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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행적
 

조선시대, 군사들이 일으킨 변란 때문에 궁궐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유일한 왕비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년)다.우리 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신 '명성황후'.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뮤지컬로도 공연되고 또 가장 가까운 시대의 인물임에도 사실과 왜곡이 공존하는 비운의 황후이시기도 하다.

 

명성황후의 전체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아닌 것도 있다.

 

'임오군란'으로 부르는 사건을 둘러싼 기록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것'의 하나다. 인터넷에서 명성황후를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개국을 단행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임오군란 때는 남편인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시어버지를 청나라로 납치시킨 왕비'가 바로 명성황후라는 말이다.

 

'임오유월일기'의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역사시간에 이런 내용으로 배워왔지만, 이런 정설(?)이 곧 깨치고 말았으니 바로 2006년 발견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 때문이다.

 

2006년 5월, 숙종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宋奎濂)의 후손이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기탁한 유물 가운데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 상황을 기록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되었다.

 

송규렴의 7대손인 송헌경의 부인인 여흥 민씨(민응식의 딸)가 친정에서 가지고 왔다고 전하는 작자 미상의 이 일기에는 1882년 6월 13일부터 8월 1일 환궁하기까지의 날씨, 명성황후의 동정, 환후, 관련 인물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일기에 의한 명성황후의 피난길을 살펴보자. 6월10일 창덕궁을 빠져나온 명성황후의 피난길은 다음과 같다.

 

창덕궁→서울 종로구 관훈동→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적취리)→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경기도 이천읍(利川邑)→경기도 여주군 단현리→충북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충북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충북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경기도 안성시→경기도 용인시 양지면→경기도 용인시 용인읍→경기도 용인시 포곡읍 신원리→창덕궁

 

이동경로를 보면 목적을 가지고 이동하기 보다는 불안감에 우왕좌왕하면서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는 급박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원군 납치' 벽보보고 알아

 

창덕궁에서 광주, 이천, 여주, 감곡을 거쳐 노은에 이르는 길은 현재의 도로를 기준으로 150여km이 이르는 거리다. 일기에 따르면 탕약을 짓는 사람과 가마꾼,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등이 함께 명성황후를 모시면서 한 여름에 함께 옮겨 다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은에 도착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린 황후는 비밀리에 올케와 조카며느리를 곁으로 부르고 7월 4일에 조용히 사람을 충주병영에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7월 15일에 경성으로 안정옥을 보내 궁궐의 정황을 알아보게 한다.

 

명성황후가 대원군의 납치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안정옥이 경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베껴 온 청군의 포고문을 보고난 후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임오군란 이후의 상황에 명성황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청나라 '파병요청설' 성립 어려워

 

지금까지 임오군란 발생 이후 군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는 주장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일기를 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군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시각에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피난길을 재촉했던 명성황후가 궁궐에 있는 고종임금과 긴밀한 접촉을 하며 사태 수습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또 임오유월일기는 피난 기간 내내 명성황후가 먹은 탕약에 대한 기록을 보면 주로 소화불량, 식욕부진, 설사, 두통, 신경쇠약에 관한 약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명성황후가 극도의 불안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명성황후 피난길 따라가 보니

명성황후께서 탄생하신 경기도 여주군의 여주문화원에서는 농어촌희망재단의 후원으로 명성황후가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길을 따라 가는 행사를 5월 28일부터 6월 11일ㆍ 25일의 3차례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여주문화원이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명성황후의 피난길 중의 명성황후가 환궁하는 길을 제외하고 '경기도 여주→충북 음성면 감곡→충북 충주시 노은→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5월 28일의 첫 행사에는 44명의 지역주민들이 참가신청을 하여 오전 9시 30분 여주군민회관 앞에서 출발했다. 마치 가족 소풍을 가듯 가벼운 차림으로 나선 참가자들은 오전 10시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 명성황후생가에 도착했다.

 

우선 감고당(感古堂)에 자리 잡은 참가자들은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으로부터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들었다.

 

조성문 국장은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건물은 명성황후께서 왕비로 간택되기 전에 사시던 집이며, 명성황후의 5대조 할머님이 되시는 인현왕후께서도 사시던 유서깊은 집"이라며 "여주문화원에서는 일본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된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매년 명성황후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참가자들은 감고당에서 조성문 국장으로부터 명성황후께서 창덕궁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게 된 당시의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상황에 대해 현실과 비교해 가며 재미있게 설명을 듣고 기념촬영을 했다.

 

감고당를 출발해 11시경 양평군 양동면의 '현감 안정옥 가옥'을 찾은 참가자들은 사람이 기거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집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참가자들은 사랑채는 사라지고 안채만 남은 건물은 지붕은 현대식 기와지만 대들보 등은 옛 모습 거의 그대로이며 상량문도 '용(龍)'과 '구(龜)'자가 선명한 전통식 건축기법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을 둘러보며 '양평군에서 보전이나 복원이 어려우면 여주군에서라도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다시 여주군으로 돌아온 참가자들은 12시30분 여주읍 단현리의 권삼대와 한덤대 가옥을 둘러보았다. 물론 이곳은 양평의 '현감 안정옥 가옥'보다도 더욱 상황이 좋지 않다. 아예 옛집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성문 국장에 따르면 수년전부터 이 마을의 어르신들의 말을 통해 이곳에 잠시 머무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를 간신히 찾아냈으며, 명성황후께서 이 마을로 들어 온 것은 태어나신 마을인 능현리에서 가깝고 '부라우나루터'가 있어 이동의 편리성도 고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일기에 나오는 '여주 단강(丹江)'은 현재 여주 남한강의 4대강 사업으로 설치되는 강천보에서 약 800여m 상류로 현재 여주읍 단현리 앞의 강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부라우나루터에서 10여m 상류쪽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데 큰 바위에는 단암(丹巖)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이 바위 부근에 '단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단암(丹巖)이라는 호를 쓰는 민진원(閔鎭遠, 1664~1736)때문이다.

 

민진원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고 누이동생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며 형은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이다. 민진원은 한 마디로 숙종시대에 소위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그 권세가 오죽 대단하면 마을 앞을 지난는 강의 이름까지도 단강(丹江)이라고 했겠는가?

 

강을 건널 수 없는 참가자들은 다시 명성황후생가의 (사)명성황후기념사업회의 사회적기업이 운영하는 민속마을의 능골주막에서 비빔밥과 국수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충주시 노은면 이시일(李是鎰) 집터로 향했다.

 

이시영의 집터는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58번지(지적도상의 대지 512-1)에 있다. 마을다기능회관 앞에 버스를 세우고 명성황후께서 고종임금을 그리워하며 올랐다는 국망산(國望山) 쪽으로 몇 걸음 걷다보니 '명성황후유허지'라는 푯말이 보인다.

 

정말 반가웠다. 오늘 들렀던 피난지 중에 유일하게 명성황후의 피난지라는 안내판을 설치한 장소를 찾은 것이다.

 

길에서 100여m 거리에는 '명성황후피난유허지'라고 한자로 쓴 커다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모양의 돌 몇 개가 흩어져 있다.

 

비석에 적힌 유허비 건립경위에 따르면 명성황후 환궁 후 대신들과 유림에서 피난지 충주에 행궁(行宮)을 세우자는 주장에 대해 처음에는 고종이 승인하였으나 후에 입장을 바꿔 반대함으로서 연이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끝내 건립되지 못했다고.

 

현재 이 일대에 남아있는 주초석 등의 유물이 행궁건립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행궁 건축비용 관련 소송에 대한 판결문으로 보아 민간차원의 행궁건립운동이 전개되었다가 동학혁명이 발생하면서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가 이시일(李時鎰)의 집에 머물게 된 것은 처음에는 동네에서 잘사는 한씨 집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후환을 두려워 한 한씨의 거절로 가난한 모자가 사는 이시일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초가집에 가난하게 살며 나무를 팔던 총각으로 명성황후를 극진히 모셨던 이시일은 명성황후가 환궁한 후 그 은공으로 음성군수가 되어, 마을에서는 그의 집을 '이음성 집'이라고 불렀다고.

 

이날 일정의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충북 음성군 감곡면 민응식 집터다. 지금의 매괴성당과 매괴여자고등학교 일원이 바로 그곳이다.

 

민응식의 집은 당시 10만냥을 달라고 할 정도로 규모가 큰 집이이었으며, 부근에 여흥민씨들이 여럿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육상교통이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현재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과 사이에 흐르는 청미천은 당시에는 배가 다닐 수 있는 정도로 컸다고 하니 청미천이 남한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볼 때 수상교통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문 국장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피난길에 동행하면서 황후의 행적을 기록한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어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가 처했던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이 일기를 통해 명성황후에 관한 몇 가지 오해가 풀렸듯이 앞으로도 명성황후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명성황후에 대한 더 많은 오해와 부정적 이미지들이 해소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명성황후의 진짜 얼굴은?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접한 이런 문화콘텐츠 속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어떤가?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권력투쟁을 벌이고, 고종을 쥐고 흔들고, 권력욕에 눈이 먼 왕비. 즉,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실체적 증거처럼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배경에는 일제 식민사학과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여성을 폄하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명성황후가 살던 시대는 여성이 정치에 나서는 것 자체를 용인할 수 없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한 황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진보적이고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많아지고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이 부각되고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늘어나고 있다.

 

또한 임오유월일기와 같은 새로운 사료의 발견은 기존사료의 재해석을 요구하게 되고 또 명성황후에 대한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일제 식민사관이나 유교적 문화 중심의 분석에서 벗어나는 다른 평가가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번 '임오유월일기'를 다시 읽고 '명성황후 피난길 따라 걷기'에 참여하면서 명성황후 뿐 아니라, 우리 역사 속의 인물들 중 혹시 왜곡되거나 폄훼된 분들은 없을까 돌이켜 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남한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명성황후, #임오군란, #대원군, #여주군, #여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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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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