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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벌어지는 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를 둘러싼 복마전이 볼 만하다. 언론에 투영된 과학벨트 유치전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과학벨트를 놓고 대한민국이 충청권과 비충청권으로 구도가 갈린 형국이다. 지역언론들이 쏟아내는 과학벨트 의제는 크게 두 부류다. '약속(대통령 공약)대로 이행하라'는 쪽과 흩어 놓고 다시 판을 짜자는 논리에 무게가 실린다. 충청권은 전자, 비충청권은 후자에 속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과학벨트를 유치하겠다며 기를 쓰고 경쟁하는 모양새가 볼썽사납다. 각 지역 정치권과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과학벨트 유치전략 소식을 해당지역 언론들은 앞 다퉈 지상중계하며 연일 흥분하고 있다. 각 지역마다 높디높은 경계선을 긋고 사는 듯하다. 지역신문들을 한데 모아 놓고 보면 마치 여러 딴 나라(소공화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처럼 보인다. 제목들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과학벨트, '보이지 않는 손' 작용하나 -<대전일보> 1월 4일

'과학벨트 입지' 도내선 찬밥 대접? -<경인일보> 1월 19일

"과학벨트 입지 세종시가 최적지" -<중도일보> 1월 21일

"과학벨트 충청권 유치 공약 지켜라" -<충북일보> 1월 20일

 

'과학비즈니스벨트 호남이 최적' -<광주일보> 1월 12일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 "공모절차 거쳐야"' -<영남일보> 1월 18일

과학비즈니스벨트 유치 홀로 뛰는 광주시 -<전남일보> 1월 20일

'과학벨트 정치논리 중단하라' -<경기일보> 1월 21일

'과학벨트 호남도 신청하면?...민주당도 딜레마' -<전북도민일보> 1월 21일

 

대선 앞두고 그토록 강조하던 충청권 과학벨트... 민심 잡기용?

 

왜 이런 복마전이 연초부터 발생한 것일까. 상황을 종합적으로 복기를 하자면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당은 당시 충청권 민심 잡기에 사활을 거는 듯한 행보를 내비쳤다. 특히 이명박 후보는 선거 3∼4개월을 앞둔 2007년 9월과 10월 충청권 민심잡기에 집중한다.

 

그해 한나라당과 이 후보는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행정중심복합도시, 충북 오창·오송단지를 잇는 '한국판 실리콘밸리' 조성이라는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해 보였다. 충청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충청민들이 크게 반겼다. 특히 3조5000억 원이라는 거대한 사업비가 투입되는 과학벨트가 '국가의 미래 먹을거리'라며 제시하는 가치에 흥분 할만도 했다.

 

이 같은 공약은 그 후에도 이 대통령이 2008년 7월 충북도 도정보고와 '2008 충북발전 전략 토론회'에 참석해 "과학벨트는 충청권 위주로 해야 하며 관계 장관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밝혀 더욱 힘이 실렸다.

 

그 후 2009년 2월 우여곡절 끝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됐고, 지난해 12월 8일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그러나 입지선정 요건만 규정했을 뿐 충청권에 조성한다는 것은 명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충청 민심을 부글부글 끓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세종시 아픈 기억, 과학벨트 문제 겹치면서 충청민심 더욱 '부글부글'

 

지난 1월 6일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를 방문한 임기철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이 과학벨트 입지와 관련해 "전국을 대상으로 입지 선정기준 평가항목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이 발언은 충청도민들이 또다시 우롱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대통령의 공약인데 설마설마 하던 민심이 이를 기화로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벨트의 향배 또한 안개정국이 됐기 때문. 세종시 사태가 남긴 아픈 기억이 과학벨트 문제와 겹치면서 이 지역 민심은 더욱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이때를 놓칠세라 각 지역마다 과학벨트 유치전에 너도나도 가세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우리가 최적지", "우리도 공모전에 가세" 등의 제목들에서 불씨의 강도가 묻어난다.  

 

충청권을 정치 기반으로 한 자유선진당이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과학벨트 발언 시사회'를 연 것도 이러한 복마전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 대통령 스스로의 약속인 과학벨트 충청권 입지를 강하게 촉구했다.

 

<충청일보>의 다음날 '이대통령, 과학벨트 충청 조성 8번 약속'이란 제목의 기사가 전날 상황을 잘 짚어줬다. 기사는 "이날 시사회 자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과, 그 이후에도 과학벨트 충청권 입지 약속을 직·간접적으로 무려 8번이나 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우선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경선 후보는 '대전·충청 공약 홍보동영상'을 통해 과학벨트 충청입지를 약속했고, 박근혜 전 대표와 당내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8월 8일 대전·충남 합동 연설회에서도 이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기사는 "이명박 후보는 또 2007년 9월 12일 목원대학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같은 해 10월27일 대전과학고에서 열린 과학기술인들과의 타운미팅, 곧바로 11월28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기자회견에서 이를 확약했다"고 쐐기를 박았다. 

 

또한 "세종시 수정안 추진이 절정이던 지난해 1월11일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세종시내 과학벨트 조성 관련 브리핑을 했고, 교과부는 '세종시 과학벨트 홍보영상'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안병만 당시 교과부 장관은 1월17일 KTV 정책대담을 통해 과학벨트의 세종시 조성이 필요성을 강한톤으로 강조한 바 있다"고 기사는 덧붙였다.

 

충청 외 경기·영남·호남도 가세하며 과학벨트 '복마전', 왜?

 

이에 앞서 큰 불씨가 던졌다. 충청권 광역·기초단제장과 국회의원, 시민사회단체 대표자 등 각계 인사들은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 입지 사수를 위한 공동행보에 나섰다. 이시종 충북지사와 염홍철 대전시장, 안희정 충남지사는 1월 17일 오후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 조성을 위한 추진협의회 발대식'을 열면서 민심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이들은 이날 채택한 결의문을 통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당시 '세종시, 대덕연구개발특구단지, 오송·오창 BT·IT단지를 광역경제권으로 묶어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던 충청권 핵심공약인 만큼 반드시 이행돼야 한다"면서 "정치적 논리나 다른 요인에 의해 이 사업이 영향을 받는다면 강력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과학벨트 유치를 희망하는 곳은 갈수록 늘고 말았다. 충청권 외에 경기, 영남, 호남지역이 가세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제발 정치권은 입을 다물라"는 기사와 사설도 눈에 띈다.

 

이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1일 오전 KBS MBC SBS 등 방송 3사가 생방송으로 내보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민감한 현안인 과학벨트와 관련한 질문에 애매한 입장의 답변을 꺼내 놓아 다시 충청권 민심이 타들어 가고 있다.

 

"대통령 공약은 그냥 어느 지역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기초단체 몇 군데 찍어서 연결시키는 이런 과학벨트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대로 가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통령은 "과학벨트는 그 당시 여러 가지 정치상황이 있었고, 지난번 대국민 발표문에서 얘기했지만 내가 거기에선 혼선을 일으킬 수 있는 공약이 선거 과정에서 있었다고 밝혔다. 거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고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오송·오창 산업단지, 한국판 실리콘밸리 육성하겠다더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대통령이 이날 주장했던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이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지된 '제17대 대선 한나라당 정책공약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공약집 50쪽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조성'편에선 "중부권을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육성"한다며 "행복도시 대덕 연구단지 오송·오창의 BT·IT 산업단지를 하나의 광역경제권으로 발전시켜 한국판 실리콘 밸리로 육성하겠습니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바로 그 아래에는 "세계일류 명품도시 건설"이란 공약도 나란히 붙어 있다.

 

이밖에 충청남도 대선공약집에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구축'이라는 제목으로 "연구단지와 산업단지를 한곳에 집적화하여 세계지식 유통의 중심으로 육성해야 한다"면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조성하여 기초과학센터를 건설하고 글로벌 기업의 연구소를 유치하겠습니다"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대통령의 발언이 충청권 민심을 더욱 자극시킨 꼴이다. 이미 예견했다는 듯, 지역신문들은 자사 인터넷신문에 충격과 분노를 가득 담았다. 하루 지난 후 발행 될 신문의 활자와 사진 등에서 묻어날 비판의 강도와 무게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충청투데이>는 이날 인터넷신문 메인에 '이대통령, 과학벨트 공약 파기 발언 '충격''이란 제목과 함께 "이 대통령은 1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TV 생중계로 열린 '대통령과의 대화, 2011대한민국은'이란 제목의 신년 방송 좌담회에서 과학벨트 충청권 입지는 충청권의 표를 얻으려는 의도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백지상태에서 입지를 선정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며 이는 "공약을 스스로 폐기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TV 등을 통해 이 대통령이 과학벨트 공약을 파기하는 모습을 본 충청민과 야당들은 '충청인에 대한 사기행위'라며 반발하고 나섰다"는 기사는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의 발언을 인용, "이것이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의 말인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과학벨트에 관해 우리 대한민국의 과학메카,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이렇게 눈 뜨고 뻔한 사실을 뒤집고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충청권 대선공약 백지화 공식 선언"...다음 선거에 얼마나 영향 미칠까?

 

<중도일보>도 이날 자사 인터넷신문의 '이대통령 "과학벨트 공약집에 없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선거 유세에서는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며 "거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고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한 발언에 무게를 뒀다. 기사는 이어 "공약 백지화 방침을 사실상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대전일보>도 인터넷신문을 통해 '이대통령 "과학벨트 원점서 재검토"'란 제목과 '충청권, 야당에선 강력 반발'이란 부제를 단 기사를 내보냈다. "사실상 대선공약에 얽매이기 보다는 추진위원회와 과학자들의 입장에 따르겠다고 '공'을 떠넘긴 것으로 풀이된다"는 기사는 "이에대해 충청권과 야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공약을 파기했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이 지역 언론들은 민주당과 선진당이 긴급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본인의 충청권 대선공약이었던 과학비즈니스벨트 백지화를 공식 선언했다"면서 "사기 행위 자백한 대통령을 충청인은 인정할 수 없다"고 공격한 내용들을 비중 있게 다뤘다.

 

"대전·충남의 과학 산업은 국내에 머물러 있다. 이제 세계적인 과학과 세계적인 기업이 만나야 한다. 대전·충남을 우주 산업의 메카로 만들겠다. 세종시의 자족능력 강화를 위해 세계적인 국제과학기업도시 기능을 더해 제대로 된 자족도시를 만들겠다."

 

4년 전 이런 공약과 발언들은 충청권 민심 잡기용에 불과했단 말인가. 충청권 민심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또 다시 강력한 매개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태그:#이 대통령 발언, #과학벨트, #충청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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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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