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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가장 높은 열에서 끓지만 끓을 때 익지 않는다. 끓고 나서 약한 불로 뜸을 들일 때 익는다. 과일은 한여름 무더위에 몸통을 키우지만 맛을 내지는 못한다. 이끼에 수분이 줄어들고 땅이 입을 다물어 더 이상 물을 삼키지 않는 건조한 가을볕에 빛깔이 짙어지고 맛이 든다."(이경자,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중)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첫물에 우려내지 못한 진국을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2월, 부산CBS 프로그램 '책 읽는 크리스천'에서 인터뷰할 때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요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자주 붙잡는다. 그 시절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들이 많아 내용이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책을 분명 읽었는데도, 깊이 감동했고 흥미롭게 읽었던 것만 생각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동 깊게 읽은 책을 가까이 두고 있다면야 그 내용이 어떠한지 궁금할 때 대충이라도 들춰보고 알 수도 있겠지만 십 년, 이십 년 그리고 더 오래된 까마득한 기억을 헤치고 책의 내용을 다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그저 그 책을 읽고 남은 감동과 느낌, 그 분위기만 희미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이럴 때는 정말 책을 사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

 

나이 들어가면서 종종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었지만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책에서 그 책을 누군가 소개하거나 할 때 불현듯 잊고 있었던 그 책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읽긴 했는데, 어떤 내용이었지? 혼자 생각해보기도 하고, 또 예전에 읽었던 책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책을 새로 구입해 읽기도 한다.

 

매일 새로 태어나는 책들이 많아서 갓 태어난 책을 읽고 싶은 욕심도 무시 하지 못한다. 해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또 다시 읽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예전에 읽었던 책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길 때가 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책, 그 책을 읽을 때의 배경과 내 마음의 상태, 기억을 일깨워주는 '발화점'을 만나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느낌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걔, 잘 지내지?" 혹은 "그 친구 있잖아!" 하며, 잊고 있었던 옛 친구를 이름을 말할 때 깊은 무의식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옛 감동, 옛 느낌을 떠올리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과 조우한다. 몇 달 전부터 다시 읽은 책들을 몇 권만 꼽자면, 외국 도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존 번연의 <천로역정>,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이 있다. 국내 도서로는 박경리 작가가 돌아가신 뒤에 예전에 읽었던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고, 박완서 작가가 가신 뒤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목>을, 그리고 오정희의 <옛 우물> <새>,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은희경의 <새의 선물> 등을 읽었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두고 있다.

 

싱싱한 옷을 입고 막 나온 책들이 주는 신선함도 좋지만 깊은 맛 우려내는 다시 읽는 책, 그것은 짙은 향이 사라진 뒤의 은은함이 있다. 새로운 만남이 주지 못하는 옛 사람의 향취라고나 할까. 오랜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후일에 다시 만나도 멀리서도 금방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에 설렘이 있다. 가까이 다가서며 만감이 교차한다. 시간을 공유하고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재회 속에서 옛 감정을 가진 채로 서로를 마주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예전에 없던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닿을 때가 많다. 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단점이 드러나고 마냥 좋게 생각했던 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혹은 시시하고 그저 그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던 다시 보니 예전엔 전혀 몰랐던 장점들이 새롭게 돋보이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그 좋은 점이 여전히 좋고 그 좋음이 강화되어 있음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뵈고 통찰이 온다. 어려서 읽었을 땐 어리고 어리석고 미숙하고 서툴렀고 눈도 귀도 마음도 얕아서 보이지 않았는데, 철들고 난 지금 다시 읽으면서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린다. 보이는 것이 재해석된다.

 

한편 그때 내 키가 너무 낮아서 크고 높고 위대하게 보였던 것이 아주 작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치 어렸을 때는 마당이 그토록 크고 넓어 보이다가 어른이 되어 그 마당에 섰을 때 마당이 아주 작다는 것을 경험하고 놀라듯이. 내 정신의 키가 훌쩍 자라 있다. 지금 보니 거인이 아니라 소인이다. 10대, 20대, 30대, 40대… 살아오면서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보니 아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다시 보이고 재해석된다.

 

이렇듯 읽은 책을 다시 읽 또 다른 통찰력을 준다. 아까운 시간을 내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자연히 내가 좋았다고 생각했던 책들이다. 모든 책을 다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그저 그랬던 책을 읽기란 아까운 시간이므로 아무래도 선택에서 이미 배제된다. "맛을 음미하며 먹어야 하는 책도 있지만, 들자마자 곧장 삼켜 버려도 상관없는 책도 있다. 그리고 비록 수는 적지만 이리저리 잘 씹어서 확실히 소화시켜야만 하는 책도 있다."라고 한 프랜시스 베이컨이 했던 말처럼.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 중에 하나는 좋은 책은 여전히 지금도 좋다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롭게 와 닿는 것이 있다. 일본작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의 고양이 빌딩에 엄청나게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많은 책들을 한 번 읽기도 버거울 텐데도 어떤 책은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져서 부서질 것 같은 책들도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첫 물에 우려내지 못한 진국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음식이 익는 것은 이제 막 불 위에서 펄펄 끓을 때 익는 것이 아니라 끓고 나서 약한 불로 뜸을 들일 때 익는 것처럼, 과일이 한여름 무더위에서 몸통을 키우지만 그때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끼에 수분이 줄어들고 땅이 입을 다물어 더 이상 물을 삼키지 않는 건조한 가을볕에 그 빛깔이 짙어지고 맛이 드는 것처럼...

 

처음 읽으면서 들여다보지 못했던 책의 행간 속 숨은 의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읽으며 드러난다. 미처 우려내지 못한 진국이 거기서 조금씩 맛을 낸다. 읽은 책 다시 읽기는 깊은 만남을 원하는, 깊이 있는 만남을 원하는 제스처다. 그 책을 읽을 때의 감동과 분위기 등 추억하는 행위다. 마음의 속살까지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다시 읽을 때...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내 지난 삶을 재해석하는 것과 같다.


태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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