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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실크로드 기행의 중심도시는 둔황과 투르판이다. 그것은 이들 도시가 실크로드의 출발과 중간 기착지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경관, 인문경관, 민속풍정이 독특하고 가치 있어 볼만하기 때문이다.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것은 사막이고, 인문경관을 대표하는 것은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도시에서 이틀씩 머물게 되었다.

 

투르판의 둘째 날에는 두 가지 인문경관과 한 가지 자연경관을 보도록 되어 있었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교하고성을 보고, 투르판의 명물 카레즈(坎儿井)를 볼 예정이다. 카레즈는 지하수로로 투르판 포도농사의 근간이다. 그리고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소공탑을 보고 포도 농가를 방문할 예정이다. 포도는 투르판의 명물이다.

 

연 강수량이 16㎜인데, 빗방울이 톡톡

 

아침에 호텔을 나서는데 하늘이 조금 꾸물꾸물하다. 지금까지 날씨가 이렇게 흐린 날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덜 덥다. 가이드가 투르판에 와서 비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비가 오면 1년 강수량 16㎜ 중 단 몇 ㎜라도 맞는 것이 될 테니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는 투르판 서쪽 10㎞ 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창으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진다. 톡톡 떨어진다고 우리네 굵은 빗방울을 생각하면 안 된다. 또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비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구별이 안 되고, 또 조금 가다 보면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한 10분쯤 차를 달리니 하천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이 하천은 아이자구(亞爾孜溝)로, 두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 30m 높이에 교하고성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하고성은 천 길 낭떠러지기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천혜의 요새다.

 

우리는 먼저 교하고성 문물진열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교하고성을 1/250로 축소한 모형도가 있다. 첫 눈에 이곳이 요새임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을 나와 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고성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이 있다. 평상시 고성의 출입문은 오로지 여기 밖에 없다. 이곳이 교하고성의 주 성문인 남문이다. 그러므로 방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곳만 잘 지키면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현재 올라가는 길은 완만하다. 옛날에는 하천에서부터 몇 겹의 문을 만들어 놓아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았겠지만, 지금은 편안하게 올라갈 수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교하고성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제 30m 높이의 교하고성 영역으로 들어간다. 교하고성은 남북으로 길게 발달된 도성이다.

 

남문에서 큰길을 따라 들어가면 일종의 궁궐과 관공서가 나온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동문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탑림이 나온다. 탑림은 현재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북쪽에 있다. 탑림 너머에는 묘지가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탑림 서쪽에는 고성의 중심사원인 대불사가 있다. 그리고 대불사 서쪽에는 서문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대로를 따라 요망대(瞭望臺)까지 갈 것이다. 요망대란 전망대 겸 감시초소에 해당한다. 요망대에서 길은 대도를 따라 다시 남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런 코스로 성을 한 바퀴 돌면서 전체를 조망할 예정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관찰 대상은 관서, 동문, 탑림, 대불사, 요망대다. 이곳에 교하고성 1500년 역사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교하고성 둘러보기

 

남문을 지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요망대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관서가 나온다. 우리는 관서로 해서 동문 쪽으로 갔다. 관서는 교하고성의 지도자들이 거주하며 업무를 처리하던 공적인 공간이다. 현재 흙으로 쌓은 지상의 건조물은 사라지고 내부공간만 확인할 수 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가운데에 통치공간인 천정정원(天井庭院)이 있다. 이곳은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통로를 통해 사방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원의 옆 공간에 나무로 만든 이상한 물건이 있는데 용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둥근 나무 가운데 홈이 파이고 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도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서를 나온 우리는 어린 아이 무덤군(嬰儿古墓群)으로 가 사방을 조망했다. 이곳이 옛 도시의 중간쯤 되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탑림이 멀리 보이고 동쪽으로 동문이 가까이 보인다. 이곳에는 위구르 전통복장을 한 젊은 여자들이 음료수 등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빗방울도 떨어지고 날씨가 덥지 않아서인지 별로 팔리질 않는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동문이다.

 

동문은 성의 동쪽 가파른 절벽 안에 만들어진 반원형의 옹성이다.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고, 조망용 초소의 방 흔적도 남아 있다. 이 문은 갱도를 통해 30m 아래와 연결된다. 동문 아래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으로는 포도건조장이 보인다. 이 근방에도 포도가 많이 재배된다는 얘기다. 동문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다 보면 민가도 보인다. 지붕은 없고 벽과 바닥만 확인할 수 있다.

 

동문에서 북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10분쯤 가면 탑림이 나온다. 탑림은 말 그대로 탑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정확히 10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탑이 흙으로 만들어져 대부분 무너진 상태다. 그 중 가운데 있는 큰 탑 하나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탄소 연대측정 결과 1,640년 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차사전국(車師前國)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탑림을 나와 남쪽으로 나온 다음 서쪽으로 가면 대불사에 이른다. 대불사는 동서가 59m, 남북이 88m에 이르는 큰 절이다. 이 중 나는 서쪽에 있는 작은 절을 살펴본다. 사방의 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안의 구조물도 어느 정도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쪽으로 가 보니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하수 수위가 저 아래 하천과 같다고 생각하면 깊이가 30m는 될 것이다.

 

대불사를 보고 나서 나는 잠시 서쪽 단애로 가서 성벽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천 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흙벽이 울퉁불퉁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식량과 물만 있으면 6개월이고 1년이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성벽 아래 하천 양쪽에서 과일과 채소, 곡식 농사가 지어지고 있다.

 

남쪽으로 나 있는 대로를 따라 요망대 방향으로 갔다. 중간에 잠깐 민가유적도 살펴보았다. 대로는 요망대를 우회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요망대는 도심의 한 가운데 있어서 중앙대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치안용으로 사용되고, 전시에는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요망대에는 가운데 주실이 있고, 둘레에 4개의 측실이 있다. 1978년 보수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8.4m, 둘레가 88m에 이른다.

 

요망대를 보고 남쪽 대로를 따라 나오면 처음 출발한 남문에 이른다. 이제 오락가락하던 빗방울도 거의 느끼지 못하겠다. 하천을 건너며 보니 오리들이 노닐고 있었다. 사막지역에서 보는 희귀한 광경이다. 물과 풀, 나무와 성으로 이루어진 풍경 속에 움직이는 동물들이 있으니 문화유산이 살아있는 듯하다. 과거 이곳 교하고성에 사람이 살 때는 닭과 양 등 동물들이 더 많았을 텐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교하고성과 투르판의 1500년 역사

 

교하고성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사(姑師)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생활했다. 그 후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450년까지 이곳은 차사전국의 도성이 되었다. 450년부터는 중국과 통교하며 고창국을 만들어 64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당나라에 귀속되어 교하현이 되고, 당나라 안서도호부의 치소가 되었다.

 

9세기 중엽에는 고창회골국의 관할이 되었으며, 현재 겉으로 드러난 상당수 유적은 고창회골국 시기의 것이다. 고창회골국은 오고타이한국의 황제인 하이두(海都: 1235-1301)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1389년 무굴제국의 공격을 받아 다시 한 번 폐허가 되었고, 이후 1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1462년 유누스칸(일명: 하지 알리, 중국명: 哈只阿力)이 무굴제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투르판 지역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했다. 중국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한 것은 1777년이다. 당시 투르판 지역을 다스리던 위구르족 지도자인 액민화탁(額敏和卓)이 청나라로부터 왕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투르판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태그:#교하고성, #유니스코 세계유산, #남문, #관서, #탑과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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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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