 개인의 고통까지 흔하게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오빠는 축약시켜 말하면 '타고난 수재'였다. 총명하고 영특하다는 소리를 항상 듣고 살았다. 전남 영광 읍내에서도 2시간은 족히 들어가는 시골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이름을 드높일 재목으로 일찌감치 예견되어 있었다.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가난한 집에 태어난 수재는 부모의 자랑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오죽 대단했으면 그 당시 박정희가 세웠다는 금오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을까.

 

오빠가 입학할 당시 금오공고는 3년 전액 장학금을 주는 기숙사학교로 4년 동안 기술직 부사관의 취업까지 보장하고 있었다. 지금은 단순한 실업고지만 당시 금오공고는 박정희의 위세만큼 대단해 거기 들어가려면 학교 성적은 최상위권이어야 했다. 미래도 보장해주는 학교였다. 그곳에 아들을 입학시킨 아버지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친정집 낡은 사진첩에는 군복냄새 풍기는 교복을 입고 학교 휘장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든 오빠 모습이 들어있다. 마음 씀씀이도 따뜻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어머니 생신날 신문지에 둘둘 말은 목도리를 선물로 내놓는 사람이 둘째 오빠였다. 


오빠의 인생 굴곡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인생 보장 수표 같았던 금오공고를 졸업한 후 부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생겼다. 어느 날 기계 칼날이 작은 오빠의 오른손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어찌어찌 수습해 손가락을 이어붙이긴 했지만 정상적인 손 기능은 불가능했다. 그 사고 이후 오빠는 더 이상 부사관이 아니었고 보훈청에서 매월 얼마간의 돈을 받는 상이군인이 되었고 실업자가 되었다. 겨우 스무 살이 넘었을 때였다. 오빠가 술 마시고 토해내는 울분은 우리 가족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시고 제 몸을 학대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이유 없이 싸우고 경찰서에 끌려가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새벽에 오는 전화를 두려워하셨다. 늦은 밤 혹은 새벽에 오는 전화는 널브러진 오빠를 데려가라는 술집 마담의 전화거나 경찰서에 와서 신원보증하고 데려가라는 전화였던 탓이다. 데려와서도 우리 가족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나중엔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상소리를 해댔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꼬인 것을 풀 방법을 찾지 못해 모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부동산시장에 찬바람 불면서 물거품 된 오빠의 노력


 

그래도 오빠는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지 공부를 시작하더니 대학에 합격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닌데도 대입시험 준비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4년제 정규대학에 척 붙었다. 수재의 면모를 또 한 번 발휘했다. 하지만 신입생 또래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고 과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 듯했다. 때때로 술 마시고 휘청거렸다. 대학 4년을 겨우 마쳤다고도 할 수 있다. 집중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대학 졸업이 힘이 되어 경기은행에 곧바로 취직했다. 이제야 오빠 인생이 갈 길을 찾았나 싶어 부모님은 안도했다. 오빠는 은행에 다니면서도 때때로 술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고 가끔 결근 했지만 그 사이 결혼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가끔 올케가 오빠의 술버릇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오빠는 평범한 가장에 속했다.


경기은행에서 해고된 오빠는 채 마흔도 되지 않았다. 세 살, 한 살 된 남매가 있었고 갚지 못한 아파트 담보대출이 남아 있었다. 인생이 크게 휘청이기 시작한 오빠는 술을 마셨다. 세상을 한탄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수단이었겠지만 매일 술 마시고 주정하는 아빠와 남편을 보는 가족의 고통은 심각했다. 오빠는 삶을 포기한 듯 보였다. 술이 몸을 망가뜨리고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들어 소중한 가족에게 행패도 부렸다. 가장의 실직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해체로 가는 과정… 오빠는 그 길로 곧장 가버렸다. 실직 후 4년 만에 아이들과 아내를 처가에 두고 오빠는 부모님 댁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갈 데 읍서 온 자식을 어치케 내쫓냐."


오빠가 짐 싸들고 부모님 집에 들어왔단 소식을 듣고 '왜 받아줬나' 힐난하는 소리에 어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사는 것만 바랐을 부모님은 중년의 아들을 봉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둘째 오빠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고물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단다. 자식들한테만은 그 일을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아버지는 오빠의 결심을 물리쳐버렸다.


"이번에 이명박 찍을란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내 인생에 도움된 거 하나두 읍다. 경제 살리고 나 살라믄 이명박 찍어야제."


정해진 일 없이 얼굴빛만 검게 변해가던 오빠가 대선을 앞두고 다짐하듯 말했다. 전라도 태생으로 '모태 김대중'파로 분류되는 우리 집안인지라 한나라당을 찍겠다는 것은 반란이었다. 경제부국을 외치던 박정희가 지은 학교를 졸업해 인생의 쓴맛을 보고도 오빠는 경제부국의 꿈을 외쳤다. 취업을 못해 가정까지 어그러진 오빠의 삶을 알고 있는 가족들은 맞장구까지 치지는 않아도 '긍게 사람이 먼저 살아야헌게'라고만 대꾸했다. 하지만 '경제대통령' 이명박이 당선되고도 오빠는 일을 갖지 못했다.

 

오빠는 또 언젠가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을 보더니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한창 상한가를 달리던 부동산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오빠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거 안 되면 저렇게 해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아예 다른 것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오빠는 빈손 신세가 되었다. 오빠는 인생에서 고배를 마실 때마다 고꾸라지듯 절망했고 술을 들이부었다. 취한 채 거의 무의식상태에서 일을 저지르면 그 뒤치다꺼리는 부모님 몫이 되었다. 일흔이 넘은 부모님께서 오빠 때문에 '이대로 죽고 싶다'고 할 때면 나는 오빠가 밉고 부모님이 불쌍해 가슴이 쪼개지는 듯했다.

 

이젠 그 운명을 거스를 일만 남았을 것이다


"많이 못 줘서 미안허다."


처음 집 장만한 우리 집 집들이날 부모님을 모시고 온 오빠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2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대리운전하면서 모은 돈이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쓸 일이 없어지고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오빠는 요사이 대리운전을 업으로 삼고 있다. 빗길에 대리운전하다 차가 미끄러져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 오빠는 여전히 대리운전을 하고 있지만 몸이 좋지 않은 기색이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가끔 어머니에게도 내놓는단다. 어머니가 이모님들과 여행갈 때도 여비로 쓰시라고 봉투를 드려 오랜만에 어머니를 기쁘게 한 모양이다.


"참 잘했다잉, 집을 사고… 잘 되얐다."


오빠는 집들이 날 '좋은 날이니 술 좀 먹어야제' 하면서 술잔을 들고 이 말을 반복했다. 술을 자꾸 먹기에 가족들은 근심 어린 표정이 되었으나 오빠는 술 한 병을 채 먹기도 전에 혀가 꼬부라졌다. 몸이 약해지면서 술 취하는 속도도 급격하게 빨라진 모양이었다. 무언가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지 연신 '좋다 좋다'를 연발하더니 새우처럼 등을 잔뜩 구부리고 앉아 졸기 시작했다. 쉰 살이 다 된 오빠의 등이 참 허전해 보여 눈물이 났다. 결국, 대리운전을 불러 부모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난허게 아그때부터 울고불고 하는 일이 많더만 요로코롬 지 인생이 꼬일라고 그랬는가벼. 징허게 우는 아그들은 지 인생을 미리 알고 나 어치케 살끄나 허면서 우는 거시랑게."


가슴에 달린 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둘째 아들을 두고 어머니가 가끔 주워섬기는 말씀이다. 어머니는 오빠가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 여기고 싶으신가 보다. 체념해야 지금 상황을 견딜 수 있기에 그러시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아기였을 때부터 떼쓰는 일도 많고 울보였다고 한다. 그것도 꼭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아무도 챙기지 않는 어머니 생신 선물을 챙기는 살뜰한 아들이었고 집안을 일으킬 재목감이었지만 지금 둘째 오빠는 부모님의 응어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오빠의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운명이 오빠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면 이젠 그 운명을 거스를 일만 남았을 것이다. 진심을 다해 오빠를 응원한다.

 


태그:#경기은행, #IMF, #실업, #가정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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