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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일본을 넘어 전세계를 경악케 했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넘쳐나던 방사능 유출 사태에 대한 뉴스와 보도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줄어들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남의 나라 일처럼 외신뉴스로 들려올 뿐, 다른 뉴스와 이슈들에 밀려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 나날이 새롭게 밝혀지고 보고되는 실제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부슬비가 내리던 21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핵과 평화, 생명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하는 서울인권영화제가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날은 '핵 평화 거리'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이 상영되었다. 이 중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 핵무기와 방사능의 피해자 원폭2세 '환우' 김형률씨의 삶과 그가 떠나간 자리를 채워가며 한국원폭2세 환우 문제를 알리는 인권운동가로 살아가는 아버지 김봉대씨를 잔잔히 따라가는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가 눈길을 끌었다.

영화는 2005년 5월 29일 세상을 떠난 원폭2세 '환우' 김형률씨와 아버지 김봉대씨의 삶과 활동을 통하여 원자폭탄 피해가 후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관심을 촉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희망의 불꽃이 되고자 했던 원폭2세 '환우' 인권평화운동가였던 김형률씨의 삶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의 분신처럼 아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고자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전한다. 이날 대학로에서 만난 박일헌 감독에게 영화에 얽힌 이야기와 원폭2세환우 인권 문제에 대하여 속깊은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아픈 원폭 2세 많으니, 이 사람들 이야기 꼭 다큐로 찍어달라"

제15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아들의 이름으로> 상영한 박일헌 감독(좌)이 관객과 대화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봉대씨.
 제15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아들의 이름으로> 상영한 박일헌 감독(좌)이 관객과 대화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봉대씨.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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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이름으로>라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형률씨에 대한 미안함, 김봉대 아버님에 대한 미안함이 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2004년 여름,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형률씨와 김봉대 아버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푸른영상에서 활동하고 있던 류미례 감독이 장애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몇 편 만들었거든요. 형률씨가 류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연락을 했나 봐요. '나는 원폭2세 환우인데 만나서 얘기하고 싶고, 원폭2세환우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는 거죠.

그런데 미례씨가 사정이 있어서 푸른영상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이런 내용이 있는데 혹시 관심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기에, '미례씨! 혹시 미례씨가 할 거면 내가 촬영하고 편집은 도와줄 수 있는데…'라고 제가 댓글을 달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미례씨가 김형률씨가 푸른영상에 오기로 했으니 같이 만나자는 거예요. 그게 형률씨 그리고 아버님과의 첫 만남이었어요. 엄청나게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그런데 형률씨는 가을 옷을 입고 온 거에요. 아마 봄 잠바나 가을 잠바였을 거예요. 아버님은 배낭을 메고 말없이 계셨죠. 형률씨를 만나고 놀란 것이 두 가지가 있어요. 형률씨의 왜소한 몸에 먼저 놀라고, 잔기침을 하면서도 쉴새 없이 이야기하는 것에 놀라고.

그렇게 만나고 나서 형률씨한테 메일이 오기 시작했죠. 행사 관련된 소식을 알려줄 때도 있었고 형률씨가 직접 쓴 글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미례씨는 그때 출산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작업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저는 원폭 투하가 너무 오래 지난 일이고 그 역사적인 무게감이 너무 커서 쉽게 도전할 각오가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04년 가을에 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갔는데 형률씨가 해운대에 있는 숙소로 직접 찾아와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형률씨는 여전히 다큐멘터리 제작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죠. 어떻게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필사적이었어요. 저는 지금은 푸른영상의 사정이 안 좋아 바로 촬영에 들어가기는 힘들지만 관심을 가지고 계속 원폭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다고 답했어요. 형률씨는 실망을 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픈 원폭 2세들이 많으니,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끝까지 당부를 하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형률씨 부고 기사가 난 거에요. 그때가 2005년 5월 30일이었죠. 그날 푸른영상에 가서 김동원 감독님께 얘기를 드리고 다음날 부산대학병원 장례식장에 갔어요. 김봉대 아버님을 뵙고 푸른영상에서 왔다고 하니 제 손을 붙잡고 우시더라고요. '형률이가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고 싶어 했다'고. 그러고 보니 김봉대 아버님의 눈물이 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 문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부끄럽게도 형률씨를 알게 되면서입니다. 형률씨가 보내온 메일과 형률씨가 준 책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왜 이걸 여지껏 몰랐을까?' 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읽어왔는데 말이죠."

- 원폭피해자 그리고 원폭2세환우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특히 우리 역사와 사회 속에서 2011년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최초의 피폭 국가라는 사실을 이용해 가해자의 이미지를 감추고, 피해자의 이미지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폭 투하로 당시 조선인 4만 명이 숨지고, 3만 명이 방사능에 피폭된 걸로 추정됩니다. 이는 전체 피해자의 10%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사능에 피폭된 조선인 중 2만 3천 명 정도가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이들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은 한국과 일본 정부로부터 모두 외면당했죠. 형률씨가 늘 얘기했던 것이 병과 가난의 대물림이었습니다.

조선인 피폭자 중에서 몸이 아팠던 분들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가난해지고, 없는 살림에 병원비며 약값이며 돈 들어 갈 일은 많아졌죠. 거기에 자식들에게서까지 이런 저런 병이 나타나고, 그 병이란 것이 쉽게 고쳐지는 병도 아니니, 너무 잔인한 상황 아닌가요?

조선인 원폭피해자와 아픈 2세·3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어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로부터 애써 눈을 돌려 외면하면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지요. 형률씨도 자신이 원폭2세환우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활동을 시작하기 전, 꽤 오랫동안 다른 가족을 생각해 깊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형제들에게 아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형률씨는 알았죠.

저는 형률씨가 했을 그 고민의 깊이를 감히 짐작조차 못해요. 하지만 형률씨가 주장했던 '이제는 우리 사회가 원폭2세환우들의 아픔을 나누어야'한다는 것이 단지 아픈 사람을 '도와달라'는 하소연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원폭2세환우는 전쟁의 아픔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평화의 소중함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원폭투하일에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올해에는 꼭 합천에 방문하기를 요구하고 싶습니다."

"왜소한 몸으로 열정적으로 원폭2세환우 문제 알려"

영화제 상영 전 자택에서 만난 박일헌 감독
 영화제 상영 전 자택에서 만난 박일헌 감독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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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왜 <아들의 이름으로>입니까?
"김봉대 아버님은 어디서 말씀을 하시든지 꼭 앞에는 '김형률 아버지 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세요. 저는 그 말에서 진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김봉대 아버님은 형률씨 얘기라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것이 단지 형률씨 개인에 대한 얘기라면 지극한 부정(父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형률씨 얘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원폭2세환우의 이야기를 하고,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본과 한국정부, 미국의 책임을 꼭 말씀하십니다.

저는 김봉대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형률씨가 아버님의 몸을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아니면 아버님이 형률씨의 마음을 받아서 이야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아들의 이름으로'라는 제목은 형률씨와 김봉대 아버님이 한 몸이라는 제 생각을 담은 제목입니다."

- 현재 살아계신 '원폭2세'환우' 당사자의 평소 일상이나 활동 현장을 따라가면서 촬영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돌아가신 고(故) 김형률씨를 작품의 중심에 둔 까닭은 무엇입니까?
"형률씨를 만났던 분들을 인터뷰 하면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모두 형률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왜소한 몸에 놀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왜소한 몸으로 굉장히 열정적으로 원폭2세환우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는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김형률은 굉장히 당당한 사람입니다. 그 당당함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죠. 그러나 형률씨의 당당함은 깊은 고민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형률씨의 컴퓨터 안에 저장된 다양한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자료의 방대함에 놀랐습니다. 한일관계의 역사적 문제에서부터 인권에 관련된 자료도 있고, 유전학· 병리학과 같은 의학자료와 외국서적, 문학작품도 있고요. 일본어 공부를 했던 흔적도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가 싶을 만큼 많은 자료들을 모으며 스스로 공부하고 늘 싸워왔던 거에요.

아마도 자신이 병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말 그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형률씨의 그러한 노력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 제작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촬영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있다면?
"어떤 순간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가 힘든데요. 제가 처음 이 작업을 하려고 생각하면서 최소한 3년은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김봉대 아버님을 알게 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봉대 아버님과 단순히 친해지는 것이 아니고, 신뢰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버님과의 촬영은 처음 인터뷰 할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평소에는 조금 편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제가 촬영을 하면 어느새 일종의 촬영모드로 변하셨죠. 예를 들면,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거나, 말투가 바뀌신다든가 하는 식이죠. 지금도 여전하시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저를 대하는 것이 많이 편해지셨다고 생각합니다. 관계가 크게 변한 계기가 한 번 있기는 했죠.

형률씨 3주기 추모식 때로 기억하는데요. 추모식 전날 일본에서 오신 분들하고 부산에 계신 지인들, 추모사업회 관계자와 김봉대 아버님, 이곡지 어머님이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제가 소주 몇 잔 했겠다, 아버님한테 섭섭했던 적이 있었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제 부친이 2006년에 말기암 판정을 받고 병원생활을 하셨는데, 제가 간병을 하게 되었죠. 그때 병원에서 김봉대 아버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서울에서 어떤 행사를 하는데 와서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상황을 설명드리고 이해를 구했는데요, 아버님은 그래도 와서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그때는 참 섭섭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해가 되더라고 고백했어요.

제가 아버지를 6개월쯤 간병하면서 가족이 아픈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느꼈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아버지, 조금씩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김봉대 아버님은 그런 생활을 30년 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분이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형률씨는 행복했을 것 같다, 뭐 이런 얘기를 김봉대 아버님 앞에서 했습니다. 아마도 그 후 저를 대하는 태도가 약간 바뀐 것 같아요. 예전의 사무적인 태도에서 이제는 조금은 편하게 대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힘든 것은 없구요.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김봉대 아버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많이 걸리네요."

- 한국 사회에 원폭피해자와 2세 '환우'들의 삶은 종종 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했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지만 아직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관심과 인식도도 미미한 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도 참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러면서 형률씨가 느꼈을 벽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제 자신이 그 벽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이었던 것도 부끄럽고요. 형률씨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사들이 한국 원폭2세 환우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아마 형률씨도 우리 사회가 원폭에 대한 역사 인식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원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고,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역사인식이 아니었나 싶어요. 미국의 원폭 투하가 정말로 필요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관점과는 다른 우리만의 관점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미국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도 크게 작용을 했구요. 식민 지배에 따른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원폭 투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했고, 그 때문에 조선인 원폭피해자는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원폭2세 환우 문제 눈 감는다면 언젠가 대가 치를 것"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제15회 인권영화제. 셋째날인 21일은 핵_평화_거리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제15회 인권영화제. 셋째날인 21일은 핵_평화_거리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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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의 주인공들인 원폭2세'환우'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형률씨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겠습니다. 한국정부는 '선지원 후규명'을 해야 합니다."

- 일본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하여, 세계적으로 탈원자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원자력의 안전성, 경제성, 친환경성, 무한에너지원에 더하여 방사능 안전 기준치의 허구와 신화가 우리 사회를 그동안 지배해왔습니다. 더불어 핵의 군사적 이용은 안 되지만, 평화적 이용과 에너지원으로서의 이용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요. 이런 경향에 대하여 감독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가 과학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며 단지 기록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답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닌데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핵의 평화적 이용'은 없다는 겁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의 아픈 원폭 2세들을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나 일본정부가 요구하듯이 그들 앞에 과학적 '증거'를 댈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제가 본 것을 그리고 제가 촬영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그들의 판단을 구할 뿐입니다."

-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의 마음에는 저마다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겠지만, 이것만큼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사회가 원폭2세 환우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형률씨나 김봉대 아버님은 먼 과거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아니면 모레, 10년 후, 20년 후,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문제를 형률씨가 앞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으며, 이제는 김봉대 아버님이 그 이야기를 이어받아 하고 계신 것인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어떤 국가도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원자력 발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앞으로 어떠한 작품을 찍고 싶으십니까? 또,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김형률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이구요. '한국원폭2세환우회'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좀 게으른 사람이라서요. 그리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김봉대 아버님과 이곡지 어머님이 건강히 오래오래 사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태그:#박일헌, #아들의 이름으로, #방사능, #원폭,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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